보증금에서 월세 빼라는 세입자… 명도소송 가능할까
-보증금 남아도 월세 지급의무는 별개 -상가 연체액 3기분이면 해지 가능 -공제 합의와 해지 의사 도달 확인
보증금은 임대차관계에서 생기는 채무를 담보하는 돈이지 임차인이 임의로 월세 대신 사용할 수 있는 돈은 아니다
보증금이 남아 있으니 밀린 월세는 거기서 빼면 된다는 임차인의 말만으로 차임 연체가 해결될까. 상가 임대차가 계속되는 동안에는 보증금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월세 지급을 거절할 수 없다. 임대인이 공제에 동의했는지, 실제 연체액이 얼마인지, 해지 의사가 도달했는지를 나눠 살펴야 명도소송 가능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법도종합법률사무소 엄정숙 변호사는 22일 "보증금은 임대차관계에서 생기는 채무를 담보하는 돈이지 임차인이 임의로 월세 대신 사용할 수 있는 돈은 아니다"라며 "보증금이 충분하더라도 별도의 정산 합의 없이 차임 지급을 중단하면 계약 해지와 명도소송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가령 점포를 운영하는 임차인 A씨가 영업 사정을 이유로 월세 지급을 중단한 상황을 가정해 보자. A씨는 임대인에게 보증금에서 공제하면 손해가 없지 않으냐고 주장하지만, 임대인은 매달 정해진 날에 월세를 지급하라고 요구한다. 공제나 지급 유예에 관한 합의가 없다면, A씨가 일방적으로 제안했다는 이유만으로 월세가 납부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보증금과 월세는 역할이 다르다. 보증금은 차임 미지급이나 목적물 훼손 등 임대차관계에서 발생하는 임차인의 채무를 담보한다. 반면 월세는 계약에서 정한 지급기일에 이행해야 하는 의무다. 담보가 충분하다는 사정이 당장 지급할 의무까지 없애 주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대법원은 2016년 11월 25일 선고한 2016다211309 판결에서 임대차관계가 계속되는 동안 연체차임을 보증금으로 충당할지는 임대인이 선택할 수 있다고 밝혔다. 계약 종료 전에는 공제 등 별도의 의사표시 없이 연체차임이 보증금에서 당연히 공제되지 않으며, 임차인도 보증금의 존재를 이유로 차임 지급을 거절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 제10조의8은 임차인의 차임연체액이 3기의 차임액에 달하면 임대인이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고 정한다. 월 단위로 차임을 지급하는 계약이라면 연체액이 월세 3회분에 해당하는지가 기준이다. 보증금 잔액이 그보다 많다는 이유로 이 기준의 적용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연체액 계산에서도 주의가 필요하다. 단순히 월세를 늦게 낸 달의 수만 세는 것이 아니라, 해지를 주장하는 시점에 지급기일이 지난 차임 중 미납액을 구분해야 한다. 일부씩 덜 낸 금액이 누적된 경우와 연체분을 이미 납부한 경우는 다르다. 관리비나 손해배상액을 차임과 구별하지 않고 합산하는 것도 피해야 한다.
다만 당사자가 실제로 월세를 보증금에서 공제하기로 합의했거나 지급기일을 변경했다면 사정이 달라질 수 있다. 계약서 특약, 문자메시지, 정산 내역 등을 통해 합의 내용과 적용 기간을 확인해야 한다. 임대인이 그동안 월세를 독촉하지 않았다는 사정만으로 모든 연체분을 공제하기로 합의했다고 단정해서도 안 된다.
해지할 수 있는 연체액에 도달했다고 계약이 자동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민법 제111조 제1항에 따라 상대방이 있는 의사표시는 상대방에게 도달해야 효력이 생긴다. 임대인은 해지 의사를 명확히 표시하고 그것이 임차인에게 도달했음을 뒷받침할 자료를 갖춰야 한다.
내용증명은 해지 의사를 남기는 수단으로 활용되지만, 보냈다는 사실과 상대방에게 도달했다는 사실은 구분된다. 우편 배달 내역이나 수령 자료 등을 함께 확인해야 한다. 사안에 따라 소장 송달로 해지 의사를 전달하는 방법도 검토할 수 있으므로, 내용증명을 먼저 보내지 않으면 명도소송을 할 수 없다고 단정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소송을 준비할 때는 임대차계약서, 월별 차임 지급기일, 입금 내역, 공제 또는 유예에 관한 대화 기록을 시간순으로 정리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누가 언제 얼마를 지급했는지와 임대인이 어떤 정산에 동의했는지가 드러나야 한다. 보증금이 충분한지에만 논의를 집중하면 정작 해지 요건과 연체액 계산에 필요한 자료를 놓칠 수 있다.
임대차 종료에 따른 정산 문제도 따로 남는다. 보증금으로 담보되는 연체차임 등 채무와 반환할 잔액을 계산해야 하므로, 명도소송을 제기했다는 이유만으로 보증금 전체를 임대인이 보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계약 종료 여부를 다투는 문제와 실제 반환할 금액을 산정하는 문제를 구별해 청구와 대응을 준비해야 한다.
임차인도 영업 사정이 어렵다면 일방적으로 납부를 멈추기보다 공제할 금액과 기간, 변경된 지급기일을 서면으로 합의하는 편이 분쟁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합의가 성립하지 않은 상태에서 보증금만 믿고 점포를 계속 사용하면, 예상과 달리 계약 종료와 인도 청구에 대응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
엄 변호사는 "명도소송에서는 보증금 잔액만 볼 것이 아니라 차임 지급 약정, 실제 연체액, 공제 합의 여부를 함께 확인해야 한다"며 "임대인은 해지 의사의 도달을 입증할 자료를 확보하고, 임차인은 정산이나 유예 합의가 있었다면 그 근거를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글) 법도 종합법률사무소 엄정숙 부동산전문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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