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E김찬우 교수)메타티칭의 시대, 끝까지 읽는 아이가 노벨상을 연다

[안현호의 시선] 너와 엄마 아빠를 생각하며 세상에 써 보내는 소리 없는 에세이

빈 책상, 차가운 바다, 그리고 별이 된 아이들이 우리에게 남긴 긴 침묵에 대하여

[시시사매거진 안현호 기자] 상실의 계절, 텅 빈 교실의 풍경바람이 제법 매서운 겨울의 초입입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매일 습관처럼 마음으로 빕니다."별이 된 대전 A초등학교 김A양의 엄마 아빠가 조금은 덜 슬프기를."2025년이라는 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참으로 아픈 기억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지난 2월이었죠. 대전의 한 초등학교 1학년 교실에서 8살 김A양의 시간이 영원히 멈췄습니다. 아이가 세상에서 부모님 다음으로 믿고 의지했던 사람, 담임 선생님 명모 씨(48)의 손에 들려 있던 것은 칭찬 스티커가 아닌 흉기였습니다."누구든

이미지 - 셔터스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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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사매거진 안현호 기자] 상실의 계절, 텅 빈 교실의 풍경

바람이 제법 매서운 겨울의 초입입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매일 습관처럼 마음으로 빕니다.

"별이 된 대전 A초등학교 김A양의 엄마 아빠가 조금은 덜 슬프기를."

2025년이라는 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참으로 아픈 기억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지난 2월이었죠. 대전의 한 초등학교 1학년 교실에서 8살 김A양의 시간이 영원히 멈췄습니다. 아이가 세상에서 부모님 다음으로 믿고 의지했던 사람, 담임 선생님 명모 씨(48)의 손에 들려 있던 것은 칭찬 스티커가 아닌 흉기였습니다.

"누구든 상관없었어요. 그저 같이 죽고 싶었습니다."

우울증이라는 병명 뒤에 숨어 내뱉은 교사의 그 공허한 진술 앞에서, 우리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발인식이 열리던 날, 김A양의 아버지는 땅을 치며 오열하셨습니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아빠가 정말 미안해."

그 절규는 그날 그 자리에 계셨던 분들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빚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독자 여러분, 왜 피해자가 미안해야 할까요. 정말 죄송해야 할 사람은, 아이를 학교라는 사지로 보낸 우리 사회가 아닐까요?

학교라는 성역(聖域)마저 무너져 내린 그날, 우리는 비로소 아픈 진실을 마주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서 있는 곳이 단단한 땅이 아니라, 언제 깨질지 모르는 살얼음판이었다는 사실을요. 하지만 시선을 조금만 돌려봐 주십시오. 학교 담장 밖, 더 깊고 은밀한 곳에 입을 벌리고 있는 심연이 있습니다. 바로 '가정'이라는 이름의 밀실입니다.
 

식탁 맞은편에 앉은 그림자

숫자는 차갑지만, 그 껍질을 벗겨보면 피 묻은 진실이 웅크리고 있습니다. 지난 8월,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24 아동학대 연차보고서>는 우리에게 뼈아픈 고해성사를 요구합니다. 작년 한 해 동안 학대로 최종 판단된 2만 4,492건의 사례를 분석해 보니, 학대 행위자의 85.9%는 다름 아닌 부모였습니다.

계모나 계부, 혹은 뉴스에 나오는 낯선 타인이 아니었습니다. 아이를 세상에 내놓고, 첫 숨을 트게 해주었던 친부모가 절대다수였습니다. 학대가 발생한 장소의 82.9% 역시 '집'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포근해야 할 안식처가, 아이들에게는 도망칠 수 없는 감옥이었던 셈입니다.

우리는 흔히 아동 학대범을 뿔 달린 악마처럼 상상하곤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좀 편해지니까요. '저들은 우리와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고 선을 그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해자들은 퇴근길 엘리베이터에서 "안녕하세요"라며 수줍게 웃는 윗집 아빠이고, 마트에서 아이의 손을 잡고 저녁 메뉴를 고민하는 아랫집 엄마들인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그 평범함 뒤에서 비극은 조용히 싹틉니다. 삶이 고단할 때, 밖에서 받은 상처를 풀 곳이 없을 때, 부모는 가장 안전하고 만만한 대상을 찾게 됩니다.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라는 훈육의 탈을 쓰고, 혹은 "너만 아니었으면 내 인생이 이러진 않았어"라는 한탄을 핑계로, 아이들의 여린 영혼은 난도질당합니다.

하버드 의대의 마틴 타이처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학대받은 아이의 뇌는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군인의 뇌처럼 변합니다."

꼭 뼈가 부러져야만 학대가 아닙니다. 쏟아지는 폭언 속에서, 투명 인간 취급하는 싸늘한 방임 속에서 아이의 뇌는 매일 밤 공습경보를 듣습니다. 아이에게 집은 안식처가 아니라, 언제 터질지 모르는 지뢰밭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112를 누르지 못합니다. 부모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자신을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이는 끝내 믿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다로 간 아이는 잠들지 못했습니다

우리 언론은 가난한 부모의 마지막 선택에 유독 관대한 편입니다. 벼랑 끝에 몰린 부모가 아이를 데리고 목숨을 끊으면, '일가족 동반 자살'이라는, 어딘가 비장하고 슬픈 단어로 그 죽음을 포장하곤 합니다. 저는 이 단어를 볼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 펜을 놓게 됩니다. 이것은 너무나 낭만적인 오보(誤報)이기 때문입니다.

