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유광남

[시사매거진285호] 제 32장 마지막 승부

이순신의 실종된 장계.
그것이 조선의 명운(命運)을 갈랐다.
광해군은 비운의 왕세자 이지만 반전을 노리고 있다.
중증을 앓고 있는 그가 가엾다.
익호장군 김덕령을 가슴에 품고 있는 그의 눈물이,
나의 마음을 움직인다.
조선의 왕은, 왕 답지 못한 왕은 그래도
마지막 선택이 다행인가? 불행인가?

(사야가 김충선의 난중일기(亂中日記) 1597년 3월28일 무오 )

그 날, 광해군은 실토했다.

“이순신의 장계를 내가 숨기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난 부왕이 저지르려고 하는 만행의 증좌로 그것을 보관하고 있었노라.”

통제사 이순신을 고문하여 어떠한 형태로든지 죽게 만든다면 민심은 크게 동요되고, 삼도수군을 비롯한 군사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지며 선조에 대한 반감이 작용하게 될 것이었다.

“세자 저하께서는 통제사가 사사(賜死) 당하거나 참형(斬刑), 혹은 모진 고문으로 죽음을 당하게 된다면 전국의 뜻있는 유생들과 전쟁 중의 군사들, 그리고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분노할 것임을 미리 파악하고 계시는 거 아닙니까?”

김충선의 송곳 같은 예리함을 왕세자 광해군은 서투른 거짓말로 모면하려고 하지 않았다.

“물론이다. 난 부왕처럼 미련스럽지 않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을 어찌 할 소냐. 부왕이 끝내 통제사를 나의 장수 익호 김덕령처럼 누명으로 죽인다면 난 이 통제사의 서장을 만천하에 공개할 작정이니라.”

장예지는 그런 광해군의 모습에서 애처로움을 발견했다. 궁지에 몰려 있기에 이제는 사력을 다한 광기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저하!”

“왜 내가 그리 못할 성 싶으냐? 부왕이 두려워서...무서워서...... 익호장군이 그리 참담하게 죽어갈 때처럼 쥐새끼가 되어 숨어 있을 것으로 보여 지느냐? 그런 짓은 이제 그만둘 것이다.”

김충선은 짧은 시간에 상념(想念)한다. 광해군은 비정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진정 그렇지는 않다. 그는 무력한 왕세자로서, 세자의 보위자체도 불안한 상태에서 일거에 국면을 뒤집으려 하고 있다. 그는 무서운 또 하나의 권력 숭배자이다.

“조선 천지에서 개벽(開闢)이 일어날 것을 고대 하시는 거군요. 통제사 이순신의 희생을 딛고 광해군 저하의 세상을 기대하시는 거였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왕세자 광해군의 눈 밑의 그늘이 더욱 짙어졌다. 그리고 수족을 점차 부들거리면서 떨기까지 했다.

“그래.... 바로 그거다. 난 오직 그 때만을 고대한다.”

장예지가 놀라서 소리쳤다.

“저하, 고정하소서!”

광해군의 눈에는 초점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난 두렵다! 무시무시해서, 상상만 해도 온 몸이 떨려온다. 부왕은 이미 나의 술수를 읽고 있을 것이다.”

사야가 김충선은 흐려지는 왕세자의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노력했다.

“세자 저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장계를 소신에게 넘겨주소서. 추호도 저하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처리 하겠사옵니다. 주상전하의 의심과 질책도 없을 것입니다. 통제사를 구원하고 저하의 불안한 심기를 해소할 것입니다.”

광해군은 이순신의 장계를 확인하고 그에게는 어떤 죄목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선조는 만들 수 없는 죄를 뒤집어 씌어 통제사를 의금부로 잡아 드렸다. 그리고 백성의 신망(信望)에 비례하여 이순신을 철저히 응징 할 참이었다. 통제사 이순신의 종말은 두터운 백성들의 믿음만큼 절망적일 수밖에 없었다. 광해군은 익호장군 김덕령의 고문 때 부왕의 서슬 퍼런 공포를 맛보았다. 익호장군을 살려 달라고 애걸하는 그에게 왕이 노성을 질렀다.

‘너의 신하라고? 너를 위한 장수란 존재할 수 없음을 모르는가? 아직은 과인의 조선이니라! 넌 세자일 뿐이다! 아직은! 아직은 말이다! 그리고 방심하지마라. 전란으로 인해서 분조를 잠시 운영했을 뿐이다. 넌 왕이 아니다. 왕을 흉내 내어서는 안된다!’

‘아바마마, 그는 충성스러운 신하이옵니다! 부디...소자의 청을 들어 주소서!’

그때 선조는 추악했다.

‘김덕령의 충심은 알고 있다. 그러나 세자의 신하를 자처하였기에 과인이 폐기(廢棄)하는 것이다!’

광해군의 눈에서 처절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나왔다.

“폐기라고 하였다! 아바마마가 나의 신하에게 그렇게 말했다. 나 때문에 익호장군 김덕령은 맞아 죽은 것이다! 으으윽......”

장예지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숨죽여 오열했다. 김충선은 왕세자가 지니고 있는 절망과 아픔을 이해했다.

