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헌조 때 조선왕조 몰락시킨 ‘세도정치’ 등장

[시사매거진279호] 조선시대 매우 뛰어난 임금으로 평가받은 정조대왕(正祖大王). 49세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파란만장한 일대기와 더불어 개혁과 탕평책으로 대통합을 실현한 군주. 그런 그에게 조선왕조의 몰락을 가져온 세도정치 시대를 연 아들이 있다. 순하디 순하고, 여리디 여린 심성의 이공(李玜)’이 바로 정조대왕의 아들 순조(純祖)’.

창덕궁 후원에 120칸 저택을 짓고 은신한 채 살아간 그는 11세에 부친 정조대왕이 승하한 후 증조부 영조의 계비인 56세 왕대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으며 살았다. 이후 경주김씨에 이어 안동김씨와 풍양조씨로 이어지는 세도정치의 서막을 열었고, 왕조의 몰락을 가져왔다. 그런 그의 생애 흔적이 남아 있는 창덕궁 후원의 연경당(演慶堂, 보물 제 1770)’으로 들어가 보자.
 

창덕궁 연경당은 창덕궁 후원 안쪽에 위치한 조선 후기 사대부 주택을 모방해 지은 순조의 120칸 가옥(현재는 총109칸)이다. 사랑채, 안채, 안행랑채, 바깥행랑채, 반빗간, 서재, 후원, 정자와 연못 등을 두루 갖춘 독립된 공간이다. 조선후기 주택 구조를 알 수 있는 보물 제1770호다.(사진_안나겸 기자)
창덕궁 연경당은 창덕궁 후원 안쪽에 위치한 조선 후기 사대부 주택을 모방해 지은 순조의 120칸 가옥(현재는 총109칸)이다. 사랑채, 안채, 안행랑채, 바깥행랑채, 반빗간, 서재, 후원, 정자와 연못 등을 두루 갖춘 독립된 공간이다. 조선후기 주택 구조를 알 수 있는 보물 제1770호다.(사진_안나겸 기자)

정조 시대와 비교되는 순헌종 시대

조선왕조 최고의 번영기를 구가하는 영·정조 시대는 숙종 대에서 시작한다. 19대 숙종의 차남으로 왕위에 오른 제21대 영조는 증손자인 제23대 순조와 다르게 미천한 출신의 숙빈최씨소생이다. 이후 노론세력 김창집의 종질녀인 영빈김씨의 양자가 되어 왕위를 계승한다. 하지만 평생 천민 소생이라는 콤플렉스를 가지고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조는 조선중기를 구가하는 문예부흥기를 이끌었다.

특히 영조의 부친인 숙종은 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 등 세 왕비를 차례로 사별하고 후사가 없었다. 후에 남인세력의 희빈장씨를 통해 아들 이윤(李昀, 경종)’을 낳았고, 노론세력의 숙빈최씨를 통해 이금(李昑, 연잉군, 영조)’을 낳았다.

두 당파 사이에서 왕위계승에 대한 치열한 다툼을 거치며 형인 제20대 경종이 단명하자 이어 순조롭게 제21대 왕으로 등극했다. 그리고 차기 왕으로는, 당쟁으로 희생된 아들 사도세자(장헌세자, 추존왕 장조)’를 대신해 손자 이산(李祘)’을 왕세자로 책봉하고 제22대 왕 정조로 왕권을 계승했다.

장락문(長樂門)은 창덕궁 연경당으로 들어가는 정문이다. 지체높은 양반이 수레나 사인교를 타고 들어 갈수 있는 솟을 대문이다.(사진_안나겸 기자)
장락문(長樂門)은 창덕궁 연경당으로 들어가는 정문이다. 지체높은 양반이 수레나 사인교를 타고 들어 갈수 있는 솟을 대문이다.(사진_안나겸 기자)

하지만 이와 반대로 정조대왕의 아들과 손자인 순·헌종은 영·정조의 부흥을 이끌지 못하고, 오히려 왕조의 몰락과 세도정치 시대를 연 암군(暗君)’이 된다. 그중 먼저 순조는 갑작스런 부친 정조대왕의 승하로 어린 나이에 제23대 왕이 되었다.

