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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경의 클래식 동맹 6] “나는 이제 무대 뒤 어둠을 사랑한다”

케빈 케너 with 아폴론 무사게테 콰르텟 6개월 차 기획자의 첫 내한 공연 기획기 김보경의 클래식 동맹 Vol. 6

모든 악기가 침잠하는 가운데 피아노가 서서히 도약하는 순간, 숨이 멎고 눈물이 맺혔다. 이어진 트릴은 한 줄기 햇살을 따라 웅크린 몸을 일으켜 전율하는 여린 꽃잎 같았다.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 그의 첫사랑 콘스탄차 글라드코프스카에 대한 연심을 담은 작품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연주를 들으며 그의 정신과 직접적으로 맞닿는다고 느낀 건 처음이었다. 객석에서 들은 소감이 아니다. 건조하고 뭉근한 사운드의 백스테이지에서 들은 소감이다.실내악으로 재현된 쇼팽의 초상지난 5월 23일부터 25일까지

모든 악기가 침잠하는 가운데 피아노가 서서히 도약하는 순간, 숨이 멎고 눈물이 맺혔다. 이어진 트릴은 한 줄기 햇살을 따라 웅크린 몸을 일으켜 전율하는 여린 꽃잎 같았다.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 그의 첫사랑 콘스탄차 글라드코프스카에 대한 연심을 담은 작품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연주를 들으며 그의 정신과 직접적으로 맞닿는다고 느낀 건 처음이었다. 객석에서 들은 소감이 아니다. 건조하고 뭉근한 사운드의 백스테이지에서 들은 소감이다.

케빈 케너 with 아폴론 무사게테 콰르텟(사진_뮤직앤아트컴퍼니)
케빈 케너 with 아폴론 무사게테 콰르텟(사진_뮤직앤아트컴퍼니)

실내악으로 재현된 쇼팽의 초상

지난 5월 23일부터 25일까지 <케빈 케너 with 아폴론 무사게테 콰르텟> 공연이 대전과 인천을 거쳐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렸다. 쇼팽의 정신을 누구보다 깊이 품은 피아니스트 케빈 케너와 폴란드의 숨겨진 보석 같은 아폴론 무사게테 콰르텟(Apollon Musagète Quartett, 이하 AMQ), 그리고 더블베이시스트 조용우가 함께, 쇼팽의 낭만과 조국애를 실내악이라는 친밀한 언어로 풀어낸 무대였다.

앞선 5월 22일에는 반포심산아트홀에서 피아니스트 김주영의 대담과 함께하는 케빈 케너의 독주회, <서리풀 마스터즈 시리즈 – 케빈 케너의 Grand Fantasy>가 열렸다. 이 공연들에서 나는, 음악이 멈춘 후 지나간 시간을 되짚는 음악 칼럼니스트에서, 음악이 청중과 만날 미래의 시간을 준비하는 공연 기획자로 참여했다. 칼럼과 에세이 사이를 부유하는 이 글은 입사 6개월 차 PM(프로젝트 매니저)이 된 초보 기획자의 시선으로, 무대를 완성하는 이들의 열정과 신념을 담아낸 기록이다.

케빈 케너 with 아폴론 무사게테 콰르텟(사진_뮤직앤아트컴퍼니)
케빈 케너 with 아폴론 무사게테 콰르텟(사진_뮤직앤아트컴퍼니)

