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서 만나는 자랑스런 고구려 역사 탐방
질적으로 우수한 문화를 개화시킨 고구려. 많은 문화 유산이 중국이나 북한에 위치하여 쉽게 접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지만 조금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가까운 곳에서도 자랑스러운 우리 고구려의 유물과 유적을 만날 수 있다.



서울-돌무지무덤 ‘적석총’
송파구 석촌동에 위치한 3호분은 파괴가 심하여 전체적인 규모는 확인할 수 없었으나 기원전후부터 나타나는 고구려 무덤형식인 기단식 적석총이다. 이 무덤은 옛 고구려 지역이었던 만주 통구에 있는 장군총에 버금가는 큰것으로, 크기는 동서 길이 49.6m, 남북 길이 43.7m, 높이 4m이다. 4호분은 정방형으로, 3호분과 그 축조 방법이 매우 비슷한 적석총인데 여기에선 백제 초기의 연질토기 조각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5호분은 완전하게 발굴, 조사 되지 않아 묘곽의 구조와 유물에 관해서는 확실히 알수 없으나, 대개 가락동 제 1·2호분과 같은 구조로 추정된다. 이중 사적 제 243호로 지정된 것은 3호와 4호 적석총이다. 백제 시대 초기 무덤으로 추정되는 이 적석총은 삼국 시대 초기 백제의 성세를 짐작함과 동시에 백제의 지배층이 고구려 계통이라는 것도 추측할 수 있다.
문의:02-410-3410

강원-왕검이 쌓은 산성 ‘왕검성’
영월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4개의 산성중 우두머리 주성에 해당되는 고산성으로 영월읍 정양리에 위치하고 있어 정양산성으로 알려져 있다. 왕검성은 충주의 중원고구려비, 단양의 온달산성과 더불어 중부지방에 소재한 고구려의 문화유적 가운데 하나로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52호로 지정되어 있다. 왕검성의 크기는 둘레 771m, 성벽의 높이 4~10m, 폭 6m로 보존상태는 일부 무너진 곳이 있으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성문은 서쪽으로 정문과 수구문이 나있고, 그밖에도 남문, 북문, 동문 등의 유지가 남아있다. 성벽은 자연석과 할것으로 쌓였으며 동문과 북문 사이의 성벽은 규모가 크고 웅장하다. 성벽은 전체적으로 1/3 가량이 무너진 상태이나 북문과 정문사이가 가장 심하다. 당시 이를 조사한 정영호박사는 왕검이라는 명칭과 성의 축조방식으로 보아 축조시기는 고구려 때라는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문의:033-370-2531




충남-화엄종 10대 거찰 ‘갑사’
충남 공주시에서 19km 떨어진 국립공원 계룡산의 연천봉 서쪽계곡에 자리잡고 있는 갑사는 고구려의 승려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였는데, 이때가 420년(백제 구이신왕 원년)이다. 갑사는 화엄종 10대거찰의 하나로서, 절 안에는 많은 문화재가 있다. 특히 갑사진입로인 5리 숲길은 봄에는 황매화가 피고 여름이면 녹음이 지고 가을이면 단풍이 들어 장관을 이룬다. 용문폭포와 신흥암을 거쳐 약 3km 가량 이어진 갑사계곡은 여름철무더위를 식힐만한 곳이다. 해발 620m의 계룡산 금잔디고개를 넘어 동학사에 이르는 4.7km의 산길은 아이들과 함께 넘어볼 만하다.
문의:041-857-5178



충북-국보 제205호 ‘중원고구려비’
중원고구려비(423년 장수와 때로 추정)는 국보 제205호로 충주에서 장호원 방면 15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높이 203cm, 폭55cm로 1979년 발견된 국내 유일의 고구려비로 발견 당시 비문이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자연석의 형태를 그대로 비면(碑面)으로 삼고, 마멸이 심해 정확한 글자수는 알 수 없으나 대략 400여 자로 추정하고 있다. 비문은 고구려왕(장수왕으로 추정)이 이 중원 지역에 진출해서 고구려의 영토임을 확고히 함과 동시에 신라왕의 복속을 받아내는 내용으로 판독되고 있다. 이 비는 고구려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 발견 이후로 가장 큰 고구려비 발견이라는 점과 당신의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비석이라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문의:043-850-5165

*경북-사적 제313호 ‘벽화고분’
경북 영주시에 위치한 순흥읍내리 벽화고분은 사적 제31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학술적, 8228, 문화재적으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이 고분의 축조연대는 대략 539년 쯤으로 추정되고 있다. 내부구조는 연도가 마련된 석실분(石室墳)으로서 연도를 통해 들어가면 시신을 모신 현실이 있고, 이 현실의 동쪽으로 관을 올려 놓았던 관대(棺臺)가 비교적 높게 마련 되어 있으며, 아울러 규모가 작은 보조관대도 현실의 서북 모서리에 마련 되어있었다. 벽화는 천장을 제외한 내부의 모든 벽면과 관대의 측면까지 채색화(彩色畵)를 그렸으며 또한 연도의 좌우벽에 힘이 센 장사상(壯士像)을 그렸다. 이 고분에 있는 벽화를 통해서 우리나라 삼국시대 회화는 물론 당시의 종교관, 내세관, 그리고 고구려와의 문화교섭 등을 이해하는 귀중한 자료임을 알 수 있다. 특히, 5세기까지 고구려의 영향력이 정치적, 문화적으로 이 지역에 침투했음을 잘 알려주는 유적으로, 현재 학자들의 새로운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문의:054-639-6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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