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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근의 역사문화탐방 68] 평창군 봉평, ‘이효석의 향토색 짙은 소설 무대 되다’

메밀꽃 필 무렵 배경 속 봉평

[시사매거진 오경근 칼럼니스트]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뭇이 흘리고 있다.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한국 단편 문학의 수작으로 손꼽히는 가산 이효석의 중 한 구절이다.일제강점기 때 작가이자 대학교수인 이효석은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에서 태어나 약 13세 무렵까지 이곳에서 성장했다. 문학작품 창작 초기에는

이효석(사진_안나겸 기자)
이효석(사진_안나겸 기자)

[시사매거진 오경근 칼럼니스트]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뭇이 흘리고 있다.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한국 단편 문학의 수작으로 손꼽히는 가산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중 한 구절이다.

일제강점기 때 작가이자 대학교수인 이효석은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에서 태어나 약 13세 무렵까지 이곳에서 성장했다. 문학작품 창작 초기에는 동반자작가로 불리며 사회주의적 경향의 작품을 쓰다가 후기에는 자기 고향을 배경으로 향토색 짙은 순수문학 작품을 다수 발표했다.

그는 모던 보이로서 근대 문화를 기반으로 한 작품을 창작하고, 성(性) 본능과 개방을 추구한 작품 경향으로 주목을 끌기도 했다. 그러나 단편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영향력이 매우 강하게 인지되어 가산 이효석은 향토적인 작품을 쓴 작가라는 이미지로 굳어진다. 그러한 그의 문체는 세련된 언어, 풍부한 어휘, 시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스타일로 인해 시적인 정서의 산문문학 예술성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효석 생가
이효석 생가(사진_안나겸 기자)
이효석 생가
이효석 생가(사진_안나겸 기자)
이효석 생가(사진_안나겸 기자)
이효석 생가(사진_안나겸 기자)

‘연인’ 혹은 ‘사랑하는 마음’을 상징하는 메밀꽃은 불볕더위를 식히는 차고 냉한 성질의 열매로 인해 한여름 국민에게 가장 큰 사랑을 받는 식물이다. 허준의 <동의보감>에는 비위장의 습기와 열기를 없애주며 소화가 잘되게 하는 효능 때문에 비만 예방과 피부 미용에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소화 기능이 약하고 찬 음식을 먹으면 배가 아픈 사람들에게 메밀로 만든 국수나 냉면은 특효약이다.

이러한 까닭에 희고 붉은 메밀꽃을 보기 위해 강원도 평창군 봉평으로 떠나는 여행객이 늘고 있다. 하얀 메밀꽃이 소금처럼 빛나는 풍광을 보기 위해 서울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강변역에 위치한 동서울터미널에서 장평버스정류장까지 가는 시외버스를 타면 된다. 대략 4시간 거리다. 자가 운전으로는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광주원주고속도로와 영동고속도로를 갈아타면 된다. 대략 2시간 반 거리다.

이효석 생가와 이효석문학관은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이효석길 33-13에 위치한다. 그가 1907년에 태어나 13세 무렵까지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이다. 이후 현재 거주하는 홍씨일가에 생가를 팔고 이사한 후 양옥집으로 개보수되어 있다. 하지만 이효석 선생의 생가는 초가집이었다가 새마을운동 때 함석으로 개축되었고 2004년도 다시 지붕 누수로 인해 기와로 지붕을 단장했다.

또한 이효석 선생 생가터를 중심으로 단편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소설적 무대 배경이 자리해 찾는 이의 발걸음을 재촉한다. 성서방네 처녀와 허생원이 사랑을 나누던 물레방앗간, 동이와 허생원이 다투던 충주집, 허생원이 숨을 헐떡거리며 넘던 노루목 고개, 물에 빠진 허생원을 동이가 업고 건너며 혈육의 정을 느끼던 여울목, 허생원과 같은 장돌뱅이들이 난전을 펼치던 봉평장, 대화장, 진부장, 평창장 등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리고 옥수수 잎새와 콩 포기가 달빛에 푸르게 젖은 길과 소금을 뿌린 듯한 메밀꽃 피는 풍광도 옛 모습 그대로다. 여기에 또 다른 작품 <산협> <개살구>의 배경이 된 남안동 마을, 흥정리, 양구두미재, 오대산 월정사, 창말(창동리), 진부시내와 속사고개도 있어 가산 이효석 선생의 서정적이고 향토적인 정서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작품 산촌 풍격의 향토색(사진_안나겸 기자)
작품 산촌 풍격의 향토색(사진_안나겸 기자)

가산 이효석의 생애 & 평창군 봉평면의 향토적 서정

가산 이효석 선생은 1907년 2월 23일,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하진부리 196번지에서 아버지 이시후(李始厚)와 어머니 평산신씨 사이에서 1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본래 함경도 함흥부 출신으로,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1905년 12월에는 강원도 회양군 회양공립소학교에서 교원으로 재직했다.