한국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의 음악적 동반자로 잘 알려진 케빈 케너는 2025 쇼팽 국제 콩쿠르 심사위원이자, 세계적으로 명망 높은 쇼팽 스페셜리스트다. 함께 내한한 AMQ는 2008년 독일 ARD 국제 콩쿠르 우승 이후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해 온 폴란드 출신 실내악단으로, 이번 공연을 통해 처음으로 한국 관객과 만났다. 이들은 케빈 케너가 직접 편곡한 피아노 육중주 버전의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과 ‘안단테 스피아나토와 화려한 대 폴로네즈’를 선보였으며, AMQ는 종교적인 심오함을 담은 시벨리우스의 ‘안단테 페스티보’와 전쟁과 상실, 혼돈의 흔적을 담아낸 펜데레츠키의 ‘현악 사중주 3번’을 통해 역동적이고 진취적인 음악성을 선보였다. 그러나 이들의 프로젝트를 한국에 유치하는 일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케빈 케너 with 아폴론 무사게테 콰르텟(사진_뮤직앤아트컴퍼니)
케빈 케너 with 아폴론 무사게테 콰르텟(사진_뮤직앤아트컴퍼니)

믿음으로 시작된 대담한 여정

“저, 큰일 낸 것 같은데요. 어떡하죠? 이번 공연, 아폴론 무사게테 콰르텟과 함께하기로 했어요.”

퇴근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불이 켜진 사무실에서, 대표님의 난처함과 멋쩍음이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AMQ는 결성 2년 만에 세계적인 콩쿠르에서 우승한 뒤 약 20년간 활동을 이어온 굵직한 실내악단이지만, 한국에서 소개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유명 연주자나 오케스트라가 아니면 표를 팔기 어려운 한국 클래식 시장에서, 해외 실내악단의 내한 공연은 상업적으로 성공하기 어려운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더욱이 공연일까지 석 달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해외 아티스트 내한을 추진한다는 것은, 실무적으로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일까, 대표님의 목소리에는 조심스러운 미안함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불투명한 성공 가능성에도 음악을 향한 확신과 설렘을 감추지 못하시는 대표님의 얼굴을 보자 웃음이 났다. “좋은 소식인걸요?” 간단한 문장에 진심을 담아 화답한 나는, 그렇게 총괄 매니저로서 첫걸음을 내디뎠다.

케빈 케너 with 아폴론 무사게테 콰르텟(사진_뮤직앤아트컴퍼니)
케빈 케너 with 아폴론 무사게테 콰르텟(사진_뮤직앤아트컴퍼니)

초보 기획자의 기쁨과 슬픔

이제 우리만 잘하면 되었다. 한 시간 반 남짓의 공연을 위해서는 천오백 시간도 빠듯했다. 나는 보도자료를 만들고, 아티스트 프로필을 다듬고, 포스터 초안을 제안하고, 그러면서도 기획 전반을 챙기느라 진땀을 뺐다. 그럼에도 홍보 성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보도 기사는 많지 않았고, 게시된 홍보물이 실질적인 티켓 판매로 이어지는 경우도 드물었다. 예상 수입과 지출의 격차는 점점 더 뚜렷해졌다.

그러나 공연을 준비하는 마음은 오히려 단단해졌다. 수치는 기대에 못 미쳤지만, 신뢰와 응원이 이어졌다. 기자님들로부터 받은 “보도자료가 좋네요. 직접 쓰셨어요?”, “공연 기대됩니다” 같은 말은 담백하지만 초보 기획자를 춤추게 했다. 또한 한 단계를 매듭지을 때마다 얻은 내부의 지지와 격려는, 지쳐갈 무렵 다시 걸음을 내딛게 하는 큰 힘이 되었다. 무엇보다 작품과 청중이 만나는 순간이 있었기에 우리는 웃으며 나아갔다. 2020년 바르샤바에서 케빈 케너와 AMQ가 연주한 실내악 버전의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 실황을 두고 한 클래식 채널은 이렇게 소개했다. “좋아해, 아니 사랑해.” 직관적이고 풋풋한 이 표현은, 케빈 케너의 내밀한 터치와 AMQ의 신중한 호흡이 만들어낸 뉘앙스를 재치 있게 포착한 것이었다.

