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자산 시장, 제도권 금융으로 재편…한국은 규제 공백 속 경쟁력 시험대
- 미국·유럽은 스테이블코인과 토큰증권 제도화 가속…국내 디지털자산기본법은 여전히 협의 단계 - 원화 스테이블코인·법인 투자·RWA 시장 확대가 핵심 변수…투자자 보호와 금융혁신 균형 필요
[시사매거진 = 주성진 기자] 글로벌 가상자산 시장이 단순한 암호화폐 거래 중심에서 스테이블코인과 토큰증권, 실물연계자산(RWA)을 포괄하는 새로운 금융시장으로 변화하고 있다. 주요국이 디지털자산의 발행과 유통, 보관, 투자자 보호를 위한 제도 정비에 나서면서 관련 산업의 경쟁력은 기술력뿐 아니라 법적 안정성과 금융 인프라에 의해 좌우되는 양상이다.
반면 한국은 가상자산 시장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제도적 불확실성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디지털자산기본법 제정이 지연되면서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 법인 거래 허용, 거래소 인가체계 등 주요 정책의 방향이 명확하게 확정되지 않은 상황이다.
27일 금융권과 가상자산 업계에 따르면 국내 디지털자산 시장의 주요 현안은 2단계 입법 추진과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 제도화, 디지털자산 관련 금융상품 확대 등으로 압축된다.
지난 8일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이억원 금융위원장은 디지털자산기본법 정부안에 대해 막바지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구체적인 국회 제출 일정은 제시하지 않았다.
현재 국내 가상자산 규제의 중심은 2024년 7월 시행된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이다. 이 법은 이용자 예치금과 가상자산 보호, 불공정거래 금지 등 투자자 보호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가상자산 발행과 사업자 인가, 스테이블코인 준비자산 관리 등 시장 전반의 제도적 기준은 추가 입법이 필요한 영역으로 남아 있다.
문제는 글로벌 디지털 금융시장의 변화 속도가 국내 제도 정비보다 빠르다는 점이다.
미국은 제도화 가속…가상자산의 금융시장 편입 확대
미국은 가상자산을 둘러싼 규제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한 제도 정비에 속도를 내고 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지난 10월 1일 투자자문사와 규제 대상 펀드의 가상자산 보관 관련 규정 개정안을 제안했다. 일정한 요건을 충족하는 경우 자체 보관을 허용하고 주 정부 인가 신탁회사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 등이 포함됐다.
앞서 9월에는 일정 조건을 충족하는 토큰화 증권 거래 방식에 대해 한시적인 규제 면제를 부여하는 조치도 발표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블록체인 기술을 기존 증권시장 인프라와 연결하려는 정책적 변화로 해석된다.
스테이블코인 시장에서도 제도화가 진행되고 있다. 달러 가치에 연동되는 스테이블코인은 가상자산 거래를 위한 결제 수단을 넘어 국제 송금과 기업 간 결제, 디지털 금융서비스의 기반으로 활용 영역을 넓히고 있다.
다만 스테이블코인 이용자에 대한 보상 지급을 둘러싸고 미국 은행권과 가상자산 업계 간 이해관계도 충돌하고 있다. 예금 이탈 가능성을 우려하는 은행권과 새로운 금융서비스의 경쟁을 강조하는 가상자산 업계가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이는 것이다.
이는 가상자산 산업이 기존 금융시스템과 별도로 성장하는 단계를 지나 은행과 증권사, 자산운용사 등 전통 금융기관의 사업영역과 직접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원화 스테이블코인 도입 논쟁…발행 주체와 금융안정이 핵심
국내 디지털자산 산업에서 주목받는 쟁점은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제도화다.
스테이블코인은 법정화폐 등 특정 자산의 가치에 연동되도록 설계된 디지털자산이다. 가격 변동성이 큰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과 달리 일정한 가치를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준비자산의 건전성과 상환 구조에 따라 위험이 발생할 수 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제도권에서 발행된다면 온라인 커머스와 해외 결제, 디지털 콘텐츠 구독, 플랫폼 정산 등에서 새로운 결제 인프라로 활용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발행 주체를 은행 중심으로 제한할 것인지, 일정한 자본금과 준비자산 요건을 충족하는 핀테크 기업에도 허용할 것인지를 놓고 의견이 갈리고 있다.
은행 중심 모델은 기존 금융감독 체계와 지급결제 인프라를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 비은행 기업에 대한 개방을 강조하는 측은 혁신기업의 시장 진입과 경쟁 확대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금융당국 역시 발행 주체와 인가 요건, 거래소 지배구조 등을 핵심 검토 사항으로 다루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원화 스테이블코인 제도화는 단순히 새로운 코인을 발행하는 문제가 아니다. 원화 기반 디지털 결제의 활용 범위와 금융 안정성, 이용자 보호 및 국내 플랫폼 산업의 경쟁력까지 연결되는 사안이다.
