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친척이며 문신인 ‘강희맹의 애민(愛民) 연꽃밭’

[시사매거진315호]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꽃 중의 하나인 ‘연꽃’은 흐리고 탁한 저수지(貯水池)나 진흙탕 속에 피어나면서도 매우 청아하고 기품 있는 자태로 세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희거나 연분홍의 수줍음과 청초함을 그대로 간직한 꽃잎과 더불어 넓고 평평한 잎새는 물빛 청량감을 더한다.

이러한 연꽃을 들판 가득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조선 세조 때 명나라 사신으로 남경을 다녀온 강희맹이 ‘전당홍’이라는 연꽃을 가장 처음 심은 시흥시 하중동 소재의 <관곡지(官谷地)>가 바로 그곳이다. 과거 농경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둠벙(농수지)과 더불어 호저벌이 잘 보존된 시흥시 농가에서 세조의 이종사촌이며 조선 전기 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강희맹의 애민정신(愛民精神)을 엿볼 수 있다.

강희맹 고택(사진_안나겸 기자)
강희맹 고택(사진_안나겸 기자)

조선 전기 최고의 문장가인 강희안·강희맹 형제

조선 전기 최고의 문장가로 명성이 높은 강희안(姜希顏, 1419년~1464년)과 강희맹(姜希孟, 1424~1483) 형제는 부친 강석덕(姜碩德)과 모친 청송심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강회백(姜淮伯)이고, 모친은 청송심씨로, 영의정 심온(沈溫, 1375?~1418)의 차녀이다. 특히 세종대왕은 이모부고, 그의 정비 소헌왕후 심씨는 이모이며, 세조는 이종사촌이다.

이렇게 조선 전기 막강한 왕비 친가의 인척이 되어 시와 글씨, 그림에 모두 뛰어난 ‘삼절(三絶)’로 명성이 높은 두 형제는 문장 외에도 정치와 예술 분야에 두각을 나타내었다. 특히 형 강희안(姜希顔, 1417~1464)은 명문장가로 중국에까지 이름을 널리 알렸고, 동생 강희맹은 노련한 정치가로서 3차례나 공신에 책봉되었다.

특히 강희맹은 이종사촌인 세조의 각별한 총애를 받아 정치 활동에 활발했다. 경연검토관, 세자보덕(世子輔德), 공조참판, 이조참판, 예조판서, 형조판서 등을 역임했으며 1466년‘발영시(拔英試)’에서는 임금의 총애에 정점을 찍는다. 보통 현직 중신과 문무백관을 대상으로 임시 실시한 과거에서 김수온이 이미 장원하여 그 외 34인과 함께 수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참가하지 못한 강희맹을 위해 다음날 다시 시험을 치르도록 해 추가로 강희맹 등 6인을 더 선발한 것이다.

강희맹 사위 권만형 종중 묘소_안동권씨 화천군파 종중 묘소(사진_안나겸 기자)
강희맹 사위 권만형 종중 묘소_안동권씨 화천군파 종중 묘소(사진_안나겸 기자)

이러한 세조의 특별한 애착 후에도 예종, 성종에 이르는 3대 임금의 굳건한 신임을 누렸던 인물로 기록된다. 그중 성종 때에는 임금의 총애와 신임 속에 원자(元子)인 연산군을 교육하였음은 물론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궁극에는 종1품 좌찬성에 이른다.

이러한 강희맹의 능력은 세조에서 성종 대에 이르는 편찬 사업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세조 때 <신찬국조보감(新撰國朝寶鑑)>과 <경국대전> 편찬을 비롯해 사서삼경의 언해 사업에 참여하였고, 성종 때는 <동문선> <동국여지승람> <국조오례의> <국조오례의서래> 등의 편찬에 참여하며 박학다식과 문장력을 발휘했다.

이뿐만 아니라 강희맹은 개인 저작물 외에 관료로서 문학적 감각을 살려 농촌사회에 전승되고 있는 민요와 설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촌담해이(村談解灑)>을 지었으며, 농서인 <금양잡록(衿陽雜錄)>을 기록하여 후대에 곡식의 품질과 모양의 구별, 씨 뿌리기에 적당한 시기, 작업의 순서 등을 전수하게 했다.

강희맹 종택(사진_안나겸 기자)
강희맹 종택(사진_안나겸 기자)

강희맹의 집에서 자란 어린 연산군 & 서거정과 친분

강희맹의 부인은 순흥안씨다. 조선 개국공신 집안인 안숭효(安崇孝)의 딸로 1442년(세종 24)에 결혼하였다. 그녀는 청렴하고 성실하여 행정실무에 빈틈이 없고 민정에 관심이 많은 부친의 가르침으로 인해 매우 어진 성품을 지녔다.

