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33인 기리는 타종 & 국가 중요행사 알리는 타종

사진_안나겸 사회부 기자

[시사매거진] 2021년 새해를 맞아 해맞이를 기원하는 발길이 지척에 있는 높은 산과 바다로 흩어졌다. 코로나19팬데믹으로 인해 그동안 해돋이 명소로 일컬어지던 강릉 정동진과 울산 간절곶 등이 폐지되어 예년처럼 성대하고 아름다운 일출을 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길고 지난했던 한 해를 보내고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려는 사람들의 마음만큼은 해돋이가 잘 보이는 인근 고층을 향해 오르는 발걸음을 재촉한다. 또한 도심 속에 바쁜 일상을 누리는 현대인들은 송구영신(送舊迎新)의 의미로 2021년 신축년(辛丑年) 하얀 소띠 해를 맞이하는 보신각 33번 타종소리로 대신하며 새해 첫 하루를 시작한다.

서울시 종로구 종각역에 세워진 보신각 새종은 1398(태조 7)에 종을 처음 건 데서 기원한다. 경기도 광주(廣州)에서 주조한 종을 청운교(靑雲橋) 서쪽 종루에 걸었다가 다시 이곳으로 옮겨져 여러 차례 종루 화재와 쇠종채 소실, 쇠붙이 공출 등의 위기를 겪으면서 600여년의 세월을 견디었다. 현재는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112호 주철장 원광식 명인의 손길을 거쳐 보신각 새 종이 제작되었고 전통의 주조기술을 통해 천년의 소리를 재현해 그대로 전하고 있다.

천간과 지지를 사용해 주역의 <만세력> 시간을 나타냈던 육십갑자(六十甲子)’ 60간지 중 38번째인 신축년(辛丑年) ‘흰 소의 해를 맞아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종각역을 찾았다. 이곳은 서울시내 한복판에 위치한데다가 크고 작은 상점이 밀집해 있어 자가용보다는 버스나 지하철 등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유리하다.

1호선 지하철을 타고 종각역에서 내린 후 4번 출구로 나가면 옛 종각 자리에 보신각이 세워져 있다. 과거에는 이 건물을 종고루, 종각, 인경전 등으로 불렀는데 현재와 같이 된 것은 1885(고종 32) 315보신각이라는 현판을 내걸고 이름을 새로이 명명한 다음부터다. 그리고 1979년 세종 때의 규모에 맞춰 새 건물을 2층 누각으로 새로 짓고, 1985년에는 옛 보신각 동종(보물 제2)’ 대신 현 보신각 새 종을 제작해 걸었다.

보신상이 지워진 ‘보신각 옛종’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영면을 취하고 있다.(사진_안나겸 사회부 기자)
높이 318m, 입지름 228m, 중량 19.7t.태극문양과 무궁화꽃이 현대적 감각으로 간결하게 장식된 ‘보신각 새종’이 1984년 1월20일부터 타종을 하고 있다. 높이 282.2m, 입지름 222.4m, 중량 19.875t(5,300관). 1979년 새롭게 재건축 된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0호 보신각’. 현재는 1985년 제작된 보신각 새종이 걸려 있다.(사진_안나겸 사회부 기자)

쇠북 동종의 기원과 역사적 의미, ‘강력한 왕권 상징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쇠로 만든 ()’이 등장한 것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보통 악종(樂鐘), 시종(時鐘), 경종(警鐘), 범종(梵鐘) 등이 있는데 그중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쇠북 종은 범종이다. 이는 다시 동종(銅鐘) 혹은 청동종(靑銅鐘))으로 불리는 데 그 이유는 중국의 철제종과 달리 청동으로 주조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쇠북 범종은 서기 전 4세기 무렵인 청동기시대 큰 방울()’에서 기인한다. 1960년대 초 대전시 괴정동에서 발굴된 청동기시대 유적지에서 동()으로 만들어진 큰 방울()과 함께 거울과 칼이 출토되었다. 이는 신권과 왕권을 동시에 가진 최고 권력자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후 무속신앙이 불교계로 흡수되면서 큰 방울()은 불교의 동종인 범종으로 대치된다. 그리고 큰방울()과 작은방울()은 다시 편종, 특종, , , , , , ()과 함께 음악을 할 수 있는 악종(樂鐘)과 시종(時鐘)으로 발달한다. 그리고 드디어 725(신라 성덕왕 24)에 불교 상원사 동종이 최초로 제작된다. 46년 뒤인 771(혜공왕 7)에는 사상 최대의 성덕대왕신종이 등장한다. 씨족사회 무속신앙을 상징하는 방울 대신, 중앙집권 왕권국가를 상징하는 쇠북이 탄생한 것이다.