또한 형인 문효세자가 나이 어릴 때 죽음으로 인해 골육상잔의 암투를 거치지 않고 순탄하게 왕위를 계승했다. 그 역시 개혁의지를 가지고 대리청정 했으나 단명한 아들 효명세자(추존왕 익종)’를 대신해 손자인 이환()’을 왕세자로 책봉하고 제24대 왕 헌종으로 승계했다.

사랑채에서 안채 가는 정추문(正秋門)은 연경당 앞마당에서 안채와 사랑채를 연결하는 문이다. 특히 연경당 안에는 수인문이라 해서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있어 주로 여자들이 출입했고, 장양문은 솟을 대문으로 주로 남자들이 연경당 사랑채로 들어 갈때 사용했다. 유교 중심인 조선은 문에도 남여차별을 두었다.(사진_안나겸 기자)
사랑채에서 안채 가는 정추문(正秋門)은 연경당 앞마당에서 안채와 사랑채를 연결하는 문이다. 특히 연경당 안에는 수인문이라 해서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있어 주로 여자들이 출입했고, 장양문은 솟을 대문으로 주로 남자들이 연경당 사랑채로 들어 갈때 사용했다. 유교 중심인 조선은 문에도 남여차별을 두었다.(사진_안나겸 기자)

순조의 일생과 왕조를 몰락시킨, 세도정치의 서막

23대 임금인 순조(純祖, 1790~1834)’는 개혁군주 정조대왕과 수빈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먼저 의빈성씨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이순(李㬀)’이 문효세자로 책봉되었지만 4세 되던 해에 홍역으로 사망했다. 이후 1800(정조 24) 차남이던 수빈박씨 소생의 이공(李玜)’이 왕세자가 되었고, 같은 해 6월에는 1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다.

이때 부친 정조대왕보다 8세나 더 많았던 영조의 계비이자 증조모인 예순왕대비(睿順大妃, 정순왕후)’56세의 나이로 왕실 최고 수장자리에 앉아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했다. 이어 아들 효명세자를 대신해 그의 손자 헌종이 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가장 어린 임금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런 이들 순헌종은 윗대의 영정조와 항상 비교의 대상이 되었다. 더욱 국정 운영은 물론 조부와 부친 등 남성세계에서 훈육 받던 영정조와 다르게, 증조모와 조모 등 여성세계에서 수렴청정을 받은 순헌종은 외척 세력의 득세와 당쟁으로 왕권강화에 실패한다.

연경당 안채
연경당 안채(사진_안나겸 기자)

특히 외척이 미력했던 전대 영·정조와 다르게 후대에는 증조모인 경주김씨(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예순왕대비)’ 가문과 조모인 안동김씨(순조의 정비, 순원왕후, 왕대비)’ 가문이 외척세력을 구축해 정권을 장악하고 민생을 어지럽혔다.

무엇보다 왕위에 오르기 전 세자 교육을 받는 기간도 짧았고, 방법 역시 달랐다. 영조가 부친 숙종의 무릎에 앉아 왕세자 교육을 받았고 이어 정조 역시 조부 영조의 무릎에 앉아 왕세손 교육을 받았다.

반면, 순조의 경우는 증조모인 예순왕대비(정순왕후) 수렴 앞에서 정사를 펼쳤고, 왕손세 헌종 역시 증조모인 왕대비(순원왕후) 수렴 앞에서 정사를 돌봐야 했다. 선대의 강력한 왕권 대신 후대에는 어린 임금을 대신해 조모의 수렴청정이 모든 것을 결정해 결과적으로 왕권을 실추시켰다.

