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알렉스의 프레임] “음흉한 그들이 꾸미는 감각적 무대, 상상의 즐거움”
더하우스콘서트 세 번째 무브먼트 ‘피아노×무브먼트’ 이 글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비평주체 활성화 프로젝트 ‘비평가 매칭 프로젝트’로 작성됐다
상상력은 언제나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연다. 고(故) 이건희 회장이 사장단 회의에서 영화의 한 장면을 멈추고 “다음 장면이 무엇인가?”라고 물었다는 일화는, 비단 경영뿐 아니라 예술에서도 미래를 바라보는 상상력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허황되어 보였던 이상과 꿈이 결국 현실을 움직여왔듯, 예술 역시 무한한 상상력에서 출발한다. 더하우스콘서트가 지금까지 1,140여 회의 공연을 이어오고, 세 번째 ‘무브먼트 시리즈’를 선보일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늘 새롭고 기발한 무대의 중심에는 박창수 예술감독과 그와 함께한 이들의 끝없는 상상력이 있었다. 지난 10월 26일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에서 열린 <피아노×무브먼트>는 그 상상의 세계가 실연되는 순간이었다.
“<바흐x무브먼트>가 심플한 수묵화라면, <피아노×무브먼트>는 모네 같은 인상주의 화가의 풍경이다.”(프로그램 북 중에서)
이번 공연은 라벨 탄생 150주년을 기념했다. 라벨의 주요 피아노 작품 여섯 곡은 9명의 피아니스트와 17명의 안무가·무용수의 몸짓과 만났고, 서로 다른 감각의 결을 만들어냈다. 라벨이 드뷔시, 사티, 스트라빈스키, 쇤베르크 등과 함께 예술의 격동기 속을 살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번 무대는 기념 공연을 넘어 한 시대의 감각을 다시 호출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공연이 열린 콘솔레이션홀은 순교 성인 다섯 분의 유해가 모셔진 공간으로, 평소에는 숙연함을 품고 있다. 이 신성한 공간이 예술적 상상력과 겹쳐지며 형성된 관극 경험은 유독 특별했다. 더하우스콘서트 강선애 대표는 “피아노가 가진 색채를 무용과 직접 연결하고, 공간의 특성을 활용한 프로젝션 맵핑을 더해 입체감을 확장했다”고 설명했다. 포토그래퍼 김신중의 사방면 프로젝션 맵핑은 라벨의 세계를 공간으로 펼쳐 보이는 역할을 했다.
첫 무대부터 강렬했다. 피아니스트 안종도와 안무가 기쿠자와 요시노리(Yoshinori Kikuzawa)는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로 공간의 침묵을 서서히 깨웠다. 라벨 특유의 맑고 아름다움을 품은 침잠한 정서는 안종도의 절제된 피아노와 기쿠자와의 유연한 몸짓 위에서 새로운 춤의 이미지로 피어났다. 기쿠자와는 이 작품을 ‘하늘로 날아오르는 우아한 공작’으로 표현했다고 했다. 조명의 빛이 그의 근육과 땀결을 따라 번져가며 만들어낸 장면은 애절하면서도 절제된 기도와 같았다. 그는 “시작을 여는 안내자이자 다음 장면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첫 문장”을 바랐다고 말한다. ‘파반느’라는 곡명 속에 이미 춤이 담긴 이 음악은, 두 예술가를 만나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그가 말했듯, 이 무대는 시작을 여는 ‘스토리텔러’였다.
이어서 피아니스트 일리야 라쉬코프스키와 안무가 미사키 아야(Aya Misaki)의 <물의 유희>가 펼쳐졌다. 콘솔레이션홀의 절제된 모노톤 속에서 미사키의 오른팔에 새겨진 붉은 표식은 흑백 영화 속에서 반짝이는 컬러처럼 물결 위에서 춤추는 붉은 용 같았다. “끝없는 혼돈 속에서 빛과 그림자를 가로지르며, 멈추지 않는 흐름에 몸을 맡긴다”는 그녀의 말처럼, 무대 위 움직임은 반짝이는 물결과 흐름, 그리고 사라짐을 그려냈다. 라벨은 이 곡을 '햇빛 속에서 분수가 반짝이며 흩어지는 모습'으로 설명한 바 있다. 두 예술가의 호흡은 그 이미지를 그대로 풀어냈다.
세 번째 작품인 <라 발스>는 피아니스트 최형록, 무용수 이재영과 송예빈이 함께했다. 이 곡은 우리가 흔히 아는 요한 슈트라우스풍의 3박자 왈츠와는 거리가 멀다. 과거 라벨이 이 곡을 두고 '발레음악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평가를 들으며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이번 공연에서 이 작품을 춤으로 풀어내는 일은 가장 큰 난제가 아니었을까 싶다. 점진적으로 광폭해지는 음악의 소용돌이를 몸으로 구현해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을 터다. 여기에 더해, 대리석 무대 중앙의 요철과 마찰은 움직임 자체에 위험을 더했다. 그럼에도 두 무용수는 솔로와 서로의 움직임을 받아내고 밀어내는 파드되를 통해 작품이 품은 격렬함과 허무함을 동시에 끌어냈다. 거친 바닥을 스치며 울린 슈즈 소리조차 음악의 일부가 되어 결국 하나의 아름다움을 완성했다.
