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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맹과 시흥시 연성동, 조선 최초의 연꽃 재배지

조선 문신이자 농학자 강희맹, 애민 정신으로 피운 꽃

[시사매거진 오경근 칼럼니스트] 경기도 시흥시 연성동(蓮城洞)은 부천시와 안산시 사이에 위치하는 대한민국 주요 공업도시의 일반적인 행정동 중 하나다. 특히 연성IC는 동서를 가로지르는 330번 국도를 달리다 보면 교통의 요지로 떠오르고 있는 광명 인근 목감IC에서 인천 앞바다에 이르는 송도IC까지 고속도로를 잇는 중간지점에 위치한다.이곳 연성동의 이름은 조선 초기 세종 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종의 정비인 소헌왕후 심씨 가문에는 고려시대 말기와 조선 초기 문신인 부친 심온(深穩, 1375~1419)이 있다. 그의 첫째 사위는 세종대

[시사매거진 오경근 칼럼니스트] 경기도 시흥시 연성동(蓮城洞)은 부천시와 안산시 사이에 위치하는 대한민국 주요 공업도시의 일반적인 행정동 중 하나다. 특히 연성IC는 동서를 가로지르는 330번 국도를 달리다 보면 교통의 요지로 떠오르고 있는 광명 인근 목감IC에서 인천 앞바다에 이르는 송도IC까지 고속도로를 잇는 중간지점에 위치한다.

(사진_안나겸 기자)
(사진_안나겸 기자)

이곳 연성동의 이름은 조선 초기 세종 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종의 정비인 소헌왕후 심씨 가문에는 고려시대 말기와 조선 초기 문신인 부친 심온(深穩, 1375~1419)이 있다. 그의 첫째 사위는 세종대왕(世宗大王)이고, 둘째 사위는 강석덕(姜碩德)이고, 셋째 사위는 노물재(盧物載)다. 또한 심온의 손자이며 강석덕의 아들로는 강희안(姜希顏)과 강희맹(姜希孟)이 있고, 노물재의 아들로는 노사신(盧思愼)이 있다. 이들은 모두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의 이종 조카로 조선 초기 조정 고위 관료는 물로 뛰어난 문신이자 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이들이다.

그중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은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자 화가이고, 문신이자 농학자로서 예조판서, 형조판서, 병조판서, 이조판서, 우찬성, 좌찬성을 지낸 인물이다. 그런 그가 1463년(세조9)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선물로 받아온 연꽃 씨를 관곡지(官谷池, 하중동 208번지 소재)에 처음 재배하여 널리 퍼트렸다. 이후 이종지간인 세조가 ‘안산군’의 이름을 ‘연성군(連城郡)’이라 개칭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조선 성종 때 좌찬성을 지낸 강희맹이 세조9년인 1463년에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곳 전당에서 연꽃 씨를 가지고 와서 이 마을에 처음 심었다 하여 ‘연꽃하(蕸)’ 자와 ‘못지(池)’ 자를 따서 ‘하지골’이라 부르게 되었다.(사진_안나겸 기자)
조선 성종 때 좌찬성을 지낸 강희맹이 세조9년인 1463년에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곳 전당에서 연꽃 씨를 가지고 와서 이 마을에 처음 심었다 하여 ‘연꽃하(蕸)’ 자와 ‘못지(池)’ 자를 따서 ‘하지골’이라 부르게 되었다.(사진_안나겸 기자)

연성동 중심부인 ‘요꼴마을’과 ‘하지골마을’의 유래

조선 초기에는 안산군 초산면 중직리라 칭했던 마을로 주변의 풍수를 고려해 용혈(龍穴)에 해당한다고 하여 ‘용골(龍骨)’로 불렸다. 이후 조선 성종 때 좌찬성을 지낸 강희맹이 세조9년인 1463년에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곳 전당에서 연꽃 씨를 가지고 와서 이 마을에 처음 심었다 하여 ‘연꽃하(蕸)’ 자와 ‘못지(池)’ 자를 따서 ‘하지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후 조선 정조 13년인 1789년경 인구 사정을 조사한 <호구총수>에 ‘하직곶리(하지골)’에서 ‘중직상리’로 표기해 기록했고, 1911년경 간행된 <조선지지자료>에는 ‘중직리(요꼴)’로 기록했다.

