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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현호 칼럼] 서울과 도쿄에 대한 가볍게 지나갈 이야기(4)

열 번 정도 생각해 본 참을 수 있는 사적인 고찰

7화. 31미터의 천장과 숫자가 가린 본질도시는 언제나 위를 욕망합니다. 더 높이, 더 멀리, 더 많이 보려는 욕망은 어쩌면 인간의 본능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모든 도시가 그 욕망을 같은 방식으로 허용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도시는 스스로 보이지 않는 천장을 만들고, 어떤 도시는 그 천장을 부수고 올라가려 합니다. 도쿄와 서울의 차이는 높이를 대하는 태도에서 다시 한번 흥미롭게 갈라집니다. 높이를 둘러싼 규제는 단순한 건축 법규가 아니라, 그 도시가 권력과 성역을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드러내는 가장 노골적인 언어이기 때문입니다.도쿄 마

과거 조선 왕들의 상태를 모신 종묘. (사진_셔터스탁)
과거 조선 왕들의 상태를 모신 종묘. (사진_셔터스탁)

7화. 31미터의 천장과 숫자가 가린 본질

도시는 언제나 위를 욕망합니다. 더 높이, 더 멀리, 더 많이 보려는 욕망은 어쩌면 인간의 본능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모든 도시가 그 욕망을 같은 방식으로 허용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도시는 스스로 보이지 않는 천장을 만들고, 어떤 도시는 그 천장을 부수고 올라가려 합니다. 도쿄와 서울의 차이는 높이를 대하는 태도에서 다시 한번 흥미롭게 갈라집니다. 높이를 둘러싼 규제는 단순한 건축 법규가 아니라, 그 도시가 권력과 성역을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드러내는 가장 노골적인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도쿄 마루노우치의 빌딩들은 오랫동안 마치 보이지 않는 유리 천장에 짓눌린 듯 약속이나 한 듯 약 31미터, 일본의 옛 단위로 100척의 높이를 넘지 않았습니다. 물론 당시 건축기준법의 제한도 있었지만, 법적 제한과 더불어 개발업자들을 더욱 강력하게 통제한 것은 사회 전반에 공유된 암묵적 인식, 바로 '미오사게(見下し)' 금기였습니다. 내려다봄을 금지한다는 뜻의 이 단어는 신성한 공간을 내려다보는 행위를 경계하는 강력한 사회적 규범으로 작동했습니다. 신성한 천황이 계신 숲을 감히 내려다보는 높이로 건물을 짓는 것은 불경하다는 인식이 자본의 욕망을 제어한 것입니다.

31미터는 황궁 숲의 나무 높이와 비슷하여, 건물 옥상에 올라도 황궁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지 않는 마지노선이었습니다. 경제가 고도 성장하던 시기에도, 땅값이 폭등하던 버블 경제 시기에도 이 원칙은 오랜 기간 유지되었습니다. 자본은 더 높이 올리고 싶었지만 권위 앞에서는 스스로 멈춰 섰습니다. 높이를 포기한 대신 질서를 택한 것입니다. 도쿄는 이 '비효율'을 감수함으로써 스카이라인의 안정감과 중심의 신비감을 지켜냈습니다.

