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E김찬우 교수)메타티칭의 시대, 끝까지 읽는 아이가 노벨상을 연다

비옥한 터전과 교통요지, 고대 문화 중심 ‘익산’

백제 부흥의 상징인 ‘익산 미륵사와 견훤’

[시사매거진304호] 전라북도 익산군(益山郡)은 예로부터 비옥한 삶의 터전으로 나아가기 위한 교통의 요지며 관문이다. 그로 인해 고대(古代) 문화의 중심지로 급부상하며 토착 지배 세력의 위상을 상징하는 정치적 무대가 되었다. 특히 익산의 만경강 일대 청동기 문화는 일찍부터 중국과 한반도 서북부지역의 선진문화 유입을 촉진했다.B.C. 3세기 말, 중국 유방이 한(漢)나라를 건설한 후 대립 관계에 있던 연(燕)나라 사람 위만이 (고)조선으로 귀화해 쿠데타를 일으키고 준왕(準王)의 권력을 찬탈해 (위만)조선을 통치했다. 이때 위만에게 패

1974년에 동탑의 터를 발굴한 것을 시작으로 1980년부터 1996년까지 절터 전체에 대한 발굴조사가 진행되었고, 1991년부터 1993년까지 동탑을 복원했다. 고증을 거치지 않고 복원한 까닭에 ‘문화재’라기보다는 ‘복원품’ 수준이었다.(사진_안나겸 기자)
1974년에 동탑의 터를 발굴한 것을 시작으로 1980년부터 1996년까지 절터 전체에 대한 발굴조사가 진행되었고, 1991년부터 1993년까지 동탑을 복원했다. 고증을 거치지 않고 복원한 까닭에 ‘문화재’라기보다는 ‘복원품’ 수준이었다.(사진_안나겸 기자)

[시사매거진304호] 전라북도 익산군(益山郡)은 예로부터 비옥한 삶의 터전으로 나아가기 위한 교통의 요지며 관문이다. 그로 인해 고대(古代) 문화의 중심지로 급부상하며 토착 지배 세력의 위상을 상징하는 정치적 무대가 되었다. 특히 익산의 만경강 일대 청동기 문화는 일찍부터 중국과 한반도 서북부지역의 선진문화 유입을 촉진했다.

B.C. 3세기 말, 중국 유방이 한(漢)나라를 건설한 후 대립 관계에 있던 연(燕)나라 사람 위만이 (고)조선으로 귀화해 쿠데타를 일으키고 준왕(準王)의 권력을 찬탈해 (위만)조선을 통치했다. 이때 위만에게 패한 준왕과 일족이 바다를 건너 한나라의 점령지인 ‘익산’ 일대에 터를 잡고, 만경강과 금강을 중심으로 경기·충청·전라도에 마한 소국을 형성해 ‘마한연맹체’를 형성했다. 이후 준왕의 후손이 절명하자 6세기경 부여·고구려에서 남하한 온조왕의 ‘십제국(백제)’에 통합된다.

이러한 백제는 ‘한국식 동검 문화’와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게 된다. 또한 국가 체제의 정비와 율령을 시행하고, 전국을 5방으로 나누어 하위 행정구역에 이르기까지 고도의 통치 기술을 발휘한다. 인력, 조세,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이 지역만의 특화된 금은보석 세공 기술을 발전시켜 토착 지배자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금동관’과 ‘환두대도’ 등 찬란한 문화유산을 이 땅에 남긴다.

미륵사가 사라진 후 서탑과 당간지주만 남은 채 그 일대는 경작지와 민가가 조성되었다. 또한 일제강점기 때 그나마 남은 서탑의 반쪽마저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일본인들이 콘크리트를 잔뜩 부어 구조를 안정시켰다. 그나마 남은 유적들을 문화재로 지정하여 미륵사지 석탑은 국보 제11호, 미륵사지당간지주는 보물 제236호, 절터 전체는 사적 제150호로 지정되었다.(사진_안나겸 기자)
미륵사가 사라진 후 서탑과 당간지주만 남은 채 그 일대는 경작지와 민가가 조성되었다. 또한 일제강점기 때 그나마 남은 서탑의 반쪽마저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일본인들이 콘크리트를 잔뜩 부어 구조를 안정시켰다. 그나마 남은 유적들을 문화재로 지정하여 미륵사지 석탑은 국보 제11호, 미륵사지당간지주는 보물 제236호, 절터 전체는 사적 제150호로 지정되었다.(사진_안나겸 기자)

‘익산(益山)’은 원래 지금의 익산시 ‘금마면(金馬面)’ 일대의 지명이다.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삼한 시대 중국 한나라 마한 54소국 중 건마국(乾馬國)이 있던 곳이다. 이후 백제 건국 후 금마군(金馬郡)으로 흡수돼 통치되었다.