이후 사직하고 난 1911년에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자서전을 편역했고, 1912년에는 평창군에 사숙을 세워 한문을 가르쳤다. 1919년부터 봉평면장, 진부면장을 역임했으며, 그 사이 평창금융조합 감사와 대화(大和)금융조합 감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그러한 부친을 따라 이효석 선생은 4살 때부터 경기도 경성부로 갔고, 1912년 다시 평창군으로 돌아와 아버지가 세운 사숙에서 한학을 수학했으며, 1914년 4월 평창군청 소재지에 있던 평창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생모를 여의고 계모와 사이가 좋지 않던 이효석은 평창군 읍내 고명균의 집에서 하숙 생활을 시작한다. 본가와 100리가 넘는 거리다. 훗날 하숙집과 본가를 오간 이곳에서 그의 대표작인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을 구상하게 되고, 물놀이와 고기잡이 꽃놀이를 즐긴 경험, 그리고 오대산에서 내려오는 목기류 행상, 심마니의 모습, 머루와 다래 같은 산과, 꿀 뜨기, 농산물 품평회 등을 본 기억을 떠올리며 작품 속에 반영하게 된다.

가산 이효석 문학비(사진_안나겸 기자)
가산 이효석 문학비(사진_안나겸 기자)

1920년 3월, 평창공립보통학교(6년제)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그해 4월, 당시 조선 최고의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現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해 평생 절친한 벗으로 지낸 유진오 선생을 만나게 된다. 이후 이효석 선생은 1925년 수석 입학한 유진오 선생을 따라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한다.

그곳에서 아일랜드 문예부흥을 주도한 예이츠의 시를 접하게 된 이효석 선생은 1927년 3월 예과를 수료하고, 이어 4월에는 법문학부로 진학한 이효석은 문학과로 옮겨 <도시와 유령>이란 단편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하게 된다.

1930년 3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한 이효석은 이듬해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성동본인 나남여자고등보통학교 출신의 이경원과 결혼해 경기도 경성부 수송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 46번지에서 신혼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1929년 촉발된 대공황과 뒤이어 닥친 불황의 여파 속에 작품 활동을 전개하던 이효석 선생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며 1932년 초 조선총독부 경무국 산하 도서과 검열계 서기로 취직했으나 양심의 가책과 세간의 비난으로 인해 보름 만에 사직한다.

이효석 생가터 비문(사진_안나겸 기자)
이효석 생가터 비문(사진_안나겸 기자)

사회주의 계열에서 순수문학으로 전향한 이효석 문학세계

당시 화려한 도시 경성부의 비참한 도시 빈민의 모습을 그린 대학 시절의 등단작 <도시와 유령>, 소련을 그리며 가고자 하는 <노령근해>, <상륙>, <북국사신> 등 사회주의 계열 성향의 작품을 쓰던 이효석은 동반자작가로 활동하다가 직업을 바꾸며 문학세계를 또다시 일신하게 된다.

1932년, 처가가 있는 함경북도 경성군 경성공립농업학교에 영어 교사로 취직한 이효석 선생은 경제적으로 안정되기 시작하자 초기의 사회주의 경향을 탈피하고 향토적, 이국적, 성적 모티프가 풍부한 순수문학을 추구하게 된다.

<오리온과 능금>(1932)을 기점으로 하여 <돈(豚)>, <수탉>(1933) 등을 발표하며 문학의 전환을 이룬 그는 1933년 8월, 경성제대 법문학부 영문학전공 후배인 조용만, 최재서 등과 함께 순수문학단체를 표방한 ‘구인회’를 창립한다.

1934년 다시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한 이효석 선생은 평안남도 평양부 창전리 48번지(現 평양시 중구역 만수동)로 이주하게 된다. 이 무렵 그의 단편 소설 걸작 <메밀꽃 필 무렵>(1936)을 발표하는 등 전성기를 맞이하며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발표한다.

이효석문학관 전경(사진_안나겸 기자)
이효석문학관 전경(사진_안나겸 기자)

1938년 숭실전문학교가 신사참배 문제로 폐교되고 난 후 숭전의 시설을 활용해 세워진 대동공업전문학교(現 김책공업종합대학) 교수를 맡는다. 그러면서 그는 “조선총독부에 근무하면서 호강을 부리던 놈이 객기로 그만둔 것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으나, 먹고살고자 다시 왜놈에게 아첨을 하는 글을 쓰는 건 두고두고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라고 자책한다.

1939년과 1940년 두 차례 만주국 빈강성(濱江省) 하얼빈시를 여행하고 이 유럽풍 도시에서 <벽공무한(碧空無限)> <하얼빈(哈爾濱)> 등의 작품을 집필한다. 이듬해인 1941년 아내와 2남 2녀 중 차남을 잃은 그는 충격으로 뇌막염에 걸려 향년 35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의 사후 시신은 부친 이시후에 의해 모친과 함께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하진부리 곧은골에 매장된다. 이어 1972년, 영동고속도로의 건설공사로 인해 평창군 용평면 장평리의 고속도로변으로 이전되었다가, 1998년 9월에 영동고속도로의 확장 공사로 인해 경기도 파주시 동화경모공원으로 이장되었다.