서울에도 높이를 규제하는 장치는 존재해 왔습니다. 문화재보호법은 국가지정문화재 주변을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으로 지정하여 관리합니다. 종묘의 경우 가장 핵심적인 규제는 바로 '앙각', 즉 올려다보는 각도에 대한 제한입니다. 종묘의 정전 월대에서 남쪽을 바라봤을 때, 정전 지붕의 유려한 기와 선 위로 남산의 푸른 능선이 가려지지 않고 보여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조망권 확보가 아닙니다. 종묘라는 공간이 가진 영혼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입니다. 종묘 정전 앞에 섰을 때, 우리의 시선은 낮은 담장을 넘어 숲을 지나 남산으로, 그리고 하늘로 자연스럽게 흘러가야 합니다. 그 시선의 흐름 속에서 자연과 건축, 인간과 신이 하나로 연결됩니다. 만약 그 사이에 거대한 콘크리트 장벽이 들어서서 시야를 가로막는다면, 종묘는 더 이상 열린 신전이 아니라 도심 속에 갇힌 답답한 유물이 되고 말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2023년 발표된 서울시의 세운재정비촉진계획은 이 빗장을 과감히 풀려 하고 있습니다. 종묘 바로 앞인 세운지구 일부 구역에 최고 약 170미터, 혹은 최근 언론 보도에 따르면 약 142미터에 달하는 고층 빌딩을 허용하는 방향의 안이 제시되어 논의되고 있습니다. 개발 찬성을 하는 분들은 묻습니다. "도쿄를 봐라. 도쿄역 주변 마루노우치에 200미터 빌딩이 들어서는데, 왜 종묘 앞은 안 되는가? 일본도 높이는데 우리만 규제에 갇혀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주장 뒤에 숨겨진 '범주(Category)의 오류'를 직시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들이 비교 대상으로 삼는 도쿄역은 근대화의 상징이자 역동적인 '기차역'입니다. 반면 종묘는 죽은 자들의 영혼이 머무는 정적인 '신전'입니다. 상업과 교통의 중심지인 기차역 주변에 적용된 고밀도 개발 논리를, 침묵과 엄숙함이 생명인 성역에 그대로 대입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비교일지 의문입니다. 축구장에 적용되는 규칙을 도서관에 강요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170미터냐 142미터냐 하는 숫자의 차이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100미터가 넘는 거대한 장벽이 들어서는 순간, 종묘 정전에서 바라보는 남산의 푸른 능선이 가려진다는 본질적인 결과는 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치가 조금 낮아진다고 해서, 500년 된 신전의 '시각적 완전성'이 훼손될 위험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가진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도쿄역이라는 맞지 않는 옷을 종묘에 입히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물어야 합니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국제적 약속'의 문제입니다. 도쿄의 황궁은 일본의 국가적 상징일 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아닙니다. 따라서 국제사회의 감시나 '유산 영향평가(HIA)'의 의무가 없습니다. 하지만 종묘는 1995년 등재된 인류 공동의 유산이며, 한국 정부는 유네스코와 약속한 '시각적 완전성'을 지킬 국제법적 의무가 있습니다. 유네스코의 규제를 받지 않는 도쿄의 사례를 가져와 세계유산인 종묘에 대입하는 것은, 글로벌 스탠더드를 따르는 게 아니라 국제적 신뢰를 저버리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도쿄의 자본이 권위 앞에서 스스로 고개를 숙여 31미터의 선을 지켰던 역사를 기억해야 합니다. 반면 지금 서울의 자본은 녹지 복원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앞세워, 과연 종묘 앞에 바벨탑을 쌓으려 하는 것은 아닐까요? 도쿄는 낮아짐으로써 중심을 높였지만, 서울은 높아짐으로써 중심을 가리려 하는 것은 아닌지 깊은 우려가 생깁니다. 이것은 단순히 건물의 높이 문제가 아니라, 도시가 무엇을 올려다보게 할 것인가에 대한 철학의 문제입니다. 남산을 올려다보던 시선이 빌딩의 벽에 막히는 순간, 서울이 잃어버리는 것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도시의 품격 그 자체일지도 모릅니다.

일본 도쿄도 치요다구청 공식 도시계획도 지도 정중앙, 개발이 불가능한 '녹색 공백'인 황궁(고쿄)과 그 우측에 붉은색 빗금으로 표시된 '도시재생특별지구(마루노우치·오테마치)'가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지도는 도시가 무엇을 비우고 무엇을 채웠는지 정직하게 보여준다. (사진_커뮤니티 캡처)
일본 도쿄도 치요다구청 공식 도시계획도 지도 정중앙, 개발이 불가능한 '녹색 공백'인 황궁(고쿄)과 그 우측에 붉은색 빗금으로 표시된 '도시재생특별지구(마루노우치·오테마치)'가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지도는 도시가 무엇을 비우고 무엇을 채웠는지 정직하게 보여준다. (사진_커뮤니티 캡처)

8화. 지도의 비밀, 붉은 빗금과 공중권의 진짜 의미

도시는 말로 설계되지 않습니다. 도시계획 지도 위에 그어진 선과 색은 오랫동안 도시의 몸에 남아 그 운명을 규정합니다. 도쿄와 서울의 차이는 바로 이 지도 위에서 가장 정직하고 투명하게 드러납니다. 무엇을 칠하고, 무엇을 끝내 비워두는가. 그 선택이 도시의 미래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도쿄도 치요다구의 도시계획도를 펼치면 시선은 자연스럽게 정중앙으로 끌려갑니다. 지도 한가운데에는 어떤 색으로도 채워지지 않은 거대한 녹색 공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황궁입니다. 이 공백은 단순한 녹지가 아니라, 사실상 개발과 고밀도가 허용되지 않는 강력한 비움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그 바로 옆, 마루노우치와 오테마치 구역에는 붉은색 빗금이 선명하게 그어져 있습니다.

