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유광남
저자 | 유광남

 

[시사매거진287호] “누구도 일본의 내륙으로 역습을 가하리라고는 생각 못했었다. 그걸 충선은 성공리에 완수했다. 다른 사람들은 전혀 꿈도 꿔보지 못하는 일을 그는 해낸다. 내가 추구하는 나라가 강해지기 위해서는 강력한 상상을 해야 한다. 감히 생각지 못한 발상을 해야 한다! 난 충선의 의견을 존중한다.”

김충선이 손짓에 따라 머리를 맞댈 정도로 모두가 가깝게 모였다. 밀담을 나누기 위해서였다.

“보름 후, 일본천황이 조선의 왕 앞에서 항복문서에 서명을 하기 직전에 거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일본 천황의 항복은 새 왕조에서 하게 되며, 그 전 날에 당쟁과 모략만 일삼는 대부분의 중신들이 처단될 것입니다.”

그들은 호흡조차 흔들리지 않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야가 김충선에 의해서 압도당하는 분위기였다. 김충선이 부탁했다.

“도원수 권율은 장군께서 직접 맡아 주십시오.”

통제사 이순신은 어제의 이순신이 아니었다. 그는 새로운 이순신이었다.

“그러지!”

기왕에 결정한 반란이라면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것이 이순신의 철칙이었다. 조일전쟁에서 그러한 무적의 불패 신화가 가능했던 것은 완벽한 준비였다. 성공에 대한 철칙과 완벽한 준비는 그를 언제나 승리자로 이끌었다. 김충선은 명나라와의 회동에 앞서 놀라운 신분을 지니고 있는 인물과의 밀담을 주선했다.

“누르하치입니다. 여진의 칸!”

단단해 보이는 체구에 코가 높고 부리부리한 눈을 지니고 있는 사십 대의 장한이 뒷짐을 지고 들어섰다. 제법 값비싸 보이는 장식품을 걸치고 있었고 보석이 박혀있는 칼을 두 자루나 차고 있었다. 북방의 오랑캐들을 하나로 통일 했다면 그 위세와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과연 누르하치는 일신에 자신감이 넘쳐흐르며 기운이 범상치 않았다. 이러한 인물이 몸소 전란의 조선 땅에 잠입 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대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 또한 누르하치란 걸출한 인물이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내심 이순신은 감탄을 금할 길이 없었다.

‘영웅을 만났구나.’

누르하치 역시 명성으로만 들어왔던 이순신에게 존경심을 표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선을 위기에서 구해 낸 명장! 대 청나라의 시조가 되는 누르하치와 새로운 왕조 이순신의 나라를 꿈꾸는 이들의 회합은 밤이 새도록 길게 이어졌다. 그리고 일본 천황을 불모로 앞세워 이순신은 한성으로 올라왔다.

“도원수를 불러라!”

권율 역시 조선 왕에게 항복하는 일본천황의 굴욕적인 현장에 참석하기 위해서 한성에 머물고 있었다. 이순신보다도 상관의 신분이었으나 일본으로 출정하여 천황을 포로로 잡아 온 후, 관직과는 별도로 전세가 역전되어 있었다. 도원수 권율이 즉각 방문을 해왔다.

“통제사가 날 부르실 때도 있습니다...그려?”

조일전쟁 내내 조선의 안위를 위해 최선을 다한 노장군이었다. 이순신은 그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도원수! 부디......!”

하지만 그도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무장이었다. 이순신의 낌새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순간에 등 뒤에서 섬광이 사선으로 그어졌다.

“허걱!”

권율이 돌아보자 건장한 체구의 젊은 청년이 칼을 비스듬히 내려 잡고 있었다. 그는 몹시 긴장한 탓인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넌 누구냐?”

칼을 든 청년의 발음이 떨렸다.

“이...완!

이순신의 조카 중 한 명이었다. 권율이 희미하게 웃었다.

“떨...지마라. 아주 잘...했다.”

이순신은 대장검을 손수 꺼내었다.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무장으로서의 예우를 갖추는 일이다. 조카 완을 바라보고 있는 권율의 목을 향하여 칼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서걱!’ 하는 징그러운 음향과 더불어서 피가 뿜어지고 목이 떨어졌다. 피는 선홍빛 선혈이었고 권율의 비명은 끝내 없었다. 이순신은 노장군의 수급을 아주 소중하게 수습했다.

