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발리에서 배우는 문화산업
한국문화 없는 한류, 발리 창조경제, 지속가능관광 운영 원리
한물간 창조경제? 아시아에서는 여전히 국가발전 전략의 핵심2013년 박근혜 정부 국정과제로 주목받았던 '창조경제'는 탄핵 정국과 함께 국내에서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동남아시아 다수 국가에서는 지금도 국가발전 전략의 핵심 기조로 자리잡고 있다. 특히 인도네시아 발리는 수백 년간 이어진 전통 문화와 예술을 기반으로 현대 경제를 이끌며 창조경제의 모범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인도네시아 창조경제연구소(Indonesia Creative Economy Agency, BEKRAF) 보고서(2019)에 따르면, 관광, 예술, 축제, 공예
한물간 창조경제? 아시아에서는 여전히 국가발전 전략의 핵심
2013년 박근혜 정부 국정과제로 주목받았던 '창조경제'는 탄핵 정국과 함께 국내에서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동남아시아 다수 국가에서는 지금도 국가발전 전략의 핵심 기조로 자리잡고 있다. 특히 인도네시아 발리는 수백 년간 이어진 전통 문화와 예술을 기반으로 현대 경제를 이끌며 창조경제의 모범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인도네시아 창조경제연구소(Indonesia Creative Economy Agency, BEKRAF) 보고서(2019)에 따르면, 관광, 예술, 축제, 공예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발리의 문화경제 모델은 지역 공동체를 활성화하고, 동시에 세계 시장에서도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에서는 주로 허니문 여행지나 휴양지로 알려진 발리가, 사실은 문화와 경제를 융합해 미래를 열어가는 역동적 지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롭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관광창조경제부’로 국가 미래를 설계하는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는 2011년 문화관광부를 ‘관광창조경제부’로 개편하며 창조경제를 국가 핵심 전략으로 공식 채택했다. 이는 한국이 창조경제를 국정과제로 내세우기 2년 전의 일이다. 조코 위도도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문화 콘텐츠, 전통공예, 디지털 산업을 집중 육성하며 창조경제를 국가발전의 근간으로 삼았다.
“인도네시아에는 석유나 천연가스보다 더 중요한 자원이 있습니다. 바로 2억7천만 국민의 창의적 재능입니다.”
인도네시아 관광창조경제부 빈센스 저마두 차관의 말이다. 한국에서는 ‘창조경제’라는 용어가 사실상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동남아시아에서는 여전히 국가 전략의 핵심 키워드로 살아 숨 쉬고 있다. 한국과 동남아시아의 창조경제, 그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한국의 창조경제, 무엇이 달랐나?
한국의 창조경제는 주로 IT 기반 스타트업과 벤처기업 육성에 초점을 맞췄다. 반면 발리로 대표되는 인도네시아의 창조경제는 ‘문화적 정체성’과 ‘전통’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근본적 차이가 있다.
동남아시아 문화전문가 김정훈 교수는 “한국의 창조경제가 하드웨어와 기술 중심으로 흘렀다면, 발리의 창조경제는 전통문화와 지역 공동체의 창의성을 경제적 가치로 승화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분석한다.
박재아 전 인도네시아관광창조경제부 한국지사장은 “발리의 문화기반 창조경제는 지역 고유의 정체성을 보존하면서도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균형 잡힌 접근법을 취했다”며 “한국 각 지역이 가진 문화적 자산의 가치가 재발견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발리의 5대 창조경제 성공 전략
1. 음식문화의 경제적 가치화
발리는 바비굴링, 나시고렝 등 독특한 전통요리를 세계적 관광상품으로 발전시켰다. 제주도 흑돼지 요리나 강원도 감자떡과 같은 한국의 지역 음식도 체계적인 스토리텔링과 관광 연계로 글로벌 콘텐츠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특히 주목할 점은 발리의 ‘쿠킹클래스’다. 일반 식당이 단순히 음식을 파는 데 그치지 않고, 요리 과정을 체험상품화하여 부가가치를 높인 전략은 한국의 지방 도시들이 참고할 만하다.
2. 전통공예의 현대적 재해석
한국의 도자기, 한지, 나전칠기 등 전통공예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우수한 문화자산이지만, 경제적 가치로의 연결은 미흡한 실정이다. 반면 발리의 바틱(천연염색 직물)은 전통과 현대를 잇는 패션 아이템으로 재탄생해 관광객들의 필수 구매 품목이자 지역경제의 중요한 수입원이 됐다.
"인도네시아의 바틱이 세계적인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잡은 것처럼, 한국의 전통문양과 공예기법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하면 글로벌 시장에서 충분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김영수 전 한국콘텐츠진흥원 인도네시아 비즈니스센터장은 한국과의 문화산업 협력도 가능함을 강조했다.
3. 일상화된 예술문화
발리에서는 매일 저녁 마을 곳곳에서 케착 댄스, 레공 댄스와 같은 전통공연이 열린다. 이는 관광객 유치 전략을 넘어 지역 예술가들의 일자리 창출과 문화유산 보존이라는 일석이조 효과를 낸다.
