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E[사령] 시사매거진 (2026년 10월 23일자)

[세계의 섬 이야기] 기후위기의 ‘보이지 않는 손’, 향신료 제국을 무너뜨리다

미국 맨하탄과 맞바꾼 인도네시아의 룬(Run)섬 경제, 기후위기로 몰락 중

조율자에서 교란자로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시장 참여자들의 이기적 선택이 결과적으로 자원의 효율적 분배를 유도하고 사회 전체의 부를 증진시킨다는 신념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21세기, 기후위기의 ‘보이지 않는 손’은 그 반대 경로를 걷고 있다. 자율에 맡겨진 시장이 초래한 탄소 배출, 생태계 파괴, 불평등의 누적은 이 손을 더 이상 조정자가 아닌 교란자, 파괴자로 변모시켰다. 이 손은 더 이상 질서를 창출하지 않고 무질서를 드러내며, 과거의 축적이 어떤 희생 위에 쌓였는지 폭로한다. 지금 인류는 근대 경제질서의 근간을 다시

이미지 제작: ChatGPT/DALL·E(OpenAI)
이미지 제작: ChatGPT/DALL·E(OpenAI)

조율자에서 교란자로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시장 참여자들의 이기적 선택이 결과적으로 자원의 효율적 분배를 유도하고 사회 전체의 부를 증진시킨다는 신념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21세기, 기후위기의 ‘보이지 않는 손’은 그 반대 경로를 걷고 있다. 자율에 맡겨진 시장이 초래한 탄소 배출, 생태계 파괴, 불평등의 누적은 이 손을 더 이상 조정자가 아닌 교란자, 파괴자로 변모시켰다. 이 손은 더 이상 질서를 창출하지 않고 무질서를 드러내며, 과거의 축적이 어떤 희생 위에 쌓였는지 폭로한다. 지금 인류는 근대 경제질서의 근간을 다시 묻고 있다.
이 손의 검은 그림자가 인도네시아를 덥치고 있다. 한때 세계 향신료 무역의 중심이자 ‘향신료 제국’으로 불렸던 이곳은, 기후위기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정향과 육두구의 본고장 말루쿠 제도, 특히 룬(Run) 섬에서 벌어진 제국 간 쟁탈전은, 오늘날 고온, 폭우, 불규칙한 강수라는 새로운 무기로 재현되고 있다. 이번에는 침략자가 아니라 기후이고, 피해자는 더 이상 식민민족이 아니라 농민과 생태계다.

인도네시아 반다해에 위치한 룬섬은 11개의 울창한 섬으로 이루어진 반다 제도(일명 '향신료 제도') 중 하나이다. (사진_NNehring/Getty Images)
인도네시아 반다해에 위치한 룬섬은 11개의 울창한 섬으로 이루어진 반다 제도(일명 '향신료 제도') 중 하나이다. (사진_NNehring/Getty Images)

미국 맨하탄과 맞바꾼 육두구 섬

17세기 초, 인도네시아 말루쿠 제도의 작은 섬 룬(Run)은 세계 유일의 육두구 산지였다. 육두구는 유럽에서 식품 보존, 약재, 흑사병 치료제로 쓰이며 금과 맞먹는 가치를 지녔다. 이 ‘검은 금’을 차지하기 위한 제국 간 쟁탈전이 벌어졌다. 1616년, 네이선 커소프(Nathaniel Courthope, 1585–1620)는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장교로서 룬 섬에 상륙하여 현지 지도자들과 동맹을 맺고 섬을 영국의 보호령으로 선언했다. 그는 단 39명의 병사와 함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의 포위 공격을 4년 이상 버텼으며, 끝내 탈출을 시도하다가 전사했다. 이 저항은 훗날 1667년 브레다 조약에서 영국이 룬 섬을 포기하는 대신, 북미 식민지 맨해튼(뉴암스테르담, 현재의 뉴욕)을 얻는 역사적 교환의 배경이 되었다.
네덜란드는 이후 육두구 무역의 완전한 독점을 꾀하며, 영국의 재침범과 경쟁자 유입을 차단하기 위해 룬 섬의 모든 육두구 나무를 뿌리째 제거하는 청야 작전을 단행했다. 이는 군사적 승리 이상의, 세계 향신료 시장 지배를 위한 경제적·전략적 조치였다. 룬 섬은 그렇게 세계사 한 페이지의 중심에 놓였고, 육두구 하나가 바꾼 지정학의 상징으로 남았다. 

