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공간의 심리학 6
집, 보여주고 싶은 거실과 감추고 싶은 방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현관문 앞에 섭니다.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이 열리는 소리. 그 익숙한 기계음과 함께 긴장이 풀립니다. 밖에서 입었던 사회적 가면을 벗어던지고 가장 무방비한 나로 돌아오는 순간이지요.하지만 안도감도 잠시, 현관을 들어서는 순간 우리의 눈은 빠르게 집안을 스캔합니다. 아침에 허둥지둥 나오느라 벗어둔 신발들, 며칠째 뜯지 않은 택배 상자, 싱크대에 쌓인 설거지거리. 현관문을 여는 것은 휴식의 시작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밀린 숙제와의 마주침이기도 합니다. 집은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안식처여야 하지만, 역설적이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현관문 앞에 섭니다.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이 열리는 소리. 그 익숙한 기계음과 함께 긴장이 풀립니다. 밖에서 입었던 사회적 가면을 벗어던지고 가장 무방비한 나로 돌아오는 순간이지요.
하지만 안도감도 잠시, 현관을 들어서는 순간 우리의 눈은 빠르게 집안을 스캔합니다. 아침에 허둥지둥 나오느라 벗어둔 신발들, 며칠째 뜯지 않은 택배 상자, 싱크대에 쌓인 설거지거리. 현관문을 여는 것은 휴식의 시작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밀린 숙제와의 마주침이기도 합니다. 집은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안식처여야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끊임없이 쓸고 닦고 치워야 유지되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노동의 현장이기도 하니까요.
요즘 SNS를 보면 그림 같은 집들이 많습니다. 잡지에서 튀어나온 듯 완벽하게 정돈된 거실, 물기 하나 없는 주방, 감각적인 소품들. 그런 ‘남의 집’ 사진들을 보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나의 집을 둘러보면 한숨이 나옵니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모델하우스나 고가의 아파트를 이상적인 집의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델하우스는 사람이 살지 않는 곳입니다. 생활의 냄새가 제거된 세트장이죠. 그런데도 우리는 끊임없이 그 비현실적인 기준에 맞춰 우리 집을 검열합니다. 누군가 온다고 하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서랍 속에 쑤셔 박기 바쁩니다.
왜 집에서조차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게 될까요? 집 특히 아파트가 단순히 거주하는 공간을 넘어, 나의 취향과 경제력, 그리고 이만큼 삶을 잘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보여주기 위한 거실의 완벽함에 집착할수록, 우리는 정작 집에서 편히 쉬지 못하고 집주인이라는 역할을 연기합니다.
집안을 찬찬히 둘러보니 수많은 물건들 중 지난 1년간 한 번도 쓰지 않은 것이 넘쳐 납니다. 살이 빠지면 입겠다며 10년째 옷장에 걸려 있는 옷과 어딘가 쓸 데가 있겠지 싶어 모아둔 쇼핑백과 빈 상자들, 무슨 기계의 부속품인지도 잊어버린 정체불명의 케이블들.
집은 어쩌면 거대한 기억의 저장소이자 물건들의 무덤인지도 모릅니다. 물건을 버리지 못합니다. 거기엔 과거의 추억이 묻어 있거나 혹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물건에는 무게가 있습니다. 단순히 물리적인 무게뿐 아니라, 그것을 관리하고 보관해야 하는 심리적인 무게가 있습니다. 꽉 들어찬 수납장과 발 디딜 틈 없는 베란다는 우리에게 무언의 압박을 가합니다. 물건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물건이 공간을, 나아가 우리의 삶을 점령하고 있는 상황. 비워내지 못하는 집에서는 쉬지 못하는 무게가 있습니다.
모든 집에는 무대와 무대 뒤편이 존재합니다. 손님에게 보여주는 깔끔한 거실이 무대라면, 온갖 잡동사니를 몰아넣은 창고 방이나 옷 무덤이 되어버린 안방의 한구석은 무대 뒤편이 되겠습니다. 완벽하게 세팅된 무대 위에서 우아한 삶을 연기하고 싶어 하지만 진짜 삶은 그 너저분한 무대 뒤편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피곤에 절어 소파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TV를 보는 모습, 배달 음식 용기를 치우지 못해 식탁 한쪽에 밀어둔 모습, 그것이 진짜 민낯입니다. 그리고 집은 마땅히 그런 민낯을 기꺼이 받아주는 공간이어야 합니다.
모델하우스처럼 완벽한 집은 보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사람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약간은 흐트러져 있고, 손때 묻은 물건들이 뒹굴고, 내가 어디에 있어도 마음 놓고 망가질 수 있는 집. 그런 집이야말로 강박을 내려놓지 못하는 우리를 진정 위로하는 공간이 아닐까요.
결국 공간은 그곳에 사는 사람을 닮습니다. 아무리 비싼 가구로 치장하고 모델하우스처럼 꾸며놓아도, 그 안에 사는 사람의 습관과 온기가 스며들지 않으면 그곳은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불편할 뿐입니다. 마음이 편안해지면 공간도 편안해 합니다.
이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꾸민 보여주기식강박을 조금 내려놓는 건 어떨까요. 잡지에 나오는 완벽한 집이 아니라, 내가 가장 편안해하는 낡은 소파가 있는 집, 조금 지저분해도 내 손길이 닿은 물건들이 편안하게 놓여 있는 집.
이번엔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한번 집안을 천천히 둘러보시죠. 이 공간이 나에게 어떤 말을 걸고 있는지, 때로 많은 물건들로 숨 막혀 하고 있지는 않은지, 아니면 주인의 따뜻한 눈길을 기다리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가장 좋은 인테리어의 출발은 완벽한 정돈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꼭 필요한 정돈의 집에 사는 사람이 편안해져서 웃는 웃음소리 일 수 있습니다.
© 시사매거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칼럼 기사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