2021년 11월 11일, 유족 측이 ‘가산 이효석 선생 묘지 이장 추진위원회’와 협의하면서 강원도 평창군 봉평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동월 11월 19일 이효석 부부의 유해를 ‘평창 이효석문화관 달빛문화언덕’으로 이장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다.

이효석문학관 본관(사진_안나겸 기자)
이효석문학관 본관(사진_안나겸 기자)

이효석 문학의 의의, ‘서정성과 향토성 짙은 최고의 소설’

1982년 10월, 문화의 날을 맞아 이효석 선생에게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저작 활동은 100편에 가까운 단편에 집중되어 있으나, 경성제일고보 재학 중에 발표한 시를 비롯하여 장편소설, 수필, 평론, 희곡·시나리오, 번역 등 여러 방면에서 작품을 발표하였다.

단편집 기준으로 그의 대표작은 <노령근해(露領近海)> <해바라기> <이효석 단편집> 등이 있다. 또한 장편으로는 <화분(花粉)>(1939년 작) <벽공무한(碧空無限)>(1941년 작)이 있고, 단편 소설로는 <메밀꽃 필 무렵>과 <황제>가 있다. 그 외에 제목 없는 미발표 단편 소설이 2011년 번역 공개되기도 하였다.

이효석 선생의 수필은 110편에 달하는데 중·고교 교과서에 실린 1938년 작품 <낙엽을 태우면서>가 유명하다. 무엇보다 그는 1달에 7~8편의 영화를 감상한 영화광이라 직접 희곡과 시나리오를 창작하기도 했다.

1930년에는 김유영(金幽影), 서광제(徐光齊), 안석영(安夕影) 등과 함께 ‘조선씨나리오·라이터협회’를 결성하고, 연작 시나리오 <화륜(火輪)>을 발표하였으며, 이로써 침체의 늪에 빠진 당시 조선 영화계에 활력을 주기도 했다. 그가 창작한 희곡·시나리오는 모두 7편으로 그중 <화륜>과 <애련송(愛戀頌)>이 영화로 상영되었다.

이효석문학관 별관 입구(사진_안나겸 기자)
이효석문학관 별관 입구(사진_안나겸 기자)

이효석 선생의 문학은 김동리에 의해 “소설을 배반한 소설가”라는 평가로 가름 되었다. 비판이 아니라 거의 시인이 소설을 쓰듯 분위기를 잡는 데 능하다는 반어이다. 그의 작품 중 <메밀꽃 필 무렵>에 가장 잘 나타나는 문학성이다.

그의 가족 중 살아남은 1남 2녀는 이효석 선생 사후 조부 이시후를 따라 강원도로, 장녀는 평양 외삼촌 집으로 흩어져 살다가 1949년 월남 후 다시 모여 살게 된다. 특히 장녀 나미(奈美, 1932~2015)는 월남 후 동생들을 키우기 위해 결혼한다. 그리고 50세 되던 1982년에 전 재산을 털어 ‘이효석기념사업회’와 ‘이효석문화연구회’를 세워 부친의 문학세계와 존재를 재조명시키는 데 공헌한다. 이어 1983년에는 ‘창미사’도 세워 1970년대 이래 국내외에 흩어진 부친의 작품들을 모은 걸로 전집을 낸다. 하지만 1992년부터 부친의 저작권 보호기간이 만료됨에 따라 인세조차 받지 못해 2006년에는 운영난 때문에 기념사업회를 닫고, 허리 디스크 치료를 받다가 2015년 8월 폐렴으로 숨을 거둔다.

장남 우현(禹鉉)은 경기고등학교 졸업 후 부친의 작품을 전집으로 내서 번 인세 400달러로 미국 위스콘신대학교로 유학 간 뒤 미국에서 살다가 1988년에 귀국했다. 이후 2000년부터 이효석문학상을 후원하는 한편 2004년에는 <메밀꽃 필 무렵>을 영어로 번역했고, 2012년 ‘이효석문화재단’을 세워 상임이사를 지냈다.

한국의 토속적 색채를 강하게 그린 <메밀꽃 필 무렵>과는 달리 빵과 버터, 커피 등을 즐겨 먹고, 쇼팽과 모차르트의 피아노곡 연주를 즐겼으며, 벽돌집에서 서양 영화 감상 등을 즐겼다는 이효석 선생은 한국 근대 신문물과 전통문화 사이에서 미래 세계를 무한히 동경한 문학인으로 기려지고 있다.

이효석문학관 내 잔디밭(사진_안나겸 기자)
이효석문학관 내 잔디밭(사진_안나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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