백제는 602년 아막성 전투를 시작으로 60여 년간 대신라 전쟁을 계속하며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했다. 그 배경에는 위덕왕에서 무왕 대에 이르는 지방지배 강화와 국가 체제의 정비가 있었다. 율령을 시행하고 전국을 5방으로 나누어 군(郡)과 성(城) 단위의 하위 행정구역을 두었다. 또한 관등을 가진 중앙정부 관료를 파견해 통치하는 등 고도의 통치 기술을 발휘했다.

삼국시대 이후에는 안승과 견훤 등 시대를 풍미한 걸출한 영웅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견훤은 (후)백제의 상징으로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국보 제289호)’을 조성하는 등 백제의 문화와 역사를 계승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옛 후백제의 도읍인 전주시(全州市)에 포함해 백제 부흥의 상징으로 삼았다.

후백제가 멸망한 시기에도 고려군이 진격한 최전방 마성(馬城)이 있던 곳으로 명성이 높다. 이후 금마군은 1344년(고려 충혜왕 5)에 ‘익주(益州)’로 읍호가 승격되었다가, 1413년(태종 13)에는 ‘익산(益山)’으로 개칭되며 공식적 군현 단위 행정 지명인 ‘금마(金馬)’ 지명이 소멸된다. 이어 1914년에는 군내면과 미륵면이 통합되어 ‘금마면(金馬面)’이 신설되어 오늘에 이르다.

현재 바다와 내륙에서 출토된 ‘통일신라 토기’와 ‘고려청자’는 수상 운송의 발달과 수요층에 도달하는 상권의 발달 과정을 보여준다. 유물에 담긴 문화 창달 수준과 세공 기술은 물론 비옥한 땅을 토대로 한 익산의 중심, 금마(金馬)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책과 지도에서 풍요롭던 옛 익산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호국사찰 ‘익산 미륵사지’, 두 왕후 선화공주와 사택비 흔적

미륵사 목탑은 바다 건너 일본까지 알려진 백제의 건축 기술로 백제문화의 백미다. 불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모든 탑은 나무로 지어졌다. 그중 부여에는 백제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세운 왕흥사처럼, 목탑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절터가 다수 남아 있다.(사진_안나겸 기자)
미륵사 목탑은 바다 건너 일본까지 알려진 백제의 건축 기술로 백제문화의 백미다. 불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모든 탑은 나무로 지어졌다. 그중 부여에는 백제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세운 왕흥사처럼, 목탑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절터가 다수 남아 있다.(사진_안나겸 기자)

기원후 600년에서 641년 백제 무왕의 재위 기간에 건립된 ‘익산 미륵사지’는 ‘신라의 황룡사’, ‘고구려의 금강사’와 함께 삼국시대 3대 사찰로 명성이 높다. 특히 백제시대 절터 가운데 가장 웅대하며 독창적인 사찰 배치도(가람절)와 석조·목조 건축 기법, 공예문화의 수준을 보여주는 사리장엄구, 유적의 연대를 명확히 밝혀 적어 둔 사리봉영기 등으로 인해 백제문화의 탁월함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백제 무왕과 왕비(선화공주)가 사자사(獅子寺) 가는 길에 지금의 미륵산인 용화산 밑의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나자 연못을 메우고 세 곳에 각각 탑과 법단, 회랑을 짓고 미륵사(彌勒寺)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실제 1980년부터 1994년까지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각각 탑과 법당이 회랑으로 둘러싸인 절터를 확인하며 삼국유사의 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했다.