케빈 케너 with 아폴론 무사게테 콰르텟(사진_뮤직앤아트컴퍼니)
케빈 케너 with 아폴론 무사게테 콰르텟(사진_뮤직앤아트컴퍼니)

편곡 너머의 철학

케빈 케너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쇼팽 피아노 협주곡의 실내악 편곡은 소수의 연주자만 오케스트라 협연 기회를 얻는 클래식 산업에서 더 많은 연주자들에게 협주곡을 연주할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 10여 년간 국제 콩쿠르 심사위원으로, 또 교육자로 수많은 연주자를 배출한 케너의 철학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 뜻에 화답하듯 오는 6월 28일, 15세의 촉망받는 피아니스트 남예서가 케빈 케너의 편곡으로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자신의 리사이틀에서 연주한다. 뮤직앤아트컴퍼니가 살롱 콘서트를 통해 신진 피아니스트를 소개해온 이유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다. 연주자의 예술적 의도에 대한 깊은 공감은, 이번 프로젝트의 추진력을 지탱하는 든든한 기반이었다.

케빈 케너 with 아폴론 무사게테 콰르텟(사진_뮤직앤아트컴퍼니)
케빈 케너 with 아폴론 무사게테 콰르텟(사진_뮤직앤아트컴퍼니)

나아가 케너는, 협주곡을 실내악적으로 접근하면 성부 간 균형을 살리면서도 쇼팽의 독주곡에서 나타나는 미묘한 색채와 리듬의 변화를 더욱 섬세하게 구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피아니스트가 소수의 연주자들과 호흡하는 구조에서는 악보 위 프레이즈가 연주자들의 교감에 따라 기민하게 달라진다. 더욱이 19세기 폴란드에서는 대형 홀의 오케스트라 공연보다 살롱 공연이 일반적이었으며, 쇼팽 본인도 살롱 연주를 선호해 이 작품을 실내악으로 편곡하기도 했다. 케너의 편곡은 단순한 연주 형태의 변형이 아니라, 그 시대의 배경에 다가가 쇼팽의 정신을 재현하고자 하는 시도다.

케빈 케너 with 아폴론 무사게테 콰르텟(사진_뮤직앤아트컴퍼니)
케빈 케너 with 아폴론 무사게테 콰르텟(사진_뮤직앤아트컴퍼니)

하나의 소리에서 모두의 소리로

작곡가의 의도와 시대적 맥락을 되새기며 음악의 본질에 다가가려는 케너의 태도는 리허설에서도 드러났다. 무대를 살피던 중, 바이올린 연주자들에 의해 케너의 모습이 가려지는 것을 발견한 나는 그들에게 조심스럽게 간격 조정을 부탁했다. 관객 입장에서는 피아니스트가 잘 보이지 않으면 아쉬움이 남기 때문이다. 잠시 고민하던 케너는 요청을 수용하며 미소 지었다. “저는 제가 눈에 띄고 싶은 게 아닙니다. 모두의 소리가 어우러지는 게 중요해요.” 그의 신념은 무대 위 곡 선택에서도 드러났다. 앙코르에서 쇼팽의 가곡 ‘봄’(Wiosna, Op. 74 No. 2)을 선곡해 협연자와 반주자의 경계를 허물고, 오직 음악을 소개하는 데 집중했기 때문이다.

케빈 케너 with 아폴론 무사게테 콰르텟(사진_뮤직앤아트컴퍼니)
케빈 케너 with 아폴론 무사게테 콰르텟(사진_뮤직앤아트컴퍼니)

케빈 케너뿐 아니라 AMQ의 단독 무대 역시, 명성보다 음악을 앞세운 이번 기획의 취지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그들은 대조적인 색채의 시벨리우스와 펜데레츠키 작품에서 절제된 감성과 단단한 운궁으로 악상의 의도를 유연하게 구현해냈고, 현대음악에 강한 폴란드 연주자들의 저력을 입증해 보였다. 콰르텟의 요청으로 시벨리우스 무대에 합류한 더블베이시스트 조용우 역시 깊고 세밀한 연주로 함께한 연주자들의 찬사를 이끌어냈다.