그리고 다시 1914년 3월 일제강점기 때 옛 안산군의 군내면과 인화면, 초산면을 합쳐 시흥군 수암면에 편입해 순우리말 지명 대신 한자 표기인 ‘시흥군 수암면 하상리’로 기록했다. 또한 1989년 1월 1일에는 군(郡)이 폐지되고 시(市)로 승격됨에 따라 법정 행정동으로 경기도 시흥시 하상동으로 부르고 있다.

조선 정조 13년인 1789년경 인구 사정을 조사한 '호구총수'에 ‘하직곶리(하지골)’에서 ‘중직상리’로 표기해 기록했고, 1911년경 간행된 '조선지지자료'에는 ‘중직리(요꼴)’로 기록했다.(사진_안나겸 기자)
조선 정조 13년인 1789년경 인구 사정을 조사한 '호구총수'에 ‘하직곶리(하지골)’에서 ‘중직상리’로 표기해 기록했고, 1911년경 간행된 '조선지지자료'에는 ‘중직리(요꼴)’로 기록했다.(사진_안나겸 기자)

강희맹의 연꽃 재배지 ‘관곡지’

1463년(세조9)에 중추원부사로 진헌부사가 되어 중국 남경을 다녀온 강희맹은 연꽃씨를 채취하여 가지고 돌아와서 시흥시 하중동 208번지에 처음으로 시험 재배를 하였다. 희고 탐스러운 연꽃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연잎과 연밥의 효용과 실용성이 입증되자 이를 널리 퍼트려 연꽃 단지를 조성했다.

이러한 인연으로 1466년(세조12)에는 ‘안산(安山)’의 읍호를 ‘연성(蓮城)’으로 개칭해 부르도록 했다. 무엇보다 조선 후기에는 하중동 주민 중에 6명의 연지기를 두고 이들에게 각종 노역, 부역, 포세, 양곡세를 면제해 주고 오직 연못만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강희맹은 그의 사위인 사헌부감찰 권만형(權曼衡)의 집 옆에 <관곡지>를 조성한 관계로 그의 딸에게 유산으로 물려줘 대대로 권만형의 후손의 소유가 되어 현재까지도 관리되고 있다.

특히 1797년(정조21)에는 정조대왕이 수원 현융원(顯隆園)으로 행차하는 길에 안산시 수암동 소재 안산관아에 유숙하게 되었다. 이때 관내의 선비를 대상으로 임금이 친히 ‘어제(御題)’라는 과거를 실시해 그 시제(詩題)로 ‘연성(蓮城)’에 관해 시문을 짓도록 했다. 이러한 사실은 정조대왕까지도 관곡지에 대해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관곡지에서 시험 조성한 연못의 규모는 가로 23m, 세로 18.5m다. 현재까지 관내의 연성초등학교와 연성동 그리고 시흥시의 향토문화축제인 ‘연성문화제(蓮城文化祭)’는 모두 이 연못에서 연유하며 관곡지는 경기도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돼 있다.


조선 문신이자 농학자인 강희맹 행장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농학자인 강희맹(姜希孟)은 본관이 진주이고 자는 경순, 호는 사숙재(私淑齋)와 운송거사(雲松居士)와 국오(菊塢)와 만송강(萬松岡)이다. 인품이 겸손하고 치밀하여 맡은 일을 잘 처리했으며 또 경사와 전고에 통달한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로 명성이 자자하다.

그런 강희맹은 18세에 사미시에 합격하고 1447년(세종29)에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가 되었다. 1450년 예조좌랑과 돈녕판관을 엮임하고, 1453년에는 예좌정랑이 되었다. 그 뒤 예조참의, 이조참의를 거쳐 1463년 39세 때 중추원부사로서 진헌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엔 부윤으로서 어제구현재시에 합격하고, 1466년 발영시 등준시에 급제하였으며 집현전, 직제학 예조판서 형조판서를 역임하고 1471년(성종2년)에는 좌리공신에 책봉뵈었다. 다시 49세 때인 1473년에는 병조판서가 되었고, 이어 판중추부사, 이조판서, 판동녕부사, 우찬성을 역임한 수 58세 때인 1482년에는 좌찬성에 이르렀으며 진신부원군에 봉하였다. 이어 영의정으로 증직된 그의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조부 운정 강회백(姜淮伯)과 아버지 강석덕(姜碩德), 형 강희안(姜希顏)의 시집은 물론 <양화소록(養花小錄)> 외 <진산세고(晉山世藁)>를 편찬하였는데 특히 이 진산세고는 1998년 12월 18일 국가보물 제1290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세조 때는 <신찬국조보감> <경국대전> <사서삼경> 언해 등의 편찬사업에 참여했으며, 성종 때는 <동문선(東文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등 편찬에 참여하였다.