이러한 백제 익산 미륵사(彌勒寺)의 건립은 중국을 경유한 ‘인도의 불교’ 전래와 밀접하다. 사찰의 명칭에서 드러나듯 미륵신앙과 관련돼 있다. 불경에 따르면 미륵은 수미산 위쪽 ‘도솔천(兜率天)’에 거하지만, 석가모니가 열반하고 56억 7천만 년 뒤 인간들이 사는 사바세계에 현신한다.

백제 미륵사 복원 모형.(사진_안나겸 기자)
백제 미륵사 복원 모형.(사진_안나겸 기자)

미륵이 지상에 온 뒤 부처로서 ‘용화수(龍華樹)’라는 나무 아래에서 단 3번 설법하여 모든 중생이 깨달음을 얻게 하였다. 또한 미륵이 도래한 세상을 ‘용화세계(龍華世界)’라 부르는데, 사시사철 화창하고 사람들은 모두가 평등하고 화목하게 지낸다는 뜻이다.

이러한 종교적 바람을 담아 용화수(樹) 아래 미륵이 있듯, ‘익산 용화산(山)’ 아래 미륵사가 있도록 배치한다. 현재는 옛 지명 용화산 대신 미륵사지 뒷산 이름을 미륵산이라 부른다. 특히 백제 미륵사는 호국사찰로 국가의 안위와 직결돼 있다. 백제의 수도 한성(하남위례성)과 웅진(공주)·사비(부여)에 이어 2번이나 천도한 상황에서 외세의 위협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백제인은 지배층과 백성을 막론하고 미륵불 신앙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미륵사의 건립은 백제 무왕과 첫 번째 왕비인 선화공주에 의해 창건되었다. 그러나 선화공주와 일찍 사별한 무왕은 후에 맞이한 계비 ‘좌평 사택적덕의 딸 사택씨’와 더불어 미륵사를 완공한다. 사택적덕은 백제의 귀족 가문인 대성팔족 중 사택씨 가문의 인물로 후기 백제에서 왕후를 배출할 만큼 권력이 막강했다. 대형 사찰을 지을 정도로 큰 재산도 보유했다.

이를 입증하듯 <삼국유사>에는 무왕인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은 물론 미륵사의 구조가 기록돼 있고, 미륵사 절터에서 발굴된 ‘사리봉영기’에는 사택적덕의 딸 사택비의 공적이 기록돼 있다. 한편 2016년 무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익산의 쌍릉 대왕묘’를 일본인이 발굴한 지 99년 만에 재조사한 결과 20대~40대 사이 여성의 치아 유골과 신라제 토기가 확인됨으로 인해 무왕 시기 신라 왕실 여인이 시집온 것이라는 연구 결론을 냈다.
 

백제 이후 미륵사의 역사와 보존

미륵사가 사라진 후 서탑과 당간지주만 남은 채 그 일대는 경작지와 민가가 조성되었다. 또한 일제강점기 때 그나마 남은 서탑의 반쪽마저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일본인들이 콘크리트를 잔뜩 부어 구조를 안정시켰다. 그나마 남은 유적들을 문화재로 지정하여 미륵사지 석탑은 국보 제11호, 미륵사지당간지주는 보물 제236호, 절터 전체는 사적 제150호로 지정되었다. 사진은 백제 미륵사지 서탑 모형과 미륵사지 서탑 홀로그램 상징물.(사진_안나겸 기자)
미륵사가 사라진 후 서탑과 당간지주만 남은 채 그 일대는 경작지와 민가가 조성되었다. 또한 일제강점기 때 그나마 남은 서탑의 반쪽마저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일본인들이 콘크리트를 잔뜩 부어 구조를 안정시켰다. 그나마 남은 유적들을 문화재로 지정하여 미륵사지 석탑은 국보 제11호, 미륵사지당간지주는 보물 제236호, 절터 전체는 사적 제150호로 지정되었다. 사진은 백제 미륵사지 서탑 모형과 미륵사지 서탑 홀로그램 상징물.(사진_안나겸 기자)