룬 섬은 한때 세계에서 가장 귀한 향신료인 육두구의 주요 산지로 알려졌으며, 오늘날까지도 현지 주민들에 의해 재배가 이어지고 있다. (사진_Jefri Tarigan)
룬 섬은 한때 세계에서 가장 귀한 향신료인 육두구의 주요 산지로 알려졌으며, 오늘날까지도 현지 주민들에 의해 재배가 이어지고 있다. (사진_Jefri Tarigan)
1623년 제작된 룬섬 지도. 1790년경 ‘Pulau Run’이라는 이름으로 표기되어 있다. (출처_구글 역사 지도 아카이브)
1623년 제작된 룬섬 지도. 1790년경 ‘Pulau Run’이라는 이름으로 표기되어 있다. (출처_구글 역사 지도 아카이브)

제국의 흔적에서 세계 식탁으로

인도네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향신료 재배지 가운데 하나로, 말루쿠 제도, 자바, 술라웨시 등에서 정향, 육두구, 계피, 바닐라 등이 전통적으로 재배되며 동서양 무역의 핵심 축을 형성해왔다. 네덜란드 식민지 시기에도 통제와 감시 속에서 주민들의 은밀한 재배가 이어졌고, 향신료는 생계 기반이자 저항의 방식으로 기능했다.
오늘날 인도네시아는 정향과 계피 생산 세계 1위, 육두구·바닐라 생산 세계 2위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정향은 인도네시아 고유의 크레텍 담배 산업에 필수적으로 사용되며, 내수와 수출 양면에서 높은 경제적 비중을 차지한다. 2000년대 이후 생산량은 증가세를 보여왔으나, 최근에는 생산성과 품질 모두에서 뚜렷한 저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인도네시아 주요 향신료 생산 세계 순위 및 생산량(2022년)

품목

세계 순위

생산량 (톤)

세계 점유율 (%)

주요 용도

정향 (Clove)

1위

133,955

73.0%

크레텍 담배, 식품, 약재

계피 (Cinnamon)

1위

약 83,700

-

조미료, 제과, 향료

육두구 (Nutmeg)

2위

40,565

29.2%

향신료, 약재, 아로마오일

바닐라 (Vanilla)

2위

약 2,200

-

제과, 향료, 화장품

출처: Tridge, KOTRA 외

더 이상 네델란드는 없지만...사라지는 향신료

향신료 산업의 위기 원인으로 기후변화가 핵심적으로 지목되고 있다. 정향과 육두구는 일정한 온도와 습도를 요구하는 민감한 작물로, 극단적 폭우, 고온, 불규칙한 강수는 생육과 수확, 저장 전 과정에 악영향을 미친다. 2023년 기준, 정향 생산량은 2010년 대비 25% 감소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40% 이상 수확량이 급감하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건조 기간이 길어지며 곰팡이 발생, 품질 저하로 판매가 어려워지는 경우가 빈번하고, 농민들은 “수확이 아니라 손실의 계절”이라고 토로한다. 생산은 급감했지만 피해 보전은 없고, 기후 리스크는 고스란히 농민의 생계로 전가되고 있다.

완전히 익은 육두구 열매 (사진출처_ Jefri Tarigan)
완전히 익은 육두구 열매 (사진출처_ Jefri Tarigan)

향신료 산업의 구조적 위기

기후불안정은 가격 변동성까지 심화시키고 있다. 수확기에는 정향 가격이 1kg당 150,000루피아에서 80,000루피아까지 폭락하고, 공급 부족 시에는 다시 115,000루피아까지 치솟는다. 이러한 가격 롤러코스터는 농민의 계획적 경작을 방해하고, 수익의 예측 가능성을 무너뜨린다.
결국 젊은 세대는 향신료 농업을 기피하게 되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작물 전환과 산업 이탈이 시작되었다. 향신료 산업의 지속가능성에 경고등이 켜진 것이다.
 