<어미 거위 모음곡>에서는 피아니스트 문지영·김태형 듀오와 무용수 민사원·박정빈·오연·이우선이 함께했다. 이 곡은 어린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길 즐겼던 라벨의 모습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그는 어린 연주자를 염두에 두고 이 작품을 작곡했고, 그만큼 음악은 쉽고 간결하면서도 라벨 특유의 동화적 상상이 촘촘히 배어 있다. 이러한 상상력 위에 문지영과 김태형의 포핸즈가 펼쳐졌고, 네 명의 무용수는 그 위에 살포시 안무를 얹었다. 남녀 한 쌍으로 구성된 무용수들은 발레에 적합하게 작곡된 곡의 특성을 섬세하게 파악해 안무의 완성도를 높였고, 각기 다른 시선과 출입, 그리고 서로 어우러지는 모습은 작품의 우아함을 한층 더했다. 라벨의 동화적 이미지가 음악과 발레의 조화 속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와 상상의 세계가 무대 위에서 생생히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이날 무대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는 이동하·박연민의 투 피아노와 안무가 이소미가 함께한 <다프니스와 클로에 모음곡 제2번>이었다. 화려한 오케스트레이션과 인상주의적 색채가 짙은 이 작품은 ‘프랑스 발레 음악의 정점’이자 ‘무용 교향곡’ 중 일부이다.
무대 위에 특별 조명이 설치되는 동안, 공간에 흐르는 정적은 오히려 곧 펼쳐질 장면을 향한 관객의 상상과 긴장을 확장시키는 순간이 되었다. “도대체 어떤 장면이 등장할까?”라는 호기심이 서서히 응축되며 무대 위로 떠올랐다. 새로운 예술적 시도는 언제나 관객의 의문과 낯섦 속에서 출발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공연은 관객 스스로가 ‘현장에 서 있는 증인’임을 실감하게 했다.
안무가 이소미는 “예술은 완성된 결과만으로 성립하는가?”라는 질문을 바탕에 두고, 미완의 상태에서 발생하는 생생한 에너지를 몸의 움직임으로 드러냈다. 앞서 솔로 무대를 선보였던 기쿠자와나 미사키와는 또 다른 결의 흐름과 에너지가 투 피아노의 리듬과 결합하며 무대를 채웠다. 조명의 틀을 오가며 펼쳐지는 움직임은 경계를 부수고 확장되는 몸의 언어를 상상하게 했다.
투 피아노 역시 강렬했다.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익숙한 이 곡을 피아노만으로 들었을 때의 질감은 마치 피아노와 오케스트라 버전이 품은 서로 다른 감각처럼, 새로움과 낯섦 사이를 오가며 관객에게 또 하나의 ‘다른 빛깔의 라벨’을 경험하게 했다.
라벨을 말할때 빼놓을 수 없는 곡, 바로 <볼레로>다. 1928년 초연 이후 전 세계에서 가장 널리 연주되는 레퍼토리 중 하나로 자리 잡은 이 곡은 '전 세계 어딘가에서 평균 15분마다 연주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대중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지닌 작품이다.
피날레 무대에는 피아니스트 강혜영·김송현과 안무가 김재덕의 ‘모던테이블’ 소속 일곱 남성 무용수(이어린·정철한·엄세영·이준석·최형규·이기영·김동규)가 올랐다. 피아노로 표현하는 볼레로는 분명 한계를 품고 시작했지만, 프리페어드 기법으로 만든 리듬은 인상적인 첫 호흡을 이끌어냈다. 반복이 깊어지며 피로감이 드러나는 순간도 있었으나, 무용수들의 군무는 오히려 에너지를 점층적으로 끌어올리며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갔다.
7인의 무용수는 한 몸처럼 움직였고, ‘고요함–담겨있음–움직임–상승–굳건함’으로 이어지는 다섯 단계의 구성은 동양적 사유 속에서 라벨의 열기를 새롭게 해석한 장면이었다. 다만 피날레를 ‘모든 예술가가 함께 등장하는 장면’으로 확장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의 뒤끝은 남았다. 그러나 이 또한 상상의 몫이며,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HOW)’에 대한 질문은 더하우스콘서트가 앞으로 이어갈 숙제로 남겨졌다.
프라다를 좋아한다는 악마… 더하우스콘서트의 상상력은 언제나 그와 닮았다. 악마적이고 쾌(快) 넘치며 사뭇 발칙하다. 전통을 비틀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매번 ‘히트 런’을 만들어온 이들의 무대는 늘 기대와 궁금증을 자극한다. 이렇듯 더하우스콘서트의 무대는 항상 다음 페이지를 열어둔 채 관객을 머물게 한다. 이후 이어질 다채로운 공연들,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의 ‘1143회 2025 갈라 콘서트’ 그리고 새해 번개 콘서트까지. 특히 갈라와 번개 콘서트는 공연 당일에서야 공개되는 출연진 덕분에 특유의 설렘과 긴장감을 더한다. 그리고 2026년, <피아노×무브먼트>는 즉흥연주와 즉흥무용의 무대, 시즌 2로 돌아온다.
이쯤 되면 관객은 묻지 않을 수 없다.
더하우스콘서트, 너는 누구인가. “Show Me The STAGE!”
© 시사매거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칼럼 기사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