백제 창건 이후 미륵사는 불교가 융성하던 통일신라 시기와 고려, 조선시대까지 꾸준하게 유지보수, 증축되었다. <삼국사기>에는 통일신라 성덕왕 18년(719) 9월에는 금마군 미륵사에 벼락이 쳤다는 기록이 있고, <연려실기술>에는 성덕왕 29년(730) 6월에 뇌진이 쳐서 ‘서쪽 석탑’이 반쯤 무너졌으므로 옛 모습대로 고쳐놓았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혜거국사 비문>에 ‘고려 태조 5년(922) 고려의 승려 혜거가 미륵사탑을 개탑했다’는 내용이 표기돼 있다. 또한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기와에는 980년, 1267년, 1317년, 1330년 명문과 새 기와로 보수한 흔적이 있다. 이어 미륵사지에서 고려청자 파편이 무수히 수습되어 고려시대에도 사찰이 건재했음을 확인했다.

이후 조선시대에도 태종 7년(1407) 여러 고을의 자복 사찰을 정할 때 미륵사도 지정되어 있을 정도다. 그뿐 아니라 조선 초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양곡집>에서 ‘(미륵사지) 석탑의 규모가 동방 최대’라는 문구가 기록돼 있다. 하지만 18세기 무렵 편찬된 <와유록>에는 미륵사의 폐허를 보며 쓸쓸한 감정에 잠기는 사설시조가 있어 조선시대 어느 시점에 폐사지가 된 것으로 추정한다.

미륵사가 사라진 후 서탑과 당간지주만 남은 채 그 일대는 경작지와 민가가 조성되었다. 또한 일제강점기 때 그나마 남은 서탑의 반쪽마저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일본인들이 콘크리트를 잔뜩 부어 구조를 안정시켰다. 그나마 남은 유적들을 문화재로 지정하여 미륵사지 석탑은 국보 제11호, 미륵사지당간지주는 보물 제236호, 절터 전체는 사적 제150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1974년에 동탑의 터를 발굴한 것을 시작으로 1980년부터 1996년까지 절터 전체에 대한 발굴조사가 진행되었고, 1991년부터 1993년까지 동탑을 복원했다. 고증을 거치지 않고 복원한 까닭에 ‘문화재’라기보다는 ‘복원품’ 수준이었다.

1999년부터는 콘크리트로 범벅이 된 서탑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동탑을 반면교사로 삼아 작업은 매우 신중하게 이뤄졌다. 해체 작업은 2010년까지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무왕의 계비로 추정되는 사택적덕의 딸 사택비의 실존을 증명하는 <금제사리봉영기> 등 사리장엄이 심주석에서 발굴되었다.

미륵사지 정비와 서탑 복원 준비가 한창이던 2015년 7월, 미륵사지와 인근 왕궁리 유적은 물론 공주시, 부여군의 다른 백제시대 유적들과 함께 ‘백제역사 유적지구’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이어 ‘미륵사지 유물전시관’이 2019년 초 ‘국립익산박물관’으로 격상되었고, 2020년 1월 10일에는 새로운 건물로 이전 개관했다.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기와에는 980년, 1267년, 1317년, 1330년 명문과 새 기와로 보수한 흔적이 있다.(사진_안나겸 기자)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기와에는 980년, 1267년, 1317년, 1330년 명문과 새 기와로 보수한 흔적이 있다.(사진_안나겸 기자)

미륵사 ‘가람배치도’와 ‘중앙 목탑 & 동·서 석탑’

미륵사지에서 발견된 미륵사 ‘가람배치도’는 사찰의 배치와 면적에서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먼저 가람은 사찰 건축물이 배치된 형식으로 ‘1탑 1금당’이 기본이다. 하지만 이곳 미륵사는 다른 백제시대 사찰인 왕흥사나 정림사와 달리 ‘3탑 3금당’ 식으로 건물이 배치돼 있다. 특히 1탑 1금당을 나란히 3곳으로 배치한 ‘삼원식’의 형태로 문-탑-금당이 하나의 공간을 형성한다. 이때 세 공간은 회랑으로 구분되고, 뒤편 강당은 하나로 합쳐진다. 이러한 배치는 왕이 용화산 밑 연못을 지나갈 때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났다는 창건 설화와 연관 있다. 현재까지 이러한 ‘3탑 3금당’은 ‘익산 미륵사지’가 유일하다.