전환 없는 전통은 없다

현재 인도네시아 향신료 산업은 근본적인 전환의 기로에 서 있다. 농민 생계를 안정시키고 산업의 미래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기후 적응형 품종 개발 ▲스마트 농업 도입 ▲저장·가공 기술 혁신 ▲지속가능성 인증 제도 확립 등이 필수적이다. 일부 지역에서는 임업-농업 결합(agroforestry), 기후 스마트 농업, 공정무역 기반 협동조합 등의 실험이 전개되고 있다.
인도네시아 정부도 민관협력 플랫폼 ‘SSI-I(Sustainable Spices Initiative–Indonesia)’를 통해 향신료 산업의 회복과 재건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SSI-I는 정부, 농민단체, 글로벌 식품기업, 국제기구 등이 함께 참여하는 다자 플랫폼으로, 지속가능한 향신료 공급망 구축, 품질 향상, 환경 보호, 농민 생계 개선을 통합적으로 추진한다. 기술 교육, 기후 스마트 농업 도입, 재해보험 확대, 농민 조직화 등의 정책 지원이 확대되는 한편, 향후에는 주요 수입국과의 공급망 협력, 기후기금 활용, 기후외교 강화가 병행되어야 한다는 요구도 거세지고 있다.

SSI(Sustainable Spices Initiative)는 향신료 산업의 지속가능성을 촉진하기 위해 설립된 국제 민관협력 플랫폼으로, 환경·사회·인권 분야의 핵심 이슈를 해결하고 지속가능한 공급망을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SSI는 탄소 배출, 수자원, 생물다양성 등의 환경 발자국을 줄이기 위한 ‘환경 프로그램’, 아동노동 방지와 농가 생계 보장을 위한 ‘사회 프로그램’, 공급망 투명성과 기업 책임을 강화하는 ‘듀 딜리전스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SSI는 인도네시아, 인도 등 생산국에서 농민·정부·기업·NGO가 함께 참여하
SSI(Sustainable Spices Initiative)는 향신료 산업의 지속가능성을 촉진하기 위해 설립된 국제 민관협력 플랫폼으로, 환경·사회·인권 분야의 핵심 이슈를 해결하고 지속가능한 공급망을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SSI는 탄소 배출, 수자원, 생물다양성 등의 환경 발자국을 줄이기 위한 ‘환경 프로그램’, 아동노동 방지와 농가 생계 보장을 위한 ‘사회 프로그램’, 공급망 투명성과 기업 책임을 강화하는 ‘듀 딜리전스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SSI는 인도네시아, 인도 등 생산국에서 농민·정부·기업·NGO가 함께 참여하는 국가 플랫폼을 운영하며, 글로벌 식품 산업의 지속가능 전환을 공동으로 추구하고 있다. (출처_https://sustainablespices.id)

기후위기의 보이지 않는 손, 생존을 움직이다

과거의 ‘보이지 않는 손’은 이윤을 정당화하며 세계 경제의 질서를 조율하는 조정자였다. 그러나 지금 기후위기의 손은 그 반대다. 이 손은 시장의 실패를 드러내고, 우리가 정당하다고 믿었던 성장과 부의 논리를 되묻는다.
인도네시아 향신료 산업은 단지 수출입 통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지역 주민의 생존, 문화, 공동체의 지속성과 맞닿아 있는 문제다. 룬 섬에서 시작된 향신료 전쟁이 제국의 야망을 반영한 ‘부의 손’이었다면, 지금 우리가 마주한 기후위기의 손은 ‘생존의 손’이다. 정복이 아닌 적응과 재구성이 필요한 시대, 이 손의 방향을 외면한다면, 우리가 잃게 될 것은 단순한 농업이 아니라 문명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글/ 박재아는 태평양기후위기대응협의회 사무처장, 태평양학회 이사, 팔라우 대통령 경제·관광 직속 자문, 조선대학교 대외협력 외래교수로 활동 중이며, 이화여대 사회학과 졸업 후 서울대 국제대학원 국제지역학 석사, 환경대학원 환경계확학 박사과정에 있다. 피지·사모아 관광청 한국지사장, 솔로몬제도 관광청 특별자문, 태평양 관광기구(SPTO)·인도네시아 관광창조경제부 한국지사장을 역임했으며, 섬 지역의 문화·생태 다양성을 기반으로 지속가능한 발전과 관광·문화 교류 활성화를 연구하고 있다.
글/ 박재아는 태평양기후위기대응협의회 사무처장, 태평양학회 이사, 팔라우 대통령 경제·관광 직속 자문, 조선대학교 대외협력 외래교수로 활동 중이며, 이화여대 사회학과 졸업 후 서울대 국제대학원 국제지역학 석사, 환경대학원 환경계확학 박사과정에 있다. 피지·사모아 관광청 한국지사장, 솔로몬제도 관광청 특별자문, 태평양 관광기구(SPTO)·인도네시아 관광창조경제부 한국지사장을 역임했으며, 섬 지역의 문화·생태 다양성을 기반으로 지속가능한 발전과 관광·문화 교류 활성화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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