또한 소나무와 대나무 및 산수화를 특히 잘 그렸는데 현재 일본의 오구라문화재단(소창문화재단)에 소장되어 있는 <독조도>는 유명한 작품이다.

글씨로는 <원각사비(圓覺寺碑)>의 액전과 합천 <홍류동체필암각자> 등을 썼으며 저서로는 <사숙재집(私淑齋集)>과 우리나라 최초의 농서인 <금양잡록(衿陽雜錄)> <촌담해이(村談解頤)> <사시찬요초(四時纂要秒)> 등이 전하고 있다.

강희안(姜希顏)은 조선 초기의 문신 겸 학자로 자는 경우(景遇) 호는 인재(仁齋)이다. 지돈녕부사 강석덕의 아들이며 좌찬성 강희맹의 형으로 세종대왕의 이질이었다.(사진_안나겸 기자)
강희안(姜希顏)은 조선 초기의 문신 겸 학자로 자는 경우(景遇) 호는 인재(仁齋)이다. 지돈녕부사 강석덕의 아들이며 좌찬성 강희맹의 형으로 세종대왕의 이질이었다.(사진_안나겸 기자)

강희맹의 형 강희안의 명성

강희안(姜希顏)은 조선 초기의 문신 겸 학자로 자는 경우(景遇) 호는 인재(仁齋)이다. 지돈녕부사 강석덕의 아들이며 좌찬성 강희맹의 형으로 세종대왕의 이질이었다. 성격은 온화하고 말이 적으며 청렴, 소박하고 물리에 통달하였고 또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고 고요한 것을 사랑하여 젊어서부터 영달하기를 구하지 않았다.

1438년 21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441년(세종23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禮曹佐郎)을 거쳐 27세에 돈녕부주부(敦寧府主簿)가 되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할 때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등과 함께 참여한 8학사 중 한 명이다.

훈민정음의 편찬과 집필에 참여하였으며 1443년 정인지 등과 함께 정음(正音)28자에 대한 해석을 상세하게 덧붙였다. 1444년에 최항 신숙주 박팽년과 함께 의사청(議事廳)에 나가 언문(諺文)으로 운회(韻會)를 번역하였고, 1445년에는 최항 등과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주석을 붙였다.

1447년에 이조좌랑(吏曹佐郎)이 되었고 같은 해 집현전 직제한, 최항 성상문 이개 등과 함께 동국정운(東國正韻)을 완성하였다. 1454년(단종2) 37세에 집현전 직제학(直提學)에 올랐고 1460년에는 호조참의(戶曹參議) 겸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다. 1462년에는 인순부윤(仁順府尹)으로 사은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가 되었으며 인수부윤(仁壽府尹)에 올랐다.

5비석(사진_안나겸 기자)
5비석(사진_안나겸 기자)

특히 시와 글씨와 그림에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 하였으며 전서, 예서와 팔분에도 모두 독보적인 경지를 이루었다. 시(詩)는 위응물(韋應物), 유종원(柳宗元)과 같다는 평이 있었으나 자신의 글씨와 그림을 세상에 발표하기를 꺼려하여 전하는 유품이 드물다.