그로 인해 성종은 어린 연산군을 강희맹 집에 보내 원자를 보호하는 중책을 맡기기도 했다. 특히 1477년(성종 8) 3세의 원자가 병이 나자 성종은 역시 강희맹의 집에 보내 치료하게 하였는데 강희맹의 부인 순흥안씨의 정성이 극진했다. 그녀의 도움으로 강희맹은 성종의 신임을 더욱 굳게 받을 수 있었다.

1478년(성종 9) 성종은 강희맹의 집으로 원자를 호위하는 군사들을 보냈고, 원자가 준마(駿馬)를 좋아하여 그의 집으로 말 1필을 내려주기도 했다. 1482년(성종 13)에도 6세의 원자가 강희맹의 집에 머물고 있으며, 강희맹과 연산군 사이의 각별한 인연은 그의 문집 <사숙재집(私淑齋集)>에 ‘연산사삼층(燕山辭三疊)’의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관곡지 밖 연꽃테마파크(사진_안나겸 기자)
관곡지 밖 연꽃테마파크(사진_안나겸 기자)

또한 연산군 역시 왕이 된 후 강희맹이 도움을 준 것을 기억해 <연려실기술>에 기록했다. “그때 매양 정원의 소나무 밑에서 놀았는데 왕위에 오르고 나자 진시황이 소나무 다섯 그루에 대부의 벼슬을 준 것처럼 그 소나무에 벼슬을 주고 금띠를 둘러주고, 또 그 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는 말에서 내리게 하였는데 지금의 순청동(巡廳洞)이 바로 그 피마병문(避馬屛門)이라 한다”는 기록이 있다.

그 외에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등 6명의 임금을 섬긴 의정부 좌찬성 서거정(徐居正, 1420~1488)과의 친분은 매우 돈독하다. 본래는 그의 형 강희안과 함께 진사시에 합격하며 친분을 쌓았으나 후에 동생인 강희맹이 진사시에 합격한 후 왕명으로 편찬 사업에 주력하면서 서로 각별한 친분을 나누게 된다.

당시 세조는 <경국대전>을 편찬하며 예닐곱 명의 대신들에게 업무를 분담해 의정할 것을 명하였는데 이때 강희맹과 서거정이 함께 선발되었다. 서거정은 강희맹에 대해 “의론은 정밀하고 심오하며 환하고 원대하였으므로, 왕이 자주 불러 물어보면 아뢰는 대답이 뜻에 맞으니, 같은 반열에 있는 사람들이 감복하였다”고 회고한다.

이들은 1478년(성종 9)에도 <동문선>을 편찬하고, 1481년에도 <동국여지승람> 편찬에 참여하여 핵심적인 역할을 맡는다.

관곡지 인근 당홍(연꽃) 연못군(사진_안나겸 기자)
관곡지 인근 당홍(연꽃) 연못군(사진_안나겸 기자)
관곡지 정자(사진_안나겸 기자)
관곡지 정자(사진_안나겸 기자)

시흥시 ‘관곡지’와 ‘전당홍’ 연꽃 유래

강희맹은 왕실의 외척일 뿐만 아니라 중앙의 고위 관직을 역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생활과 농업에 관심이 많았다. 관련된 책을 집필하기도 하고, 농업의 발전과 농민의 삶을 관심 깊게 연구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463년(세조 9) 중추원부사로서 진헌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일이 있다. 그는 돌아오는 길에 남경(南京, 현 난징시)에 있는 ‘전당지(錢塘池)’에 들러 당시까지 국내에 없던 ‘연꽃 씨’를 가지고 귀국하게 된다. 꽃이 희고 끝부분이 담홍색인 연꽃 종을 중국 전당지에서 가져온 것이라 하여 ‘전당홍(錢塘紅)’이라 불렀다.

강희맹은 이 연꽃을 안산군 초산면 하중리의 작은 연못(현 시흥시 하중동 관곡지)에 처음 심었는데 연꽃이 차츰 인근으로 널리 퍼지게 되어 농민이 대단위로 경작하게 되었다. 이러한 관곡지의 규모는 가로 23m, 세로 18.5m 정도이며 방지원도형(方池圓島型, 네모난 연못에 둥근 섬이 있는 형태)의 전통 연못 형태를 따르고 있다.