특히 준비자산을 어떻게 보관하고 외부 감사를 통해 이를 검증할 것인지, 이용자가 원화로 상환을 요구할 때 이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가 제도의 신뢰성을 결정할 주요 기준이 될 전망이다.
토큰증권·RWA 확대…부동산과 기업 자산도 디지털화
가상자산 산업의 또 다른 변화는 실물연계자산(RWA)의 확대다.
RWA는 부동산과 채권, 펀드 등 실물 또는 전통 금융자산과 연계된 권리를 블록체인 기반 토큰으로 표현하거나 관리하는 구조를 의미한다.
토큰증권(STO)은 이 가운데 증권에 해당하는 권리를 분산원장 기술을 활용해 발행하거나 관리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기술이 제도적으로 활용되면 자산의 소액 단위 투자, 거래 및 권리 관리의 효율화, 결제·정산 자동화 등 새로운 금융서비스를 구현할 가능성이 있다.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토큰화 기술을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확대되면서 관련 제도와 인프라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
지난 8일 국정감사에서는 국내 토큰증권과 RWA 시장의 제도화가 늦어질 경우 해외 금융시장과의 경쟁에서 불리해질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다만 자산의 토큰화가 해당 자산의 가치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토큰에 연결된 법적 권리가 무엇인지, 기초자산을 누가 보유하고 관리하는지, 투자자가 실제로 어떤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
또한 일반 유틸리티 토큰과 증권형 토큰은 법적 성격이 다르다. 기업이 토큰을 발행하더라도 투자수익이나 지분에 대한 권리를 부여하는 구조라면 자본시장법 등 관련 규제의 적용 여부를 검토해야 한다. 디지털자산의 시장 확대만큼 법적 구조의 명확성이 중요한 이유다.
가상자산 과세와 법인 투자 허용…국내 시장의 향방은
가상자산 과세 역시 국내 시장의 불확실성을 키우는 요인 가운데 하나다.
현행 법률상 가상자산 양도·대여 소득에 대한 과세는 2027년 1월 1일 시행될 예정이다. 연간 250만원을 초과하는 과세 대상 소득에 대해 소득세와 지방소득세를 합산한 22%의 세율이 적용되는 구조다.
다만 정치권에서 추가 과세 유예 법안이 발의되면서 실제 시행 여부는 향후 입법 논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가상자산 법인 거래의 단계적 허용 역시 주요 과제다. 법인 거래가 확대되면 기업의 자금 운용과 디지털자산 서비스 개발 등에 새로운 수요가 형성될 수 있지만, 자금세탁방지와 내부통제, 회계처리, 자산 보관 및 시장 변동성에 대한 관리체계가 필요하다.
투자자 보호 측면에서는 불공정거래와 시세조종, 미공개정보 이용 등 기존 금융시장에서 문제로 지적돼 온 행위에 대한 감시도 강화해야 한다.
가상자산 시장은 거래소의 전산시스템과 지갑 보안, 유동성 관리가 긴밀하게 연결돼 있어 거래소 또는 수탁기관의 문제가 이용자 자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특성을 가진다.
따라서 시장 확대를 위한 규제 완화와 투자자 보호를 위한 감독 강화는 서로 배치되는 목표라기보다 함께 추진해야 할 제도적 과제로 볼 수 있다.
디지털자산 산업의 경쟁력, 신뢰할 수 있는 제도에서 결정된다
가상자산 산업의 경쟁 구도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등 주요 가상자산을 중심으로 형성된 투자시장은 스테이블코인, 토큰증권, 실물연계자산 등 다양한 금융서비스로 확장되고 있다.
그러나 시장 확대가 곧바로 투자자의 수익이나 산업의 안정적 성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가상자산 가격은 통화정책과 글로벌 유동성, 기관투자자 자금 흐름 등에 영향을 받을 수 있으며, 신규 토큰은 법적 성격과 유통 구조, 발행자의 신뢰도에 따라 상당한 위험을 수반할 수 있다.
한국의 과제는 혁신을 촉진하면서도 시장의 신뢰성을 확보할 수 있는 규율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스테이블코인 발행 요건과 준비자산 관리, 거래소 인가 및 감독, 법인 투자 허용 기준, 토큰화 자산의 권리 보호 등이 명확해질수록 기업과 투자자가 예측 가능한 환경에서 사업을 추진할 수 있다.
특히 해외 주요국과 규제체계가 달라 발생할 수 있는 사업자의 법적 불확실성을 해소하는 한편, 국내 금융소비자에게 필요한 보호 장치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디지털자산 산업의 미래는 얼마나 많은 토큰을 발행하고 거래하느냐가 아니라, 그 토큰이 어떤 권리와 가치를 담고 있으며 이를 신뢰할 수 있는 제도가 뒷받침하는가에 달려 있다.
가상자산이 투기적 거래 수단을 넘어 지속 가능한 디지털 금융 인프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기술혁신과 법적 책임, 투자자 보호가 동시에 작동해야 한다.
한국 디지털자산 시장이 이러한 전환에 성공할 수 있을지, 정부와 국회의 2단계 입법 논의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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