먼저 미륵사의 사라진 목조 건축은 한가운데 목탑을 중심으로, 예배 공간인 금당과 승려들의 수행과 일상생활을 위한 강당(講堂), 승방(僧房) 등으로 건립된다. 불에 잘 타고 물에 닳아 썩기 쉬운 나무로 지은 목조 건물은 긴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모두 사라져버렸지만, 지붕 위 양 끝을 장식하던 거대한 치미(鴟尾), 녹색의 유약으로 반짝인 서까래 기와 그리고 건물 벽의 그림 조각들과 석등 받침돌인 ‘석등하대석’, 전각이나 탑의 처마에 매다는 ‘금동풍탁’ 풍경 등의 유물은 옛 미륵사의 독창적 규모와 아름다움을 엿보게 한다.

특히 미륵사 목탑은 바다 건너 일본까지 알려진 백제의 건축 기술로 백제문화의 백미다. 불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모든 탑은 나무로 지어졌다. 그중 부여에는 백제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세운 왕흥사처럼, 목탑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절터가 다수 남아 있다. 같은 시기 신라 경주에도 진흥왕이 세운 황룡사의 9층 목탑 터가 남아 있다. 황룡사의 목탑은 백제의 기술자 아비지가 공사를 총괄했다. 그 외 백제의 기술자들은 일본의 첫 불교 사원인 ‘아스카 데라’ 목탑(556년 완성)도 건축했다.

미륵사 동·서 양쪽의 석탑(石塔)은 삼국시대 원형으로 웅장한 크기를 자랑하는 9층이다. 이 미륵사지 석탑 이후 한국의 석탑들은 계속 크기가 작아지며 독자적인 양식이 생겨났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간결하게 크기가 점점 작아졌다. 이러한 미륵사의 석탑은 장인들이 가까운 미륵산에서 캐낸 단단한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무엇보다 서쪽의 탑을 복원하던 과정 중에 2009년 사리병과 금판 모양의 봉안 기록이 발견되었다. 사리병에는 연꽃, 당초, 인동초무늬가 정교한 음각으로 가득 새겨져 있어 백제 공예품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얼굴모양의 수막새와 기와.(사진_안나겸 기자)
얼굴모양의 수막새와 기와.(사진_안나겸 기자)

고도 익산 백제 계승한 ‘안승’ & ‘견훤’

백제 무왕은 600년에 즉위하여 금마에 새로운 수도를 기획하였다. 한성과 웅진·사비에 이어 ‘금마’를 중심으로 궁성인 왕궁성을 세웠다. 이어 오금산성, 미륵산성, 금마저 토성, 낭산산성, 용화산성 등의 성곽과 미륵사지, 제석사지, 사자사, 왕궁사, 석불사, 오금사, 태봉사 등의 사찰을 건립했다. 그리고 사망한 후에는 익산 쌍릉에 묻혔다.

이후 백제가 멸망하며 금마저(金馬渚)에 고구려 유민이 세운 ‘보덕국’이 들어섰다. 고구려 왕족 출신의 안승을 왕으로 추대하고 고구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국가통치체제를 성립한 내용이 <삼국사기>에 기록된다. 그러다가 683년 신라의 신문왕은 안승을 경주로 불러 왕족으로 예우하며 보덕국을 해체한다.

892년 상주 가은현(문경) 출신의 견훤은 통일신라 장수로 나섰다가 920년 합천의 대야성을 함락하고, 김해의 진례성까지 진격한 후 완산주를 중심으로 (후)백제를 세운다. 이어 922년에 이곳 익산 미륵사에서 개탑의식을 거행한 후 고창 선운사에서 승려를 뽑는 과거제 선불장을 열었다. 미륵사 개탑 행위는 실제 탑의 중수기도 했지만, 백제 무왕과 같이 ‘미륵의 세상을 구현’한다는 견훤의 정치적·행정적 천명이기도 했다.

그로 인해 금마저에 있는 많은 유적에서 토기, 자기, 기와, 금속공예품 등 수 만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백제유물보다는 통일신라 이후의 것들이 더 많이 발견되었다. 이는 견훤과 관련 있다. 무엇보다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550여 편의 중국 자기를 2023년에 새롭게 정리하며 중국과 견훤의 밀접한 관계를 밝히는 오월의 ‘월주요’를 공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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