이 붉은 빗금의 정체는 2002년 제정된 도시재생특별조치법에 근거한 도시재생특별지구입니다. '잃어버린 10년'이라 불리는 장기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고이즈미 내각은 도심 규제를 대폭 완화하는 승부수를 던졌습니다. 정부가 마루노우치를 긴급정비지역으로 지정하자, 오랜 기간 약 31미터 수준으로 유지되던 높이의 족쇄가 풀렸고 용적률 상한은 기존 상한을 크게 넘어서는 수준으로 대폭 상향 조정되었습니다. 언론은 이를 두고 "규제 완화가 만든 기적"이라 칭송하며 서울도 규제를 풀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도쿄의 사례에서 정말 주목해야 할 것은 마천루를 올리는 토목 기술이 아니라, '공중권(Air Rights) 거래'라는 정교한 제도의 활용법이 아닐까요? 도쿄역이 주변 빌딩 숲 속에서도 낮고 고풍스러운 원형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바로 도쿄역 상공의 '짓지 않은 권리(용적률)'를 주변 빌딩에 거래·이전하는 제도를 활용했기 때문입니다. 도쿄역은 그 수백억 엔 규모의 매각 대금으로 붉은 벽돌 역사를 원형 그대로 복원해냈고, 주변 건물은 그 권리를 사들여 높이를 얻었습니다. 즉, 도쿄의 공중권은 개발을 위한 수단이기에 앞서, '보존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는 수단으로 작동했습니다.

흔히 일본의 도시 재생을 '아름다운 사회적 합의'의 결과물로만 포장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철저한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 시스템이 있었습니다. 민간 개발자들은 완화된 용적률 인센티브를 얻는 대가로 건물 저층부를 시민을 위한 광장으로 비우고, 역사적 가치가 있는 근대 건축물을 복원하며, 쾌적한 지하 보행로를 뚫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규제 완화가 아니라, 공공성을 담보로 한 엄격한 계약이었습니다.

서울의 세운지구에도 이 지혜가 절실히 필요해 보입니다. 종묘 앞을 고층으로 개발해야만 사업성이 나온다는 주장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릴 수 있습니다. 종묘 앞 세운상가 일대의 토지주들에게 '이곳을 저층으로 비워두는 대신, 그 높이의 권리를 종묘 경관에 영향을 주지 않는 후면부나 다른 지역으로 팔 수 있는 권리(TDR)'를 부여하는 방식은 어떨까요?

현재 논의되는 서울시의 결합 개발 방식도 이와 유사해 보이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우려됩니다. 도쿄는 '도쿄역(근대건축)'의 공중권을 팔았지만, 서울은 자칫 '종묘(세계유산)' 앞의 경관을 거래 대상으로 삼으려 한다는 점입니다. 바닥에 녹지를 만들기 위해 하늘의 경관을 내어주는 것은 등가교환이 될 수 없습니다. 땅의 공원은 언제든 다시 만들 수 있지만, 거대한 빌딩 장벽에 의해 한 번 가려진 500년 역사의 시각적 맥락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쿄의 지도는 명확합니다. 황궁은 거래 불가능한 성역이고, 그 주변은 규칙 있는 거래의 장입니다. 이 구분이 제도를 지탱합니다. 반면 서울의 지도는 다소 혼란스러워 보입니다. 종묘를 보호한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그 앞을 고밀도로 개발하려는 모순된 계획들이 겹쳐 있습니다. 보호가 전제가 아니라 협상의 카드가 되는 순간, 성역은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서울은 지금 도쿄의 겉모습인 높이만 베끼려다, 정작 도쿄가 지켜낸 정신적 제도는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질문해야 합니다. 녹지라는 달콤한 사탕을 얻기 위해 역사성이라는 뼈대를 내어주는 것은 너무 위험한 도박이 아닐까요? 단순히 "도쿄도 높였으니 우리도 높이자"는 식의 1차원적인 접근보다는, 그들이 어떻게 '보존'과 '개발'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는지, 그 시스템의 정교함을 벤치마킹해야 할 때입니다. 지도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종묘 주변에 그어진 수많은 선들은, 서울이 아직 무엇을 끝까지 비워둘지 결정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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