이후 조선시대로 넘어와 1396(태조 5)에 쇠북종을 제작하여 실험하다가 파열되어 다시 주조하고 그로부터 2년 뒤인 1398(태조 7)에 완성되어 본 모습을 드러냈다. 이는 새 왕조의 개국을 선포하는 행위였으며 그 왕조의 치리에 따라 도시와 통도대읍의 시간을 관장한다는 의미다. 이와 더불어 조선 왕조의 성덕과 아름다움을 널리 알린다는 뜻을 내포한다. 개국공신 권근(權近, 1352~1409)<종명서문(鐘銘序文)>종각(鐘閣)’을 새로 짓고 쇠북 종을 달았다고 기록했다.

새벽 인정과 저녁 파루를 알렸을 뿐만 아니라 한양도성 내 큰 화재가 발생해도 종을 쳐서 위험을 경고했다. <경국대전>에는 의금부는 화재 감시인을 정해 항상 종루에 올라 간망하게 하였는데 이궁이나 관청에 불이 나면 종을 치고, 민가에 불이 나도 종을 치게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1619년(광해군 11)에 종각이 구한말 고종 대까지 이른다.  
1895년(고종 32) 3월15일 옛 종각이 ‘보신각’이란 새로운 현판을 내걸었다. 

종각과 보신각, 역사의 부침 함께하다

당시 종각의 위치는, 현재 존재하지 않으나 ()중부 견평방이라 불리던 운종가 동편에 건물을 세우고 마룻바닥이 지면에서 높이 뜬 다락집으로 지었다. 동대문과 서대문을 연결하는 대로와 대광통교에서 남대문을 잇는 대로의 접점의 마루 누각에 쇠북종을 매달아 걸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곳을 종루(鐘樓)’라고도 불렀다.

하지만 현재의 위치에 종각이 다시 세워진 것은 1413(태종 13) 때로 내려간다. 태종 당시 행랑의 공역을 할 때 종묘 남로에 5칸의 층루를 세우면서 순금사 남쪽, 광통교의 북쪽인 통운교(通雲橋) 오늘날 종로 네거리로 종각을 옮겼다. 그 후 1440(세종 22)에 종루의 구조가 다시 고쳐졌다. 종루의 아랫부분이 십자형으로 뚫려 사람과 마차가 통행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8년인 지난 1458(세조 4)에는 큰 쇠북종을 다시 만들어 걸었다. 이 때 종루 크기는 동서 정면 5칸과 남북 측면 4칸으로 85.93m2(26)가 조금 넘는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1592년경 또 다시 종각이 불에 타 소실되고 쇠북 종 역시 파괴되었다. 30여년이 지나 1619(광해군 11)에 종각을 다시 짓고 종을 걸었는데 2층이 아닌 1층이었다. 또한 쇠북종 역시 1468(세조 14)에 주조한 것으로 정릉사에 있던 것을 원각사로 옮겼다가 원각사가 소실되자 1536(중종 31)에 남대문 안으로 다시 옮겨놓았다. 이후 1597(선조 30) 명례동 고개로 옮겼던 것을, 광해군이 종각을 복구하면서 또 다시 이곳 종각으로 이전해 걸었다. 높이 318m, 입지름 228m, 중량 19.7t이다.

이러한 종각의 역사는, 조선후기까지 4차례나 더 화재와 소실을 반복하며 중건되다가 1895(고종 32) 315일 옛 자리에 보신각이란 현판을 내걸고 새로운 이름으로 명명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그리고 19506.25전쟁 당시 포탄에 맞아 종각이 파괴되고 쇠북종 이 땅에 떨어졌다가 1953년에 다시 중건되었다. 1985년까지 32년 동안 해마다 빠지지 않고 33번 제야의 종소리를 울리던 쇠북 종은 잦은 화재와 파괴, 엄동설한의 혹한을 반복하다가 금이 가버린다. 세조 14년 이후 517년의 수명을 다한 쇠북종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영면을 취하고 1985년 새로 제작된 보신각 새종이 그 자리를 대치한다. 종각은 이보다 앞선 1979년 세종 당시 도면과 규모에 맞춰 2층 종루로 새 건물을 재현했다.