“끝까지 노장군의 품위를 유지 하셨소이다.”

이순신은 하얀 창호지에 도원수 권율의 피범벅의 수급을 올려놓다가 깜짝 놀라고 만다.

“이게 누구...? 서애대감?”

어찌 된 영문인가? 서애대감 유성룡의 목이, 거기 잘려 있었다. 조선의 명재상이요, 이순신에게는 언제나 든든한 배경이 되어줬던 영의정이었다. 이순신은 이 순간 제정신이 아니었다. 분명 도원수 권율의 목을 내리쳤건만, 어떻게 유성룡의 목이 떨어질 수 있는가? 이순신은 짐승과도 같은 비명을 끝도 없이 질러댔다.

“으아아아!!”

그때였다. 누군가가 아득한 곳에서 자신을 부르며 흔들어 깨웠다.

“장군, 소신이옵니다. 정신 차리십시오. 알아보시겠습니까? 이제 모두 끝났습니다.”

이순신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대장검도 보이지 않았고 유성룡의 머리도, 권율의 목도 보이지 않았다. 핏물에 잠겼던 모든 것이 사라져 있었다. 그때서야 김충선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수척한 모습이었다.

“장군, 꿈을 꾸셨습니까?”

이순신은 감옥 안에서 반란의 꿈을 꾸었다. 일본의 침공도, 천황을 사로잡은 것도, 권율의 목을 친 것도 한 낱 꿈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이순신의 나라도 꿈이었던가?

“그랬던 모양이다.”

“이제 풀려나실 수 있습니다. 장군의 장계가 발견 되었습니다.”

“충선아,”

“예...장군 아버님!”

이순신의 눈에서 여태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섬광이 어른거렸다. 눈물이 잔뜩 고여 있는 그곳에 핏빛이 머물러 있었다.

“장계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그럼 어찌 되었던 거냐?”

“꿈을 꾸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아마 그 꿈대로 되었을 겁니다!”

이순신이 야윈 몸을 처음으로 자기의 의지대로 일어났다. 사야가 김충선이 부축했다.

“내 꿈대로 되었을 거란 말이지?”

이순신의 눈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물이 떨어졌다.

제 34장 이순신과 김충선

맑음, 더없이 맑음

백의종군으로 방면이 되어 장군은 우리 곁으로 돌아온다.

지치고 병 든 육체가 애처롭다.

30일 간의 절망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순신의 나라가 허망한 것은 아니다.

끝나지 않은 전쟁을 장군은 염려 한다.

그는 또 승리할 것이다.

나는 장군이 꾸고자 하는 꿈을 신뢰한다.

어쩌면 이순신의 꿈은 이제 부터이다.

내 꿈도 시작이다!

(사야가 김충선의 마지막 난중일기(亂中日記) 1597년 3월30일 경신 )

김충선이 선조와의 담판을 끝내고 돌아 왔을 때, 정릉동행궁 앞에서 기다린다고 약조했던 장예지는 어디론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가 어디로 갔는가?’

김충선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녀를 찾아서 반나절 이상을 육조거리와 안국동, 청계천 수표교 등으로 맴돌았다.

‘기다리겠어요!’ 하며 미소 짓던 마지막 모습만이 아련했다. 정신없이 뛰어 다니다가 여진으로 떠났던 일패공주 야율미와 마주쳤다. 그녀는 몽고말 위에서 다소 오만한 자세로 김충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반갑소. 도성으로 언제 돌아 온 것이요?”

“그 질문은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한 후 나도 답변하겠어요.”

김충선은 장예지의 실종으로 마음이 몹시 초조하였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건성으로 대답을 했다.

“어서 물어 주시오.”

야율미는 그의 태도에 내심 불만이 가득 찼다. 사실 천리 길을 멀다하지 않고 여진으로 달려갔던 것은 김충선의 대업을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당연히 지금 돌아왔으니 안아주고 노고를 치하해도 모자랄 판이었다. 진작 그를 마주쳤지만 정신나간 사람마냥 누굴 찾는 눈치이기에 뒤만 졸졸 따라 다녔던 것이다.

“누구죠? 누굴 그리 애타게 찾고 있는 거예요?”

“아니요.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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