연경당 안채와 120칸 행랑. 행랑채는 주로 노비들이 기거했다. 옛날 사대부 집은 99칸이었으나 연경당은 그 당시 120칸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109칸 반정도가 남아있다. 중행랑채에 기거하는 노비들은 바깥행랑채에 기거하는 노비들보다 급이 높는 비복이었다. 노비뿐만 아니라 주인 내외와 면식이 있는 손님도 이 행랑채에서 묵으며 지냈다. (사진_안나겸 기자)
연경당 안채와 120칸 행랑. 행랑채는 주로 노비들이 기거했다. 옛날 사대부 집은 99칸이었으나 연경당은 그 당시 120칸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109칸 반정도가 남아있다. 중행랑채에 기거하는 노비들은 바깥행랑채에 기거하는 노비들보다 급이 높는 비복이었다. 노비뿐만 아니라 주인 내외와 면식이 있는 손님도 이 행랑채에서 묵으며 지냈다. (사진_안나겸 기자)

암군 된 순조, 세도정치의 시작 & 조선왕조의 몰락

처음 왕위에 오른 순조는 180315세가 될 때까지 4년간 예순왕대비(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경주김씨의 수렴청정 아래 있었다. 이후 친정을 선포하면서 부친인 정조대왕의 유지를 받들어 개혁을 추진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예순대왕대비 가문과 경주김씨 일파인 김관주, 심환지 등 벽파세력이 영·정조 때의 탕평책을 없애고, 정치질서를 개편해 왕권을 약화시켰다. 이를 타계하기 위해 순조는 장인 김조순과 외척을 대거 등용해 권력을 강화했다. 그리고 재위 8년이 되던 180919세 때는 국왕 친위부대를 강화하고, 하급 친위관료를 육성하는 등 왕권을 강화했다.

연경당 안채측면 (사진_안나겸 기자)
연경당 안채측면 (사진_안나겸 기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180919세 때 유례없는 기근이 들어 전국이 도탄에 빠졌으며, 181121세 때는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 왕실과 왕권을 위협했다. 살인과 방화가 일어났으며 순조 역시 개혁의지가 위축되었다.

이때 극심한 트라우마를 겪은 순조는 자신감을 잃고 건강이 악화되어 사실상 국정운영을 포기한 채 아들인 효명세자 이영(李旲)’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고 뒷전으로 물러났다. 1827년 순조는 37세의 나이로 창덕궁 후원 연경당(演慶堂, 보물 제 1770)’을 짓고 은둔생활을 한다.

조부 정조대왕을 꼭 빼닮은 효명세자는 외모가 출중하고 영특했으며 재능이 뛰어났다. 부친 순조를 대신해 외척과 권신들에게 단호하게 대처하며 실권을 행사했다. 그는 왕권을 강화하는 외형적 방법으로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대지도 동궐도(東闕圖) 제작에 직접 관여했다.

이러한 효명세자의 힘은, 숙종 이후 정비(정실부인)에게서 태어난 적장자 혈통이라는 데 있다. 그동안 서자 출신의 대군들이 왕위를 계승했으나 효명세자만큼은 안동김씨 가문의 순원왕후의 장자였다. 여기에 정조대왕이 낙점한 노론세력 조만영의 딸인 풍양조씨와 국혼을 치르며 그 힘이 더욱 강화된다.

연경당은 이곳 사랑채의 당호이며 이 집 전체를 가르키는 이름이다. 사대부가 집주인의 일상 거처로 독서, 휴식, 손님접대의 공간이다.  (사진_안나겸 기자)
연경당은 이곳 사랑채의 당호이며 이 집 전체를 가르키는 이름이다. 사대부가 집주인의 일상 거처로 독서, 휴식, 손님접대의 공간이다. (사진_안나겸 기자)

하지만 순조의 대리청정을 맡은 지 3년만인 1830년에 효명세자가 급서하면서 왕권강화라는 청사진은 폐기된다. 이후 왕위는 제24대 헌종에게 이어졌고 8세의 어린 임금은 증조모인 대왕대비(순조의 정비,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을 받는다.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가문인 경주김씨의 세력이 이때에 와서는 순조의 정비인 순원왕후 안동김씨가문에 이양되고, 그 후에는 효명세자(추종왕 익종)의 정비인 신정왕후 풍양조씨에게 넘어가 세도정치 시대가 열린다. 일명 조선왕조의 몰락이다.

