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회장 "AI 시대, 기존 경제모형으론 한계"…한국 경제 4대 해법 제시
서울대 경제학부생 450여 명 대상 특강…미·중 경쟁 속 산업구조 재편 진단 'AI 네이티브 국가' 전환·한일 경제연대·사회적 가치 보상·성장 유인체계 제안
[시사매거진 한창기 선임기자]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인공지능(AI) 확산과 미·중 패권 경쟁으로 세계 경제질서가 재편되는 상황에서 한국의 성장 전략도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5일 서울대학교 경제학부에 따르면 최 회장은 이날 재학생 등 450여 명을 대상으로 열린 특강에서 '인공지능(AI) 시대, 세계 경제 패러다임 변화와 대한민국의 비전'을 주제로 한국 경제가 직면한 구조적 위기와 대응 방안을 밝혔다.
최 회장이 서울대 경제학부 학생들과 만난 것은 2022년 4월 '시장의 변화, 미래의 기업'을 주제로 강연한 이후 약 4년 6개월 만이다.
그는 강연에서 30년 넘는 기업 경영 경험을 언급하며 최근 경제환경의 변화는 과거와 속도와 규모에서 차원이 다르다고 진단했다. 특히 전통적인 수요·공급 중심의 경제모형만으로는 AI와 디지털 기술이 주도하는 시장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디지털 경제에서는 개별 소비자와 기업의 관계가 중요해지고, 기술 발전이 산업 간 경계를 허물면서 경제활동의 방식 자체를 바꾸고 있다는 설명이다.
세계 경제의 구조적 변화도 주요 화두로 다뤘다. 최 회장은 지난 30년간 미국의 소비와 중국의 제조업을 중심으로 형성된 글로벌 분업체계가 흔들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은 미국의 투자 확대 요구와 중국의 기술 추격이라는 이중 압박에 직면했다고 평가했다.
AI를 둘러싼 경쟁에 대해서는 단순한 기술혁신을 넘어 산업 전반의 주도권을 결정하는 자본 경쟁으로 규정했다. 대규모 투자가 집중되는 가운데 반도체와 에너지, 데이터센터 등 여러 산업에서 기술 변화가 동시에 진행되고 서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내다봤다.
국내 경제 여건에 대해서도 우려를 나타냈다. 저성장과 부채 증가로 성장 기반이 약해진 상황에서 미·중 경쟁과 AI 산업혁명까지 겹쳐 기존 정책의 부분적인 개선만으로는 대응하기 어렵다는 판단이다.
최 회장은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향으로 '뉴 캐피탈리즘(신자본주의)', 'AI 네이티브 국가', '한·일 경제연대', '인센티브 시스템' 등 네 가지 전략을 제시했다.
먼저 뉴 캐피탈리즘은 사회문제 해결을 경제활동의 영역으로 확대하는 구상이다. 기업이 이윤을 창출하고 세금을 납부하면 정부가 복지와 국방 등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존 구조만으로는 복잡해지는 사회적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민간이 사회문제 해결에 기여한 성과를 경제적 보상과 연결하는 체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활동에 실질적인 보상을 제공해 공공부문과 민간의 역할을 확장하자는 취지다.
두 번째 해법인 AI 네이티브 국가는 인공지능을 산업과 국가 운영의 핵심 기반으로 삼아 한국을 '지능 수출국'으로 전환하자는 전략이다.
최 회장은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 젠슨 황이 제시한 AI 산업의 5개 계층인 에너지, 반도체, 데이터센터, 거대언어모델(LLM), 애플리케이션을 소개하며 각 분야의 경쟁력 확보가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이는 반도체를 비롯한 기존 산업 경쟁력을 활용하면서 AI 생태계 전반으로 한국의 역할을 넓혀야 한다는 의미다. 특정 기술이나 제품에 의존하기보다 산업별 경쟁력을 연결해 국제시장에서 영향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구상이다.
세 번째로 제시한 한·일 경제연대는 미·중 중심의 국제질서에서 한국의 경제적 선택지를 확대하기 위한 방안이다.
최 회장은 국내총생산(GDP)이 약 2조 달러인 한국과 4조 달러인 일본의 경제적 역량을 결합하면 단순한 규모의 합산을 넘어서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양국이 공통으로 겪는 저출산과 고령화에 따른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데도 협력의 여지가 있다고 봤다.
자유무역체제가 약화하는 상황에서 국가 간 협력의 범위를 넓혀 대외 협상력과 경제적 대응 능력을 높여야 한다는 설명이다.
마지막으로 기업의 성장을 촉진하는 인센티브 시스템 개편을 주문했다. 기업 규모가 커질수록 규제 부담이 증가해 중소기업이 성장을 주저하는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 회장은 기업이 성장에 따른 불이익을 우려하지 않고 사업을 확대할 수 있는 제도적 환경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과거 고도성장기에 형성된 정책과 규제체계를 현재의 산업환경에 맞게 재설계해야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하다는 판단이다.
강연 이후에는 AI와 반도체, 에너지 산업을 비롯한 주요 현안을 놓고 학생들과 질의응답을 진행했다.
AI 활용이 일상과 기업 현장으로 확산하는 상황에서 필요한 인재 육성 방향을 묻는 질문에는 직접적인 경험과 도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최 회장은 정해진 지식을 습득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것을 스스로 설계하고 실행하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실패한 시도도 경험으로 축적하고 도전을 이어갈 때 새로운 시스템과 경쟁력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정민 서울대 경제학부 학부장은 이번 특강이 학생들에게 경제학 이론과 실제 산업현장의 변화를 연결해 생각하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번 강연은 AI 기술의 발전이 개별 산업의 경쟁을 넘어 국가 경제구조와 국제협력 체계까지 바꾸고 있다는 점에 초점이 맞춰졌다. 최 회장이 제시한 네 가지 전략이 실질적인 성장동력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기술 경쟁력 확보와 함께 기업 규제, 사회적 보상체계, 국가 간 경제협력에 관한 구체적인 정책 설계가 뒷받침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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