“세자저하, 옥체를 보존하셔야 합니다. 강건해야 왕권을, 보위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부왕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다.”

광해군이 애원했다.

“날...좀 도와주구려.”

사야가 김충선은 숱한 사선(死線)을 경험한 무장이었다. 그것도 단순한 전쟁터에서 뿐이 아니었다. 조국을 등지는 가운데 봉착된 난관이 어디 하나 둘이었겠는가? 임기응변(臨機應變)이 고도로 발달된 조일인(朝日人)이 바로 그였다.

“장계는 통제사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부왕과의 대립은 그 장계를 포기함으로 해소될 것입니다. 조선의 충신도 살리고 세자 저하도 미혹(迷惑)에서 벗어나시는 길이지요.”

“아바마마는 내가 그것을 은닉하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날 용서치 않을 것이다.”

“장계는 동궁전에서 발견되었으나 그것의 주인은 세자 저하가 아니시면 되는 겁니다!”

광해군은 얼떨떨해 하면서 김충선을 간절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럼 누가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한단 말인가?”

“정녕 임해군이 소장하고 있었더란 말이냐?”

선조가 경악으로 물든 음성을 끄집어냈다. 김충선은 태연하게 시인하였다.

“동궁전으로 입궁하시던 왕자 임해군의 손에 들려 있었습니다. 황송스럽게도 왕자께서는 매우 취하시어 분별이 없으셨습니다.”

임해군은 선조의 첫째 왕자였다. 성정(性情)이 포악하고 술과 여자를 매우 좋아 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글 읽기를 싫어하고 궁녀들을 희롱하여 일찌감치 세자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지 못했다. 더구나, 조일전쟁에서 왜적의 포로가 되어 그 성품이 더욱 빗나가 매일 매일을 술에 절어 살았다. 김충선은 그런 임해군을 세자 광해군을 위하여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세자로부터 넘겨받은 이순신의 장계를 미리 만취하게 만든, 임해군에게서 구한 것으로 위장 했다. 선조는 의심이 많은 왕이었다.

“지금 당장 확인해도 되겠는가?”

김충선은 당당했다.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나이까?”

술에 만취한 임해군이 그 장계가 자신의 손에 들리게 된 까닭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선조는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 술만 먹으면 아직도 자신이 일본군에게 사로잡혀 있다는 망상 속에서, 주위 신하들에게 칼을 휘두르고 욕설을 퍼붓는 등 제정신이 아닌 그를 추궁해 본들 무엇을 알 수 있으랴. 그 사이에 사야가 김충선은 왕과 전면전을 치르고자 기선 제압에 나섰다.

“전하, 끝내 통제사 이순신의 죄를 물어야 하시겠나이까? 그 무모함으로 조선의 위기가 찾아올 것입니다. 소신은 일곱 살 때부터 일본의 전쟁터를 누볐나이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이십년간을 생사지간에 노출되어 투쟁해 왔습니다. 이제 몸에 배인 것은 동물과도 같은 직감입니다. 소신의 직감이 말하옵니다. 수군에서 통제사 이순신 장군이 사라진다면 그건 일본이 가장 원하는 일이고, 우리 수군은 패전을 면하기 어렵나이다. 남해바다를 저들에게 내어 준다면 결국 조선은 임진년과 같은 참화를 당할 것입니다. 상감께서는 아마 명국의 천병(天兵)을 거론하실 것이오나, 소신이 그들과 협공에 임했던 바, 그들의 전의(戰意)라는 것은 바람에 날리는 티끌과도 같은 것이어서 우리와 같은 집념, 용기는 전혀 없사옵니다. 또한 명국은 여진의 누르하치가 후금을 선언하고 국경선을 범하고 있으므로 종국에는 조선을 도와줄 수 없는 형편이옵니다. 조선은 우리 조선인의 손으로 방비해야 합니다. 이러한 시기에 유능한 수군의 장수를 욕보이는 것은 절대 삼가야 하는 일인줄 아뢰옵니다. 통촉하소서!”

조일인 김충선은 그저 한낱 무장에 불과하지 않았다. 선조 역시 간교(奸巧)하지만 일국의 통치자였다.

“과인이 설마 그 정도도 모를리가 있겠는가. 그에게 가혹했다.”

믿기 어려운 발언이 왕에게서 흘러 나왔다. 김충선은 새삼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것이 조선의 왕이로구나! 이것이 왕실이구나!’

왕이 지니고 있던 편협함과 약삭빠른 행위와 치졸함이 이 순간만은 용납되었다. 그래도 그는 일국의 군주였다.

“그는 실상 훌륭한 수군의 장수이다.”

김충선은 감읍하여 고개를 연방 조아렸다.

“황공하옵니다. 통제사의 역량으로 조선 수군이 강맹할 것이며 그 은덕으로 왜적의 재침략을 봉쇄할 수 있나이다. 이순신 함대는 남해의 자랑이며 희망이옵니다!”

“하지만......이대로 왕권의 부실함을 보여줄 수는 없지 않는가!”

“기회를 주옵소서!”

“기회는 그대들이 주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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