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스토리텔링이 숫자를 이긴다" 크루즈 관광 잘되려면 이야기의 힘 키워야
크로아티아 '여행업계의 오스카 상' 트래비어워즈 3관왕 수상
[시사매거진 박재아 기자] 2025 트래비 어워즈에서 크로아티아가 '지중해 최고의 여행지'와 '유럽 최고의 크루즈 여행지' 두 부문 동메달을 동시에 받았다. 여기에 '유럽 최고의 여행지' 부문 동메달까지 더해 3관왕을 차지했다.크로아티아는 1,246개 섬을 갖고 있고, 한국에는 그 두 배가 넘는 3,300개 섬이 있다. 섬의 갯수만 보면 한국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그런데 결과는 반대다. 2025년 여수에 입항할 예정인 크루즈선은 8척에 불과하다. 크로아티아 주요 항구 십여 곳은 각각 수백 척의 크루즈선을 끌어들인다.아일랜드 호핑
[시사매거진 박재아 기자] 2025 트래비 어워즈에서 크로아티아가 '지중해 최고의 여행지'와 '유럽 최고의 크루즈 여행지' 두 부문 동메달을 동시에 받았다. 여기에 '유럽 최고의 여행지' 부문 동메달까지 더해 3관왕을 차지했다.
크로아티아는 1,246개 섬을 갖고 있고, 한국에는 그 두 배가 넘는 3,300개 섬이 있다. 섬의 갯수만 보면 한국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그런데 결과는 반대다. 2025년 여수에 입항할 예정인 크루즈선은 8척에 불과하다. 크로아티아 주요 항구 십여 곳은 각각 수백 척의 크루즈선을 끌어들인다.
아일랜드 호핑 - 크루즈가 아닌 여정을 판다
크로아티아 크루즈 관광의 핵심은 '아일랜드 호핑(Island Hopping)'이라는 상품 구조에 있다. 대표적인 두브로브니크-스플리트 7일 루트를 보자. 단순히 섬들을 경유하는 크루즈가 아니다. 코르출라(Korčula), 흐바르(Hvar), 비스(Vis), 믈레트(Mljet), 파클렌스키 오토치(Paklinski Otoci) 등 각 섬에서 하선해 숙박하며 저녁 시간을 보낸다. 관광객들은 중세 도시 골목을 걷고, 현지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며, 와인 산지인 트르스테닉(Trstenik)을 찾는다. 비셰보(Biševo) 섬 해상 동굴을 탐험하고, 해변에서 여유를 즐긴다.
크루즈 선내에서 자지 않고 기항지에서 밤을 보내며 돈을 쓰는 구조다. 크루즈 선내 숙박 관광객의 기항지 체류시간은 평균 2-3시간, 지출액은 1인당 50-100달러 수준이다. 반면 기항지 숙박형 아일랜드 호핑 관광객은 평균 10-12시간 머물며 1인당 200-350달러를 쓴다. 지역경제 활성화 효과가 3-4배 차이난다.
유럽 여행업계에서 130년 역사를 자랑하는 쿠오니(Kuoni)는 프라이빗 요트 전세와 소형 크루즈선 두 가지 옵션을 제공한다. MS 마마 마리야(MS Mama Marija) 같은 소형 크루즈선은 승객 40명 내외로 대형 크루즈와 달리 작은 항구에도 접안할 수 있다. 스키퍼(skipper, 선장)와 호스트가 함께 타고 일정과 루트를 유연하게 조정한다. 자전거 투어와 보트를 엮은 상품도 인기다.
크로아티아는 크루즈를 이동 수단이 아닌 '여정의 일부'로 본다. 목적지는 배가 아니라 섬이다.
포말로 vs 8282 - 문화를 스토리텔링으로 전환하라
크로아티아 관광의 경쟁력은 '포말로(pomalo)' 철학에서 나온다. '천천히, 여유롭게'를 뜻하는 이 단어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다.
두브로브니크(Dubrovnik)는 과잉관광 문제를 풀기 위해 크루즈선 입항을 제한하고 구시가지 차량 통행을 막았다. 단기 수익을 포기하고 장기 지속가능성을 택했다. 2025 완더러스트 어워드(Wanderlust Award) 지속가능성 부문 수상으로 이어졌다.
한국 여행자들은 정반대다. '8282(빨리빨리)' 문화는 분초를 다투며 최대한 많은 곳을 돌아보는 여행 패턴을 만들었다. 3박 4일 유럽 여행에서 5개국을 도는 상품이 인기를 끄는 이유다. 효율성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문화적 특성이다.
