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생모인 7후궁과 칠궁(七宮)
궁정동 내 위치해 보안상 33년 만에 이뤄진 개방
[시사매거진308호] 수도 서울은 조선시대 한양으로 많은 역사적 흔적과 문화유산이 남아있는 곳이다. 특히 정치적으로나 사회적, 문화적으로 그 위상과 권위를 엿볼 수 있는 조선 5대 궁궐이 대표적이다. 정궁이자 법궁인 경복궁(景福宮)을 비롯하여 창덕궁(昌德宮), 창경궁(昌慶宮), 경희궁(慶熙宮), 덕수궁(德壽宮)으로 연결되는 이들 궁궐은 그 가치와 의미가 매우 독보적이다. 여기에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은 물론 지금까지 일반인에게 알려지지 않은 ‘칠궁(七宮)’은 그 역사적 지류에 깊이를 더한다.본래 칠궁은 1725년 숙종(肅宗)의
[시사매거진308호] 수도 서울은 조선시대 한양으로 많은 역사적 흔적과 문화유산이 남아있는 곳이다. 특히 정치적으로나 사회적, 문화적으로 그 위상과 권위를 엿볼 수 있는 조선 5대 궁궐이 대표적이다. 정궁이자 법궁인 경복궁(景福宮)을 비롯하여 창덕궁(昌德宮), 창경궁(昌慶宮), 경희궁(慶熙宮), 덕수궁(德壽宮)으로 연결되는 이들 궁궐은 그 가치와 의미가 매우 독보적이다. 여기에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은 물론 지금까지 일반인에게 알려지지 않은 ‘칠궁(七宮)’은 그 역사적 지류에 깊이를 더한다.
본래 칠궁은 1725년 숙종(肅宗)의 후궁으로 ‘영조(英祖, 연잉군)’를 낳은 숙빈최씨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처음에는 숙빈묘로 불리다가 1744년에는 육상묘로, 다시 1752년에는 육상궁(毓祥宮)으로 고쳐 불렀다. 그러다가 1882년 고종 때 불에 타 소실되었다가 이듬해인 6월에 재건되었다.
이때 영조의 후궁이며 진종(추존왕)을 낳은 정빈이씨의 사당인 연호궁(延祜宮)이 옮겨졌다. 그리고 1908년 선조의 후궁이며 원종(추존왕)을 낳은 인빈김씨의 저경궁(儲慶宮)과 숙종의 후궁으로 경종을 낳은 희빈장씨의 대빈궁(大嬪宮), 영조의 후궁이며 장조(사도세자)를 낳은 영빈이씨의 선희궁(宣禧宮), 정조의 후궁이며 순조를 낳은 수빈박씨의 경우궁(景祐宮)이 옮겨와 육궁이 되었다. 다시 1929년 고종의 후궁이며 의민태자를 낳은 귀비엄씨의 덕안궁(德安宮)이 옮겨오며 현재와 같은 칠궁이 되었다.
현재 종묘와 함께 왕실 사당 제도의 귀중한 표본으로 인정받아 사적 제149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의 왕통을 이은 임금의 생모이지만 왕비가 되지 못한 후궁 7명의 신위를 모신 사당으로 사적인 효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현재까지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칠궁(七宮)’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매우 많다. 왜 그럴까. 이유는 한때 군부 권력의 상징이었던 ‘안가(安家)’가 자리한 궁정동(宮井洞)에 청와대 담장을 끼고 있어 보안상 출입이 불허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칠궁은 육상궁(毓祥宮)을 비롯하여 7개의 크고 작은 궁궐이 들어서 있다. 그로 인해 잠시나마 ‘육상궁동’으로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온정동(溫井洞)과 합해 궁정동이 되었다.
칠궁의 원조, 생모인 숙빈최씨에 대한 영조의 효성
1725년 영조가 왕위에 오르던 첫해, 자신의 어머니인 숙빈최씨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사당인 ‘숙빈묘(淑嬪廟)’를 건립했다. 영조는 처음에 자신의 사저인 창의궁(彰義宮)에 숙빈최씨의 신위를 모시려 했다. 연잉군 시절에 살던 잠저(潛邸)로써 효종의 4녀인 숙휘공주의 남편 인평위 정제현의 옛집을 부친인 숙종이 매입해 4남인 연잉군(훗날의 영조)에게 준 저택이다. 이곳에서 정빈이씨와 결혼해 화억옹주, 효장세자, 화순옹주를 낳았으며 말년에 어머니 숙빈최씨가 궁에서 나와 살던 곳이다.