그림은 송나라의 유용(劉墉), 곽희(郭熙)과 비견되었으며, 글씨는 진나라의 왕희지(王羲之)와 원나라의 조맹부(趙孟頫)에 비견되기도 하였다. 기록상에 전해온 작품들을 살펴보면 작은 풍경화를 묵화로 즐겨 그렸으며 새와 짐승을 묘사한 영모화(翎毛畵), 산수화(山水畵), 인물화(人物畵)에도 모두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작품으로는 <여인도(麗人圖)>가 유명하고 <청학동(靑鶴洞)> <청천강(淸川江)>의 두 족자와 <경운도(耕雲圖)>는 모두 기이한 보물이라 할 수 있다. 저서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원예에 관한 전문서적인 <양화소록(養花小錄)>이 있다. 꽃을 가꾸는 일을 그의 경륜의 뜻에 비추어 서술하고 있으며 그림으로는 <교두연수도>와 <산수인물도> <고사관수도> <고사도교도> <강호한거도> 등이 있다. 또한 글씨로는 강지돈녕석덕묘표와 윤공간공형묘비와 사촌형인 영의정 문경공 강맹경의 비명을 섰다.

그는 특히 절의파로 세조가 단종을 폐위하고 임금이 되었을 때 이에 반대하여 단종복위운동을 한 성삼문, 이개, 박팽년,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등 사육신과 뜻을 같이하다 발각되어 심한 고초를 당하기도 하였다.

1463년(세조9)에 중추원부사로 진헌부사가 되어 중국 남경을 다녀온 강희맹은 연꽃씨를 채취하여 가지고 돌아와서 시흥시 하중동 208번지에 처음으로 시험 재배를 하였다. 희고 탐스러운 연꽃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연잎과 연밥의 효용과 실용성이 입증되자 이를 널리 퍼트려 연꽃 단지를 조성했다.(사진_안나겸 기자)
1463년(세조9)에 중추원부사로 진헌부사가 되어 중국 남경을 다녀온 강희맹은 연꽃씨를 채취하여 가지고 돌아와서 시흥시 하중동 208번지에 처음으로 시험 재배를 하였다. 희고 탐스러운 연꽃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연잎과 연밥의 효용과 실용성이 입증되자 이를 널리 퍼트려 연꽃 단지를 조성했다.(사진_안나겸 기자)

묘는 본래 경기도 장단군 장단면 금곡동 소재 야산에 있는 것을 1987년 5월에 선생의 아우 강희맹 선생의 묘가 있는 시흥시 하상동 산2(연꽃마을)번지로 이장하였으며 사후 537년만인 2000년 10월에 경기도가 ‘이달의 인물’로 선정했으며 아울러 진주강씨문량공파종중에서 한글 학자 한갑수 박사로부터 비문을 방아 한글창제비를 시흥 묘지에 세웠다.

강희맹의 묘소와 신도비가 있는 ‘연성각(蓮城閣)’(사진_안나겸 기자)
강희맹의 묘소와 신도비가 있는 ‘연성각(蓮城閣)’(사진_안나겸 기자)

강희맹의 장남 강귀손 그리고 삼남 강학손

강귀손(姜龜孫)은 조선 1450년(세종32)에 문량공 강희맹의 장자로 출생하여 자는 용휴이며 1468년(세조무자)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 등 여어 벼슬을 거쳐 종친부전첨 충훈부경력(忠勳府經歷), 돈녕부첨정(敦寧府僉正)을 지냈다.

또한 사재감정을 거쳐 한성부판관, 성균관사성, 통예원좌통예가 되었다. 1485년에 통정대부에 오르고 상주목사로 나갔다가 내직으로 들어와 장예원판결사, 홍문관부제학, 이조참의, 승정원 동부승지를 거쳐 도승지를 지냈다.

1497년에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났을 때 사간원 대사간으로 항소문을 올려서 일손 김탁영 등을 구하려 하였으나 승지 홍식의 방해로 허사가 되었다. 그후 병조판서와 사헌부대사헌을 거쳐 형조판서,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돌아가며 지내고 한성판윤 의정부 우참찬, 판중추부사, 숭정대부가 되어 1505년에 위의정이 되었으며 진원군에 봉하였다. 그의 나이 57세에 세상을 뜨니 시호를 숙헌(肅憲)으로 내렸다.