한국은 포말로 철학을 부러워하면서도 8282를 부끄러워한다. 포말로든 8282든,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스토리텔링하느냐다.
크로아티아는 포말로를 '슬로우 투어리즘'으로 브랜딩했다. 그렇다면 한국은 8282를 역동성의 브랜드로 키울 수 있다.
크로아티아 관광청의 “Pomalo” 여행 홍보영상
하루에 한라산 등반과 올레길 산책, 해녀 체험과 흑돼지 맛집 투어를 모두 경험하는 역동성. 24시간 움직이는 도시 서울의 에너지. 새벽 5시 동대문 시장에서 저녁 11시 한강 크루즈까지 논스톱으로 즐기는 강렬한 경험, 오직 ‘다이내믹 코리아’ 한국에서만 가능한 독특한 여행법이다.
문제는 ‘겉핧기식 여행’으로 묘사되는 일정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스토리로 만들지 못한 것이다. 빠른 속도로 다채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것도 차별화다. 득실은 있다. 8282로 많은 곳을 보지만 깊이 있는 경험은 놓친다. 포말로로 여유를 즐기지만 제한된 시간에 적은 곳만 본다. 중요한 것은 이 특성을 인정하고 자신 있게 내놓는 것이다. 우리 여행문화의 일환이라면 스토리텔링해서 오히려 강점으로 만들어야 한다.
서울의 인기 관광 스팟 특집
스토리텔링 없는 관광지는 경쟁력이 없다
크로아티아 성공 사례를 분석하면 하나의 원칙이 관통한다. 모든 기항지에 명확한 스토리가 있다.
스플리트(Split): '로마시대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Diocletian's Palace)'이라는 스토리로 세계문화유산 도시 이미지를 세웠다. 4세기 로마 황제가 은퇴 후 살기 위해 지은 궁전이 도시 전체가 됐다. 관광객들은 단순히 건축물을 보는 게 아니라 로마 제국의 몰락과 중세 도시의 탄생이라는 역사적 전환점을 경험한다.
흐바르: '유럽에서 가장 햇볕이 잘 드는 섬'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다. 연간 2,800시간 이상의 일조량이라는 객관적 데이터로 '라벤더 섬' 이미지를 만들었다. 톰 크루즈, 비욘세, 조지 클루니 같은 할리우드 스타들이 정기적으로 찾는다.
라벤더 밭, 그린 케이브(Green Cave), 블루 케이브(Blue Cave), 파클레니 제도(Pakleni Islands) 프라이빗 요트 투어 등 다양한 크루즈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코르출라: '마르코 폴로의 고향'이라는 한 문장으로 정체성을 완성했다. 역사적 논쟁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 논쟁 자체가 스토리가 된다는 점이다. 관광객들은 마르코 폴로 생가를 찾아가며 13세기 실크로드와 동서 문화 교류라는 거대 서사에 참여한다.
브라츠 섬(Brač): '즐라트니 라트(Zlatni Rat, 황금뿔) 해변'이라는 독특한 자연경관 하나로 승부한다. 해류와 바람에 따라 모양이 바뀌는 삼각형 해변. 단순하지만 강력한 스토리다.
한국 섬들의 스토리는 어디에 있는가
반면 한국의 7대 크루즈 기항지를 보자. 여수는 '아름다운 섬이 있는 낭만과 힐링 도시', 제주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춘 도시', 속초는 '세계적 명산 트레킹의 도시'로 소개된다. 이런 수식어는 아무 의미가 없다. 아름답지 않은 섬이 어디 있고, 천혜의 자연이 없는 관광지가 어디 있는가.
여수 365개 섬의 스토리는 무엇인가. 한려수도 해상국립공원 지정만으로는 부족하다. 거문도는 영국 함대가 러시아 견제를 위해 불법 점거했던 역사가 있다. 이를 '동양의 지브롤터'로 브랜딩하면 19세기 제국주의 각축장이라는 스토리가 만들어진다. 백도는 '한국의 하롱베이'라는 비교가 아니라 3억 년 전 고생대부터 형성된 독자적 지질학적 가치를 부각해야 한다.
신안 1,004개 섬은 '천사(angel)'를 연상시켜 기억하기는 쉽지만 스토리가 약하다. 증도 태평염전은 천일염 생산지가 아니라 '대한민국 슬로시티 1호'라는 철학을 담아야 한다. 김환기 생가가 있는 안좌도는 '한국 추상미술의 요람'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1976년 발굴한 신안 해저 유물은 14세기 해상 실크로드의 물증이다. 이를 엮으면 '동아시아 해양문명의 타임캡슐'이라는 서사가 완성된다.