성덕대왕신종의 문양을 쓰다듬고 있는 국가중요무형문화제 제112호 주철장 원광식 명인이 현재의 ‘보신각 새종’을 제작했다. 

3·1독립운동기념터 보신각 앞, 독립운동가 33인 기리는 타종 시작

보신각 앞 광장은 19193.1독립운동을 기념하는 역사의 터전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철동 45-5번지인 이곳은 GPS좌표로 37° 3411.6N 126° 591.5E이다. 과거 19세기 후반에는 척화비가 있던 곳이고 20세기 초반에는 3.1독립운동기념터다. 고종의 생부 흥선대원군은 서양인의 조선침투를 방어하고 격퇴시켰다는 의미로 전국 주요지역에 척화비를 세웠다. 서울 종로사거리, 강화와 경주, 부산진, 함양군 등 전국 주요 도시에 세워졌다. 이곳은 그중 하나다. 척화비는 일제에 의해 모두 철거되고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부산광역시 용두산공원, 경상남도 함양군, 충청남도 홍성군 등에 몇 개가 남아있다.

이러한 역사적 정황을 토대로 1919년에는 3.1독립만세를 외치기 위해 이곳을 선택했다. 당시의 상황을 기념하는 표석문구에는 ‘191931독립만세시위의 중심지로 423국민대회를 개최하고 한성정부를 선포한 곳라고 기록한다. 종로 옛 종각 자리이고 현 보신각 자리인 이곳에서 191931일 시위 군중 대표가 타종을 하기 시작하여 서울지역 3·1독립만세 시위에 불길을 담겼다.
 

전통을 복원해 현대에 재현하는 주철 과정을 보여준다.

학생단 주도로 제2차 대규모 시위가 있었던 35일에는 남대문역 광장에서 여러 갈래로 나뉘어 시위를 진행하다가 정오에는 이곳 보신각 앞에 다시 모여 독립연설회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39일부터는 상인들의 동맹철시가 단행되었고, 312일에는 낭독자 문일평을 비롯해 안동교회 목사 김백원, 승동교회 목사 차상진, 조형균, 김극선, 명이항 등 기독교계 인사들과 만세시위에 참여한 백관형, 문성호, 유준근, 조재학, 고예진 등 유림계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애원서>라는 2 독립선언서를 발표한다.

이후 423일에는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국민대회 취지서>와 함께 국내 13도 대표 25명의 이름으로 작성된 한성정부 <선포문>을 배포하고 국민대회 공화만세를 외치며 깃발을 흔들었다. 이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법통성을 세우는 근거가 세워진다.

1945년 광복을 하고 난 후 1950625일 새벽 4시부터 195372722시에 이르기까지 6.25전쟁 기간인 25,752일간 침묵으로 일관하던 쇠북종이 1954년 새해부터 33번 타종하는 것으로 정례가 이뤄졌다.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독립운동가 33명을 기리기 위함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517년간 타종을 했던 보신각 옛종의 수명이 다해 1984120일 광복 40주년을 맞아 보신각 새종이 완성되어 새 시대를 예고하는 첫 종을 울린다.

국가 주요행사 타종식은 물론 한국을 대표하는 대종으로 등극한 보신각 새종은 성덕대왕신종을 근본으로 한다. 그러나 종신은 기존의 보신상을 제하고 태극문양과 무궁화꽃을 현대적 감각으로 간결하게 장식해 주조했다. ‘현 국가중요무형문화제 제112호 주철장 원광식(성종사 대포)’이 무려 18개월이라는 긴 기간 동안 옛 것을 복원하고 현대적으로 재현하는 작업을 통해 제작되었다. 높이는 282.2m, 입지름은 222.4m, 중량은 19.875t(5,300)이다.
 

보신각 앞 3.1독립운동기념터 표지석..(사진_안나겸 사회부 기자)

오경근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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