이후 신정왕후 풍양조씨는 요절한 효명세자(추존왕 익종)과 달리 83세까지 장수하면서 아들인 헌종이 8세에 즉위하였으나 수렴청정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849년 헌종이 죽고, 철종이 왕위를 계승한 데 이어 1857(철종 8) 순원왕후 안동김씨가 별세하자 대왕대비가 되어 왕실 최고 어른이 된다.

그리고 1863년 철종 승하 후에는 영조의 현손인 흥선군 이하응의 차남인 이명복을 효명세자(익종)과 자신(신정왕후)의 양자로 삼아 왕위를 계승한다. 이어 제26대 왕이 된 고종은 12세 나이로 3년간 신정왕후 풍양조씨의 수렴청정을 받는다.

사랑채 뒤뜰(사진_안나겸 기자)
사랑채 뒤뜰(사진_안나겸 기자)
사랑채 앞뜰(사진_안나겸 기자)
사랑채 앞뜰(사진_안나겸 기자)

창덕궁 후원 연경당에서 은둔의 삶을 산 순조

23대 순조는 조선왕조에서 매우 슬픈 가계도를 가지고 있다. 부친 정조대왕 이산(李祘)과 수빈박씨(현목수비) 사이에서 이공(李玜)’11세에 부친 정조대왕의 갑작스런 승하로 왕위에 등극한다. 이어 정비인 순원왕후에게 24녀를 낳고, 숙의박씨에게 1녀를 낳는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순조보다 먼저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

특히 적장자인 효명세자(추존왕 문조, 1809~1830)21세에, 적장녀 명온공주(明溫公主, 1810~1832)22세에, 적차녀 복온공주(福溫公主, 1818~1832)14세에, 적삼녀 덕온공주(1822~1844)22세에 사망한다. 그중 덕온공주는 순조가 승하한 1834년까지 살아 있다가 10년 후 사망한다. 정비에게서 태어난 조선왕조 마지막 공주다.

그 외에 적차자 왕자는 18202~5월까지 태어난 지 3개월만에 사망했다. 그리고 후궁인 숙의박씨 사이에서 태어난 서장녀 영온옹주(永溫翁主, 1817~1829)12세에 단명한다.

농수정((濃繡亭)은 선향재 뒷뜰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정자로 독서와 휴식 공간이다. 농수는 짙은 빛을 수 놓는다는 뜻이며 겹처마로 지붕 한가운데에 절병통을 놓았다.(사진_안나겸 기자)
농수정((濃繡亭)은 선향재 뒷뜰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정자로 독서와 휴식 공간이다. 농수는 짙은 빛을 수 놓는다는 뜻이며 겹처마로 지붕 한가운데에 절병통을 놓았다.(사진_안나겸 기자)

순조는 선대왕들에 비해 혈통 면으로 매우 우세했다. 정비에게서 태어난 적장자로 왕실 내 권한이 막강했다. 또한 외모와 재능, 학식과 정치적 판단도 뛰어나 정조대왕의 총애를 받았다. 하지만 젊은 대왕대비 정순왕후에 눌려 국정을 제대로 펴지 못했고, 재위하는 동안 기아와 홍경래의 난으로 위축되어 지독할 만큼 무기력함을 보였다.

또한 개인적으로 질병을 달고 살았으며 자녀 24녀 중 5남매의 죽음을 목도했다. 순조 때에 궁궐에 화재가 유독 많이 발생했다. 1803(순조 3) 창덕궁 인정전에 불이 나서 전소되었고, 1829(순조 29)에는 경희궁에 불이 나서 융복전, 회상전, 집경당, 사현각 등 상당수의 전각이 전소되었다. 1830(순조 30)에는 창경궁의 환경전에서 불이 나 통명전, 함인정, 경춘전 등 400여 칸의 전각이 전소되었다. 이어 1833(순조 33)에는 또 다시 창덕궁에 불이 나서 희정당, 대조전, 징광루, 옥합당, 양심합 등 370여 칸이 전소되었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에는 순조에 대해 왕의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졌다고 했다.

기오현과 경운거(의두합 일대)(사진_안나겸 기자)
기오현과 경운거(의두합 일대)(사진_안나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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