한국에서도 안동 하회마을의 하회탈춤, 남사당패 공연 등이 비슷한 가능성을 보여주지만, 일회성 행사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박재아 전 지사장은 "한국 지방도시들도 정기적인 문화공연을 일상화하여 꾸준히 관광객 유입과 지역 예술가 고용 창출을 동시에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한다.
4. 디지털 기술과 전통의 융합
2022년 기준 인도네시아 창조경제는 GDP의 7.4%를 차지하며, 1,700만 개 이상의 일자리를 창출했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전통문화 요소를 디지털 콘텐츠로 재창조하는 움직임이다.
발리의 젊은 기업가들은 힌두교 설화와 전통 춤을 모티브로 한 모바일 게임, 애니메이션을 제작해 세계시장에 진출하고 있다. "한류의 글로벌 성공에도 불구하고, 우리 전통문화 요소를 현대적 디지털 콘텐츠로 재해석하는 노력은 상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발리는 이 점에서 앞서 나가고 있습니다." 김정훈 교수의 지적이다.
5. 스토리노믹스(Storynomics)의 활용
발리는 지역의 구전설화, 전설, 주민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체계적으로 수집해 관광 콘텐츠로 개발하는 '스토리노믹스' 전략을 성공적으로 추진해왔다. 단순히 경관을 둘러보고 사진 찍는 관광이 아니라, 그 장소에 얽힌 이야기를 통해 관광객의 몰입도와 체류시간을 늘리는 전략이다.
발리는 전통 마을 투어에서도 마을 어르신들이 직접 관광객들에게 지역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스토리텔러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이를 통해 관광객은 발리의 역사와 문화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현지인들은 자신들의 이야기가 가치 있게 여겨지는 자부심을 얻는다.
"한국 각 지역에는 수많은 민담과 설화, 근현대사의 흥미로운 사연이 숨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 자원을 발굴하고 관광 콘텐츠로 개발하는 노력이 시급합니다." 박재아 전 지사장의 말이다. "예를 들어 한국의 전통시장도 단순한 쇼핑 공간이 아닌, 그 시장에 얽힌 상인들의 사연과 지역 역사를 스토리텔링하면 더욱 매력적인 관광지가 될 수 있습니다."
한국의 문화다양성 도시들, 발리에서 배울 점
한국의 인천 차이나타운, 부산 차이나타운, 원주 다문화마을과 같은 문화다양성 지역은 발리의 성공을 벤치마킹할 가능성이 높은 곳이다. 이들 지역은 다양한 문화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나, 이를 경제적 가치로 연결하는 통합적 접근이 부족한 실정이다.
"한국의 지자체들은 여전히 문화다양성을 갈등 요소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발리의 사례는 문화다양성이 오히려 창조경제의 원천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김정훈 교수의 설명이다.
최근 일부 지역에서 혐중 정서가 확산되는 가운데, 문화다양성의 가치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중국인 관광객 감소로 인천 차이나타운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이곳의 120년 역사와 독특한 문화유산은 여전히 한국의 소중한 자산이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문화적 다양성을 갈등의 원인이 아닌 창의적 경제 발전의 동력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현재 서울 용산구는 '다문화 거리 활성화 사업'을 통해 이태원의 다양한 문화권 음식점과 상점들을 연계한 관광 프로그램을 개발 중이다. 이는 발리가 다양한 문화적 요소를 관광 자원으로 성공적으로 활용한 사례를 참고한 것으로, 국내 다문화 지역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시도 중 하나다.
"창조경제, 다시 주목해야 할 때"
최근 청년 실업률이 높아지고 지방도시의 인구 감소가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발리의 창조경제 모델은 한국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한국경제연구원의 최근 보고서는 "문화기반 창조경제가 활성화될 경우, 한국에서도 향후 5년간 최대 50만 개의 일자리 창출이 가능하다"고 분석했다.
박재아 전 지사장은 "한국의 창조경제가 단기적 성과에 집중하다 보니 지속성을 갖지 못했다"며 "발리처럼 지역 주민이 주도하는 상향식(bottom-up) 접근과 문화적 정체성에 기반한 창조산업 육성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한국의 많은 도시들이 기업 유치와 대규모 개발사업에 의존하는 도시계획에서 벗어나, 지역 고유의 문화자원을 발굴하고 이를 경제적 가치로 연결하는 '문화 중심 도시재생'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할 시점이다. 그리고 그 모델을 찾는 데 있어, 발리의 창조경제는 다시 한번 주목해 볼 가치가 있다.
글/ 박재아태평양기후위기대응협의회 사무처장, 태평양학회 이사, 팔라우 대통령 경제·관광 직속 자문, 조선대학교 대외협력 외래교수로 활동 중이며, 이화여대 사회학과 졸업 후 서울대 국제대학원 국제지역학 석사, 환경대학원 환경계획학 박사과정에 있다. 피지·사모아 관광청 한국지사장, 솔로몬제도 관광청 특별자문, 태평양 관광기구(SPTO)·인도네시아 관광창조경제부 한국지사장을 역임했으며, 섬 지역의 문화·생태 다양성을 기반으로 지속가능한 발전과 관광·문화 교류 활성화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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