강희맹의 연꽃 재배지 ‘관곡지’(사진_안나겸 기자)
강희맹의 연꽃 재배지 ‘관곡지’(사진_안나겸 기자)
강희맹의 연꽃 재배지 ‘관곡지’(사진_안나겸 기자)
강희맹의 연꽃 재배지 ‘관곡지’(사진_안나겸 기자)
강희맹의 연꽃 재배지 ‘관곡지’(사진_안나겸 기자)
강희맹의 연꽃 재배지 ‘관곡지’(사진_안나겸 기자)

또한 문량공 강희맹의 삼남으로 태어난 강학손(姜鶴孫)은 자가 문보이며 1480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1486년 조지서 사지에 임명되었고, 1487년에 내섬사주부로 옮기었고 승의량에 올랐으며 1489년에 사온서주부로 옮기었고 1491년에 사헌부감찰에 전직하였다.

1492년 장예원사평에 오르고 다시 정3품 통훈대부에 승차하였다. 1493년에 평양판관에 전출되었다가 1498년에 한성부서윤에 배명되었다가 얼마 되지 아니하여 무오사화 7월의 변이 일어나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이라 하여 전남 영광으로 유배되어 1523년 69세에 세상을 떠났다. 영광 이흥산에 장례하고 위패를 모신 재실을 ‘이흥사’라 하였으며 현재는 강희맹의 묘소로 옮겨져 대민공, 인재공, 문량공, 숙헌공, 사평공 등 5선조 위패를 모시고 해마다 유림에서 춘향제를 모신다.

강희맹의 묘소와 신도비는 경기도 기념물 제87호로 지정되었다. 신도비(神道碑)는 묘에서 동쪽으로 약 50m 떨어진 곳에 있는데 2단의 기단석 위에 비신(碑身)을 세워 놓았다. 기단석 사방에는 연판문을 새기고 있으며 비문의 윗부분에는 두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형상을 사실적으로 조각해 놓았다.(사진_안나겸 기자)
강희맹의 묘소와 신도비는 경기도 기념물 제87호로 지정되었다. 신도비(神道碑)는 묘에서 동쪽으로 약 50m 떨어진 곳에 있는데 2단의 기단석 위에 비신(碑身)을 세워 놓았다. 기단석 사방에는 연판문을 새기고 있으며 비문의 윗부분에는 두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형상을 사실적으로 조각해 놓았다.(사진_안나겸 기자)

강희맹의 묘소와 신도비가 있는 ‘연성각(蓮城閣)’

강희맹의 묘소와 신도비는 경기도 기념물 제87호로 지정되었고, 시흥시 하상동 산 2번지에 소재한다. 묘역은 봉분을 중심으로 가운데 묘비가 있고 그 앞에 상석과 향로석이 있으며 한 단 아래 좌우에 문신석인(文臣石人) 한 쌍이 서 있다.

신도비(神道碑)는 묘에서 동쪽으로 약 50m 떨어진 곳에 있는데 2단의 기단석 위에 비신(碑身)을 세워 놓았다. 기단석 사방에는 연판문을 새기고 있으며 비문의 윗부분에는 두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형상을 사실적으로 조각해 놓았다.

신도비는 1488년(성종19)에 건립되었으며 비각은 1988년에 경기도에서 세웠다. 이러한 신도비의 규모는 비신의 높이 1.95m, 폭 80cm, 두께 20cm로 대제학(大提學) 서거정(徐居正)이 비문을 짓고 홍문관 박사 박증영(朴增榮)이 서(書)와 전(篆, 도장)을 하였다.

기도 시흥시 연성동(蓮城洞)은 부천시와 안산시 사이에 위치하는 대한민국 주요 공업도시의 일반적인 행정동 중 하나다. 특히 연성IC는 동서를 가로지르는 330번 국도를 달리다 보면 교통의 요지로 떠오르고 있는 광명 인근 목감IC에서 인천 앞바다에 이르는 송도IC까지 고속도로를 잇는 중간지점에 위치한다.
기도 시흥시 연성동(蓮城洞)은 부천시와 안산시 사이에 위치하는 대한민국 주요 공업도시의 일반적인 행정동 중 하나다. 특히 연성IC는 동서를 가로지르는 330번 국도를 달리다 보면 교통의 요지로 떠오르고 있는 광명 인근 목감IC에서 인천 앞바다에 이르는 송도IC까지 고속도로를 잇는 중간지점에 위치한다.(사진_안나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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