통영 570개 섬 역시 마찬가지다. 한산도 제승당은 단순한 이순신 유적지가 아니라 '16세기 동아시아 최고의 해군 전략가가 3년간 조선 수군을 재건한 사령부'라는 스토리가 필요하다. 욕지도는 '섬 속의 섬'이라는 지리적 고립을 오히려 '한국 최후의 비경'으로 바꿀 수 있다.
크루즈 관광의 본질 -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
한국 크루즈 산업이 맞닥뜨린 가장 큰 문제는 하드웨어 집착이다. 2024년 국내 크루즈 방한 관광객은 81만6천 명으로 전년 대비 3배 늘었다. 2025년 목표는 90만 명이다. 문체부와 해수부는 터미널 시설 개선, 탄력적 인력 배치 등을 밀어붙이고 있다.
정작 중요한 질문은 과연 그 90만 명이 한국을 기억할 것인가다. 터미널에서 2시간 내려 면세점 들르고 다시 배에 오르는 경험이 그들에게 무엇을 남길까?
서울시 한강버스 사업은 뼈아픈 교훈을 남겼다. 사업비가 542억 원에서 1,750억 원으로 222% 늘었다. 선박 수주 실적이 없는 신생기업에 발주해 납기가 11개월 미뤄졌다. 2025년 9월 18일 개통 후 열흘 운행하고 한 달간 무승객 시범운항을 해야 했다. 하드웨어에 수천억 원을 쏟아부었지만 콘텐츠는 없었다. 한강-여수 연안 크루즈 사업은 3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사업 주체조차 정하지 못했다.
인도네시아 피니시(Pinisi) 목선 크루즈와 대조적이다. 못을 쓰지 않고 전통 방식으로 만든 이 배는 시설이 호화롭지 않다. 하지만 코모도 국립공원(Komodo National Park) 크루즈 상품은 전 세계 다이버들의 버킷리스트다. 3박 4일 일정으로 코모도(Komodo) 섬, 파다르(Padar) 섬, 링카(Rinca) 섬을 돌며 세계에서 유일하게 야생 코모도 왕도마뱀을 볼 수 있다. 핑크 비치(Pink Beach)라 불리는 붉은 산호 모래 해변에서 스노클링을 즐기고, 만타 포인트(Manta Point)에서 대형 만타가오리와 함께 헤엄친다. 선박이 작아 외딴 만에 정박하고 갑판에서 별을 보며 잠든다. 코모도 왕도마뱀, 만타가오리, 독특한 해양생물이라는 콘텐츠가 시설의 부족을 압도한다. 선박의 호화로움이 아닌 기항지의 매력으로 승부하는 것이 세계적 추세다.
명분 없는 관광은 지속되지 않는다
크로아티아 관광청 마르코 유르치치(Marko Jurčić) 한국 지사장은 부임 후 6개월간 부산, 여수, 목포, 신안을 직접 찾아다니며 협력 방안을 찾았다. 여수 365개 섬과 크로아티아 1,246개 섬의 공동 마케팅, 크루즈 기항지 운영 노하우 전수, 지속가능한 관광 정책 공유 등을 제안했다.
협력의 핵심은 철학과 스토리텔링 방법론을 서로 배우는 것이다. 크로아티아는 미국 관광객이 2025년 10개월간 82만9천 명으로 전년 대비 10% 늘었고, 유나이티드 항공(United Airlines)이 뉴욕-스플리트 직항을 새로 띄웠다. 아름다운 자연 때문이 아니다. 각 기항지의 뚜렷한 스토리, 포말로 철학 기반의 지속가능한 관광, 법으로 정한 환경 기준 때문이다.
2026 여수세계섬박람회는 전환의 기회다. 하지만 하드웨어 구축만으로는 부족하다. 여수 365개 섬, 신안 1,004개 섬, 통영 570개 섬 각각의 스토리를 파내고 명분을 부여해야 한다. 8282든 포말로든, 그것을 자신 있게 스토리텔링하는 것이 시작이다.
크로아티아가 1,246개 섬으로 3관왕을 거머쥔 것은 숫자의 승리가 아니다. 스토리텔링의 승리다. 한국의 3,300개 섬은 여전히 숫자일 뿐이다. 이제 이야기를 만들 차례다.
글= 박재아 (크로아티아관광청 지역 자문관, 카자흐스탄 관광청 홍보대사, 조선대학교 대외협력교수, 팔라우 대통령 직속 관광·경제자문관, 한국태평양학회 이사, 前 태평양관광기구 및 인도네시아관광부 한국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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