해외 유력지들의 시선은 냉정합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아이가 그 죽음에 동의했습니까?"

동의하지 않은 죽음은 자살이 아닙니다. 그것은 명백한 '자녀 살해 후 자살(Murder-suicide)'입니다. 프랑스 <르몽드>지는 한국의 이러한 현상을 두고 "자녀를 독립된 인격체가 아닌, 부모의 소유물로 여기는 전근대적 착각이 빚어낸 참극"이라고 꼬집기도 했습니다.

2022년 여름, 완도 앞바다 차가운 물속에서 발견된 은색 승용차를 기억하시나요? 뒷좌석에 앉아 있던 10살 조모 양은 죽음을 선택한 적이 없습니다. 경찰 조사 결과, 부모님이 절망 속에서 '수면제'를 검색하고 있을 때, 아이는 학교 과제와 친구들의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아이는 그저 부모의 절망에 휩쓸려, 영문도 모른 채, 작별 인사 한 번 하지 못하고 깊은 바다로 가라앉았습니다.

지난 20년간 한 달에 한 번꼴로 이런 비극이 반복되었습니다. 물론 압니다. 빈곤은 학대의 강력한 방아쇠가 됩니다. 빚 독촉 전화는 부모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그 분노는 가장 약한 고리인 아이에게 향하기 쉽습니다. 사회적 안전망이 더 촘촘했다면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백번 양보해도 그것이 면죄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부모의 삶이 실패했다고 해서, 우주가 빌려준 고유한 생명인 아이의 우주까지 닫아버릴 권리는 신조차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나 없이 아이가 불행할까 봐"라는 말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이의 '살아낼 권리'를 빼앗는, 가장 슬픈 타살일 뿐입니다.
 

'미안해'라는 말 대신 이제는 행동으로 보여주세요

2020년 가을, 16개월 입양아 B양(일명 정인이 사건)이 세상을 떠났을 때, 우리는 거리에 국화꽃을 놓고 수만 장의 포스트잇을 붙였습니다.

"미안해, 우리가 바꿀게.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할게."

그 약속은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아파했고, 진심으로 미안해했습니다. 그러나 5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 약속을 잘 지키고 있을까요?

2024년 한 해,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망 아동만 30명입니다. 다행히 숫자는 조금씩 줄고 있지만, 여전히 한 학급 규모의 아이들이 매년 어른들의 손에 의해 별이 됩니다. 신고 건수는 5만 건을 넘어 역대 최다를 기록했습니다. 이웃들이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는 희망적인 신호입니다. 하지만 시스템은 여전히 성기기만 합니다. 어렵게 신고된 아이들 중 절반 이상은 "증거가 부족하다"거나, "눈물로 반성하고 있다"는 부모의 말에 다시 그 지옥 같은 집으로 돌려보내집니다.

통계는 우리에게 서늘한 경고를 보냅니다. 재학대 비율 15.9%. 어렵게 용기 내어 "살려달라"고 고사리 같은 손을 뻗었던 아이 6명 중 1명은, 다시 학대의 굴레 속으로 짓밟혀 들어갔습니다. 그 아이들이 느꼈을 절망감을, 자신을 다시 지옥으로 밀어 넣은 어른들에 대한 배신감을 우리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요?

영국은 2000년 8살 소녀 '빅토리아 클림비'의 죽음 이후, 400페이지가 넘는 보고서를 남기고 시스템을 뿌리째 뜯어고쳤습니다. "아이 하나를 살리기 위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은 따뜻한 속담이 아니라, 엄정한 법과 예산이 뒷받침된 국가의 명령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결단이 필요합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들 합니다. 아니요, 법이 너무 멀리 있기에 주먹이 가까운 것입니다. 아이가 위기에 처했을 때 문을 열고 확인할 수 있는 공권력, 의사와 교사가 학대 징후를 발견했을 때 악성 민원을 두려워하지 않고 즉시 신고하고 격리할 수 있는 권한. 그리고 무엇보다 "남의 집 가정사"라는 핑계 뒤에 숨지 않는 독자 여러분의 따뜻한 오지랖이 절실합니다.

에필로그 - 당신의 떨리는 손끝이 아이를 구합니다

대전의 김A양이, 완도의 조모 양이, 그리고 양천구의 B양이 별이 되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가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합니다. 그 별빛은 우리를 원망하는 눈빛이 아닐 것이라고요.

"다른 친구들은 나처럼 아프지 않게 해주세요."

그것은 처절하고도 간절한 구조 신호일 것입니다.

빈 책상 앞에서 흘리는 눈물은 이제 거두었으면 합니다. 미안하다는 말은 늦게 도착한 편지처럼, 아이들에게 닿지 못하니까요. 진정한 애도는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오늘 밤, 옆집 아이의 울음소리가 유난히 길게 들린다면, 계절에 맞지 않는 얇은 옷을 입고 떨고 있는 아이를 보신다면, 주저하지 말고 112 버튼을 눌러주세요.

"혹시 오해면 어떡하지?"라는 망설임보다, "혹시 늦으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이 한 생명을 살립니다. 당신의 그 떨리는 손끝이, 벼랑 끝에 선 아이가 잡을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입니다.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아이를 지키지 못하는 사회에, 미래와 역사라는 거창한 단어는 허락되지 않는 사치라는 것을요.

안현호 | 시사매거진 칼럼니스트 - 세상의 모든 약한 것들에 시선이 머뭅니다. 숫자로 기록되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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