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호 기자의 기사

총 12건

공간의 심리학 7

칼럼 · 오피니언

집에서 책을 읽거나 밀린 업무를 보려다 도저히 집중이 안 돼 노트북을 주섬주섬 챙겨 집 앞 카페로 나선 경험, 아마 다들 있으실 겁니다. 생각해보면 참 이상한 일입니다. 집은 세상에서 가장 조용하고, 내 몸에 딱 맞는 의자가 있고, 내가 좋아하는 온도로 맞춰진 가장 편안한 곳인데 자꾸만 딴짓을 하게 됩니다. 반면 카페는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 치익 하고 에스프레소 머신 돌아가는 소리, 옆 테이블의 웅성거리는 대화 소리로 꽤나 소란스럽습니다. 그런데도 묘하게 책장이 술술 넘어가고, 막히던 글이 써집니다.우리는 흔히 조용해야

안현호 기자

공간의 심리학 6

칼럼 · 오피니언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현관문 앞에 섭니다.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이 열리는 소리. 그 익숙한 기계음과 함께 긴장이 풀립니다. 밖에서 입었던 사회적 가면을 벗어던지고 가장 무방비한 나로 돌아오는 순간이지요.하지만 안도감도 잠시, 현관을 들어서는 순간 우리의 눈은 빠르게 집안을 스캔합니다. 아침에 허둥지둥 나오느라 벗어둔 신발들, 며칠째 뜯지 않은 택배 상자, 싱크대에 쌓인 설거지거리. 현관문을 여는 것은 휴식의 시작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밀린 숙제와의 마주침이기도 합니다. 집은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안식처여야 하지만, 역설적이

안현호 기자

공간의 심리학 5

칼럼 · 오피니언

주말 오후, 백화점의 거대한 회전문을 밀고 들어섭니다. 바깥세상의 매연과 소음이 순식간에 차단되고, 서늘할 정도로 쾌적한 공기와 함께 코끝을 찌르는 진한 향수 냄새가 우리를 맞이합니다. 눈을 멀게 할 듯 쏟아지는 화려한 조명 아래, 완벽하게 차려입은 직원들이 미소로 인사합니다.이 순간, 우리는 무의식중에 현실의 감각을 잊습니다. 방금까지 고민하던 카드 값이나 직장 상사의 얼굴은 저 회전문 밖에 두고 온 것만 같습니다. 백화점의 첫 번째 전략은 바로 이 ‘압도적인 감각의 전이’입니다. 시각, 청각, 후각을 동시에 자극하여 고객을 순식

안현호 기자

공간의 심리학 4

칼럼 · 오피니언

여행지에서, 혹은 지친 일상을 달래려 찾은 도심의 호텔 회전문을 밀고 들어설 때를 기억하시나요. 바깥세상의 소음과 매연이 차단되는 그 순간, 가장 먼저 우리의 감각을 덮치는 것은 시각이 아니라 후각입니다. 5성급 호텔들은 저마다의 고유한 시그니처 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숲속의 젖은 흙 냄새 같기도 하고, 은은한 유칼립투스 향 같기도 한 그 미묘하고 고급스러운 향기.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후각 마케팅’이라 불리는 아주 정교한 전략입니다.인간의 오감 중 뇌의 감정 중추인 변연계로 직행하는 유일한 감각이 바로 후각입니다. 호텔은 이

안현호 기자

공간의 심리학 3

칼럼 · 오피니언

[시사매거진 안현호 기자] 얼음 땡! 방금 전까지 왁자지껄 떠들며 걸어오던 우리도 이 문턱만 넘으면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뭅니다. 닫힘 버튼을 누르는 순간, 활기차던 공기는 진공청소기에 빨려 들어간 듯 사라지고 남는 건 오르내리며 웅 거리는 소리와, 어색함을 견디는 미세한 숨소리. 시선은 갈 곳을 잃고 허공을 돌다 결국 깜빡이는 층수 표시판에 꽂힙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거의 모두 비슷하게 행동하는 이 기이한 침묵의 의식. 우리는 왜 이 수직으로 움직이는 금속 상자 안에만 들어오면 돌처럼 굳어버리는 걸까요.단순히 매너 때문일

안현호 기자

공간의 심리학 2

칼럼 · 오피니언

우리는 흔히 혀끝의 감각으로 음식을 기억한다고 믿지만, 어쩌면 그 기억의 절반은 우리의 엉덩이가 쥐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최근 급하게 허기를 달랬던 패스트푸드점과, 소중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찾았던 고급 레스토랑의 풍경을 떠올려 봅니다. 햄버거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내 몸을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표면이 매끄럽고 차가운 플라스틱이나 딱딱한 나무 의자였습니다. 반면 호텔의 레스토랑에서 나를 감싸안은 것은 몸이 기분 좋게 파묻히는 벨벳 의자나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가죽 소파였습니다. 이 극단적인 촉각의 차이는 단순히 가구