고백하자면, 오랫동안 슈만의 작품을 사랑해 온 나는 쇼팽의 음악에 묘한 거리감을 느껴왔다. 양극단을 오가는 슈만의 작품에서는 한 사람이 겪은 고통과 열망, 감정적 동요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반면 쇼팽의 음악은, 내밀한 감정조차 무척 세련되고 정제되어, 내 안의 혼란과 불안을 감추고 외면해야 할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이들의 연주에서 만난 쇼팽은 고요 속에서도 요동치며, 인간적인 흔들림을 숨기지 않았다. 진심을 주고받는 이들이 들려준 친밀한 쇼팽은, 좌충우돌하면서도 이 공연을 첫사랑처럼 품었던 나의 마음을 다정히 어루만져 주었다.

케빈 케너 with 아폴론 무사게테 콰르텟(사진_뮤직앤아트컴퍼니)
케빈 케너 with 아폴론 무사게테 콰르텟(사진_뮤직앤아트컴퍼니)

무대 뒤 어둠의 찬란함

때로는 강렬하게 존재감을 드러내지만, 때로는 숨죽이며 침묵하는 이들의 음악은 관객과 기획자 모두를 ‘서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주었다. 특히 2017년부터 존경과 신뢰로 협업해온 이들의 음악적 유머와 교감은, 기획자 역시 이 공연의 동반자임을 실감하게 했다. 시계 소리, 자동차 소음 같은 일상의 소리마저 음악으로 품어내던 이들의 대화는, 무대 위에서 그러한 감각의 확장이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공연을 마친 후 작별 인사를 나누던 순간, 케빈 케너는 자신이 받은 꽃다발 중 하나를 내게 건네며 포옹했다. 그 순간, 실무의 미숙함과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결과조차 모두 의미 있는 여정의 일부가 되었다. 무엇보다 이번 공연은, 기획자의 애환을 슬픔이 아닌 기쁨으로 전환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 무대 뒤 어둠에 선 기획자는 누구보다 먼저 예술가의 신념에 공명하며, 무대의 빛을 한발 앞서 비추는 사람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객석의 어둠을 사랑했던 내가, 비로소 무대 뒤 어둠의 찬란함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케빈 케너 with 아폴론 무사게테 콰르텟(사진_뮤직앤아트컴퍼니)
케빈 케너 with 아폴론 무사게테 콰르텟(사진_뮤직앤아트컴퍼니)

‘첫’은 풋풋해서 뜨겁고, 찬란하다. 농익은 달큰함은 무수한 서투름이 쌓여 만들어진다. 공연 기획자의 길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쇼팽의 첫사랑을 닮은 첫 마음을 품은 나는, 이제 그 길을 좀 더 단단하게 걸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어두운 곳에 자리해 더 많은 빛을 비출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 자리를 택할 것이다. 관객이든, 기획자든, 칼럼니스트든, 내가 끝내 지키고 싶은 마음은 바로 그것이므로.

음악 칼럼니스트 김보경

눈부시게 아름다운 어느 5월에 슈만의 가곡을 듣고 클래식에 입문했다. 객석 한켠에서 음악이 마치 나만을 향하는 것처럼 진심으로 듣는다. '네 비평은 음악보다 어려워‘라는 어머니의 말씀에 충격을 받아, 깊이 있으되 쉽게 읽히는 리뷰를 지향한다. 숙명여대 대학원에서 예술경영을 공부했고,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를 거쳐, 현재 뮤직앤아트컴퍼니의 프로젝트 매니저이자 대외협력을 담당하고 있다.

케빈 케너 with 아폴론 무사게테 콰르텟(포스터_뮤직앤아트컴퍼니)
케빈 케너 with 아폴론 무사게테 콰르텟(포스터_뮤직앤아트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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