당시 <안산군읍지>에 의하면 이를 계기로 3년 뒤인 세조 12년(1466)부터 안산군의 별호를 ‘연성(蓮城)’ 즉 ‘연꽃의 고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후 ‘관곡지(官谷地, 향토유적 제8호)’는 강희맹의 자녀에게 균분 상속되었는데 그중 딸에게 분재되어 사위인 권만형(權曼衡)의 가문인 안동권씨 화천군파 종중에 승계된다.

이어 380여 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관곡지 연못에 수초가 무성하고 황폐해졌는데, 1844년(헌종 10)에 안산군수로 부임했던 권용정(權用正)이 집안 선조들의 고사를 확인하고 이듬해 봄 재건한다. 마을 장정들을 동원해 연못을 준설하고, 여름에 연꽃잎이 중국 전당지의 꽃과 같이 두 줄기로 피는 것을 확인했다.

이후 권용정은 당시 경기도 관찰사였던 이계조(李啟祚)에게 서목을 올려 이러한 사실을 보고하고, 연못의 관리를 위해 연지기 6명을 선발할 것을 청하였다. 그의 서목이 받아들여져 관곡지에는 하중리 주민 6명이 연지기로 선발되었으며 결원이 생길 때마다 마을 주민이 대체하도록 조치했다. 이러한 연지기는 각종 노역, 포세, 양곡세 등이 면제되는 특전이 있었으며 오로지 관곡지만 전담하도록 했다.

이렇듯 세심한 관리로 현재까지 전당홍을 기르는 관곡지는 권용정이 기록한 유래와 준설 경과, 연지기 배치 등을 정리한 1846년(헌종 12)의 <연지사적(蓮池事蹟)>과 <연지수치후보초(蓮池修治後報草, 연지를 수리한 뒤의 보고서)>로 전해지고 있다. 그 외 경기도 관찰사 이계조 사이의 <안산군수 서목>과 <안산군 완문>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관곡지의 전당홍 연꽃(사진_안나겸 기자)
관곡지의 전당홍 연꽃(사진_안나겸 기자)

시흥시 생태연못인 둠벙과 호조벌 관리

경기도 시흥시 하중동에서는 해마다 7월에서 8월이면 ‘향토문화제인 연성문화제(蓮城文化祭)’를 개최한다.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농학자였던 강희맹이 명나라에서 연꽃 씨를 가져와 이곳에 심은 뒤 널리 퍼지자 이 지역을 ‘연성(蓮城)’이라 부른 데 기초한다. 시흥시 관내의 연성초·연성중학교 등과 연성동 및 하중동 일대에 연성문화제(蓮城文化祭) 축제 부스를 마련하고 연꽃을 보러오는 관광객을 맞이한다.

특유의 희고 연분홍빛 나는 꽃잎에 뾰족한 것이 특징인 전당홍뿐만 아니라 여러 종류의 각종 연꽃을 함께 공개한다. 또한 강희맹의 사위 권만형의 후손들이 대대로 소유와 관리를 맡아온 관곡지를 함께 둘러볼 수 있도록 안내한다. 최근에는 관곡지 가까이에 약 3만 평에 이르는 연꽃농장이 들어서 아름다운 연꽃을 관망할 수 있게 한다.

그 외에 인근에는 생태연못(둠벙)이 있다. 논이나 밭의 한쪽에 물이 나는 곳을 파서 조그만 웅덩이를 만들어 놓은 곳으로써 논 생태계 유지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농수지다. 논의 생태계를 유지하며 지하수 함양, 홍수 조절 등의 역할 및 다양한 생물들의 서식 및 피난처, 먹이 공급 장소가 되는 곳이다.

방지원도형 연못(네모_둥근형)(사진_안나겸 기자)
방지원도형 연못(네모_둥근형)(사진_안나겸 기자)

또한 이곳에는 붕어, 개구리, 미꾸라지, 우렁이 등 다양한 어류와 꽃창포, 물카라, 디얼바타, 가시연 등 수생식물이 자라나고 있으며 많은 수서생물이 생태계를 유지하는 과정을 학습할 수 있도록 자연 친화적으로 개방돼 있다.

무엇보다 천연기념물 저어새 보호지로 ‘호조벌’이 있어 관심을 끈다. 호조벌은 300년 전 조선 경종 때(1721년) 재정 충당과 백성의 구호를 위해 150만 평의 갯벌을 간척지로 일구었던 시흥의 역사가 간직된 터전이다. 천연기념물 저어새가 찾아오는 호조벌은 역사와 자연 그리고 사람이 공존하는 생명의 땅으로 미래 세대에 물려주어야 할 시흥시의 보물로 소개되고 있어 흥미롭다.

호조벌(사진_안나겸 기자)
호조벌(사진_안나겸 기자)

 

저작권자 © 시사매거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