하지만 왕이 머물던 사저에 신하 된 생모의 사우(祠宇)를 사사로이 쓸 수 없다는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고, 경복궁 북쪽에 위치한 순화방에 청릉군(靑陵君) 이모(李模)의 아들 이언형의 집을 사들여 공사를 시작해 숙빈묘(淑嬪廟)를 완공했다.
이후 영조는 자신의 생모인 숙빈최씨의 지위를 공적 지위로 승격시키고자 꾸준히 노력했다. 숙빈최씨는 7세 때 무수리로 궁에 들어와 인현왕후를 섬겼다. 전라도 태인 출신인 숙빈최씨의 어릴 적 이름은 ‘복순’이다. 어려서 가족이 전염병으로 모두 죽고 고아가 되자 나주목사 일행을 만나 목사의 부인이자 인현왕후의 친척인 민씨가 거두었다. 이후 인현왕후가 궁에 들어갈 때 따라서 들어가 궁인이 되었다.
영조 20년(1744)에 숙빈묘의 칭호를 ‘육상묘(毓祥廟)’로 바꾸었고, 그 뒤인 영조 29년(1753)에 묘는 소령묘(昭寧墓)에서 소령원(昭寧園)으로, 사당은 육상묘에서 육상궁(毓祥宮)으로 승격시켰다. 또한 숙종 때 희빈장씨와 같은 일이 생길까 염려하여 궁녀에서 왕비로 오르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기에 왕비기 되지 못한 자신의 생모를 위해 숙종의 계비인 인원왕후가 사망한 뒤 영조는 생모인 숙빈최씨의 지위를 왕후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러한 숙빈최씨의 육상궁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된 사당이며 연호궁의 신위를 같이 모시고 있다. 육상궁 앞에는 동서각(東西閣)과 배각(拜閣)을 두고 나즈막한 곡담이 둘러싸고 있으며, 왼쪽으로 네 채의 사당이 앞뒤로 각기 독립하여 서로 접하여 서 있다. 이들 건물 앞쪽에 재실(齋室)과 정문이 있다. 또한 정문을 들어서면 남북축에 맞춘 2채의 재실이 있고, 그 뒤로는 동쪽으로부터 서쪽 방향으로 연호궁ㆍ육상궁ㆍ덕안궁ㆍ경우궁ㆍ선희궁ㆍ대빈궁ㆍ저경궁이 각각 대략 남쪽을 향하고 있다.
이곳은 원래 경복궁 후원이었지만, 부근에 청와대가 들어서며 경복궁 권역이 축소되어 경복궁 담장 밖에 위치하게 되었다. 1968년 1·21 사태 이후 34년간 일반인의 관람이 금지되어 오다가 2001년 11월 말부터 부분적으로 일반에 공개되었다.
무엇보다 이러한 육상궁 안에 영조의 어진이 봉안된 냉천정(冷泉亭)이 함께 있다. 궁궐 밖에 영조의 어진이 봉안된 창의궁 장보각이 있지만 1866년 화재가 일어나자 순조대에 이곳 냉천정으로 옮겨 봉안했다. 1908년 국가의 제사 제도를 정리하면서 다시 영조의 어진을 선원전으로 옮기면서 봉안소의 기능은 상실되었지만 전각의 형태는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냉천정은 좌우 퇴가 있는 정면 3칸, 전면 퇴가 있는 측면 1칸 규모의 건물이다. 좌측 2칸은 온돌방이며 측면의 퇴는 상부에 다락을 두고 아래쪽에 함실아궁이를 시설했다. 우측 1칸 반은 마루를 깔고, 후면과 측면에는 만살청판창[滿箭廳板窓戶]을, 전면에는 세살청판창을 달았다. 전면 퇴에는 모두 마루를 깔고 풍혈(風穴)이 있는 난간을 둘렀으며, 지붕은 기와 팔작지붕으로 용마루 좌우 끝에 용두를 올려 격식을 높였다. 이곳은 한국정원의 전통적인 일면을 보여주며 정숙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엿보게 한다.
장희빈의 대빈궁과 다섯 후궁의 5궁
1878년 고종 15년에 육상궁 건물 123칸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러나 당시 재정이 빈약하여 67칸으로 규모를 축소한 채 복원했다. 3년 후인 고종 18년(1881)에 또 다시 육상궁에 화재가 나서 신주가 불에 타는 등 피해를 입혔다. 이듬해인 1882년 6월에 육상궁을 복원했다. 그러면서 제일 먼저 영조의 후궁이며 추존왕인 진종의 생모 정빈이씨의 사당인 연호궁(延祜宮)을 이곳에 옮겼다.