안현호 기자

공간의 심리학1

칼럼 · 오피니언

노란 장바구니를 든 순례자들때때로 주말 아침이면 우리는 마치 엄숙한 종교 의식을 치르듯 도시의 외곽을 향해 차를 몰고 갑니다. 목적지는 교외의 광활한 대지에 자리 잡은 거대한 푸른 상자, 이케아(IKEA)입니다. 출발할 때 우리의 다짐은 명료합니다. 책상 하나, 의자 하나, 혹은 수납장 하나. 필요한 물건만 신속하게 구매하고 돌아오겠다는 것이 합리적인 계획입니다. 그러나 계산대 앞에 선 순간, 우리의 카트를 내려다보면 그 계획은 조금 달라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름조차 발음하기 난해한 스웨덴어 태그가 붙은 향초와 냅킨, 지퍼

안현호 기자

[안현호 칼럼] 서울과 도쿄에 대한 가볍게 지나갈 이야기(5)

칼럼 · 오피니언

9화. 도심 속 갈라파고스와 이코모스의 경고도시는 스스로를 평가하지 않습니다. 도시는 언제나 외부의 시선에 의해 비로소 규정됩니다. 특히 세계유산이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그 공간은 한 도시의 소유물을 넘어 인류 전체의 기준 위에 올라서게 됩니다. 제도와 계획, 개발의 논리는 이 지점에서 새로운 질문과 마주합니다.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훼손해서는 안 되는가'라는 질문입니다.도쿄 황궁의 가장 깊숙한 영역에는 일반인의 발걸음이 닿지 않는 비밀의 숲, 후키아게 교엔이 있습니다. 수백 년 동안 금단의 구역으로 남겨진 이

안현호 기자

[안현호 칼럼] 서울과 도쿄에 대한 가볍게 지나갈 이야기(4)

칼럼 · 오피니언

7화. 31미터의 천장과 숫자가 가린 본질도시는 언제나 위를 욕망합니다. 더 높이, 더 멀리, 더 많이 보려는 욕망은 어쩌면 인간의 본능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모든 도시가 그 욕망을 같은 방식으로 허용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도시는 스스로 보이지 않는 천장을 만들고, 어떤 도시는 그 천장을 부수고 올라가려 합니다. 도쿄와 서울의 차이는 높이를 대하는 태도에서 다시 한번 흥미롭게 갈라집니다. 높이를 둘러싼 규제는 단순한 건축 법규가 아니라, 그 도시가 권력과 성역을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드러내는 가장 노골적인 언어이기 때문입니다.도쿄 마

안현호 기자

[안현호 칼럼] 서울과 도쿄에 대한 가볍게 지나갈 이야기(3)

칼럼 · 오피니언

5화. 폭격도 비켜 간 성역과 청계천의 역설전쟁은 도시의 모든 가면을 벗깁니다. 평소에는 감춰져 있던 가치의 서열이 생존이 걸린 극한 상황 속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도쿄와 서울은 전쟁이라는 동일한 비극을 겪었지만, 그 폐허 위에서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다시 세웠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1945년 3월 10일 도쿄 대공습의 밤, 도시는 지옥 그 자체였습니다. 미군의 폭격은 목조 가옥이 밀집한 시타마치를 순식간에 불바다로 만들었고, 하룻밤 사이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도쿄는 거

안현호 기자

[안현호 칼럼] 서울과 도쿄에 대한 가볍게 지나갈 이야기(1)

칼럼 · 오피니언

1화. 세상에서 가장 비싼 어둠과 101미터의 침묵도쿄라는 거대 도시를 떠올릴 때 뇌리에 가장 먼저 스치는 이미지는 대개 빛입니다. 시부야의 스크램블 교차로를 가득 메운 인파, 신주쿠 가부키초의 맹렬하게 점멸하는 네온사인, 소비와 정보가 동시에 분출되는 화면들입니다. 자본주의는 본래 소음과 빛을 먹고 자라는 생물과 같아서, 더 크고 더 밝은 것이 곧 진보라는 믿음이 도쿄의 표면을 지배해 온 듯 보입니다. 하지만 도쿄역 마루노우치 북쪽 출구를 나와 황궁, 즉 고쿄 방향으로 걷기 시작하면 도시는 갑자기 태도를 바꿉니다. 소리는 낮아지고

안현호 기자

[안현호의 시선] 너와 엄마 아빠를 생각하며 세상에 써 보내는 소리 없는 에세이

칼럼 · 오피니언

[시시사매거진 안현호 기자] 상실의 계절, 텅 빈 교실의 풍경바람이 제법 매서운 겨울의 초입입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매일 습관처럼 마음으로 빕니다."별이 된 대전 A초등학교 김A양의 엄마 아빠가 조금은 덜 슬프기를."2025년이라는 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참으로 아픈 기억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지난 2월이었죠. 대전의 한 초등학교 1학년 교실에서 8살 김A양의 시간이 영원히 멈췄습니다. 아이가 세상에서 부모님 다음으로 믿고 의지했던 사람, 담임 선생님 명모 씨(48)의 손에 들려 있던 것은 칭찬 스티커가 아닌 흉기였습니다."누구든

안현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