이후 1870년 고종 7년에 제사 제도를 정리하면서 수도 한성 곳곳에 흩어져 있던 임금의 생모 사당을 한곳에 모아 제향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더욱 순종 2년(1908)에 ‘향사이정(享祀釐正)’의 칙령이 내려지면서 나라의 제사 제도가 통폐합되는데 흩어져 있던 후궁들의 신주들을 육상궁에 모두 모아 제사를 하기로 하고 폐궁(廢宮)들은 국유화하는 정책이 펼쳐졌다. 이때 최종적으로 경우궁, 저경궁, 대빈궁, 연호궁, 선희궁까지 6개의 궁이 선정되었다. 다만 경수궁과 의빈궁은 제외되어 매안(埋安)하기로 했다.
1908년 선조의 후궁이며 원종(추존왕)을 낳은 인빈김씨의 저경궁(儲慶宮)과 숙종의 후궁으로 경종을 낳은 희빈장씨의 대빈궁(大嬪宮), 영조의 후궁이며 장조(사도세자)를 낳은 영빈이씨의 선희궁(宣禧宮), 정조의 후궁이며 순조를 낳은 수빈박씨의 경우궁(景祐宮)을 육상궁 안으로 옮겼다. 또한 1929년 고종의 후궁이며 의민태자를 낳은 귀비엄씨의 덕안궁(德安宮)이 옮겨오며 현재와 같은 칠궁이 되었다.
이름은 칠궁이지만 실제로 신주가 모셔진 건물은 다섯 채이며 냉천정(冷泉亭)을 가운데에 두고 동, 서 권역으로 나뉜다. 동쪽에는 연호궁(육상궁)이 있는데 하나의 건물을 좌(육상궁), 우(연호궁)로 나눠 쓰고 있다. 서쪽에는 저경궁, 대빈궁, 경우궁(선희궁)이 한 줄로 나란히 있는데 경우궁 건물을 좌(선희궁), 우(경우궁)로 나눠 쓰고 있다. 덕안궁은 이들 앞에 별도로 있다.
이렇게 사당 대부분이 수수하지만 그중 가장 주목받는 곳은 대빈궁이다. 바로 희빈장씨의 사당이다. 숙종의 후궁이자 경종의 친모이며 오늘날 가장 유명한 조선 임금의 후궁이기도 한 희빈장씨의 사당은 다른 곳과 조금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다. 기둥이 둥글고 조금 더 화려하며 하단부 기단도 단이 조금 높다. 비록 폐위가 되기는 했지만 한때 중전이 되기도 했던 희빈의 이력을 배려한 조치다.
칠궁은 원래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는 곳이었으나 청와대 영빈관과 담장을 같이 하고 있기에 청와대 경호상 이유로 일반인 출입이 금지되었다. 이후 무려 33년만인 2001년 11월에 일반인에게 다시 개방되었다. 이후 2018년 6월부터 시험 개방에 들어가 예약만 하면 청와대를 거치지 않고 칠궁만 단독으로 관람할 수 있게 되었고, 2019년 1월부터는 매일 7회에 걸쳐 시간제로 개방하는 방식으로 변경되며 누구나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2022년 5월 10일 마침내 청와대가 일반인에게도 개방됨에 따라 함께 완전히 개방되었다.
정조의 첫사랑, 의빈성씨 의빈궁은 제외
조선 제22대 정조의 첫사랑 의빈성씨는 혜경궁 홍씨의 가솔 출신으로 어릴 때 궁중에 들어와 정조의 총애를 입었다. 이후
이후 1782년(정조 6)에 아들을 출산하여 소용(昭容: 정3품 벼슬의 내명부)으로 봉해졌으며 이듬해인 1783년 그의 아들이 세자(文孝世子)에 책봉되자 빈(嬪: 정1품 벼슬의 내명부)으로 진봉되어 ‘의빈(宜嬪)’이 되었다. 1784년(정조 8)에는 딸을 낳았지만 첫돌을 넘기기도 전에 사망하였고 뒤이어 문효세자도 1786년(정조 10) 5살의 어린 나이로 사망하였다. 의빈성씨는 이때 세 번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는데 문효세자의 장례를 지낸지 약 2개월 후 출산을 앞두고 사망하였다.
1787년(정조 11) 의빈성씨의 사당을 의빈궁(宜嬪宮)으로 정하고 제향이 이뤄졌다. 이후 1873년(고종 10)에 육상궁 안에 옮겨졌으나 1908년(융희 2)에 제사 제도가 개정되면서 의빈궁은 칠궁에서 폐궁되었다. 하지만 명칭은 그대로 유지되어 의소세자와 문효세자의 무덤인 의령원과 효창원의 예법에 따라 일 년에 한 번씩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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