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는 도전과 불굴의 투지로 이루어낸 알토란 기업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저마다 한가지의 목표를 가지고 그것을 이루어 내기 위해 노력하고 좌절하면서 조금씩 나아가는 모습에서 진정한 인간미를 느낄 수 있다. 특히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언가를 이루어 냈다면 그 사람을 일컬어 ‘자수성가’라는 수식어를 붙이기도 한다. 성공한 사람들의 화려한 이면에는 늘 뜨거운 눈물과 쓰라린 상처가 있었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그냥 흘려버리는 경우가 있지만 그러한 상처와 눈물을 딛고 이루어낸 성공은 마치 진흙 속에서 씨앗을 내리고 핀 연꽃과도 같이 더욱 아름답게 빛을 발하는 것은 역경을 딛고 일궈낸 성공에 더욱 진한 향기가 묻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부산의 신평공단에 위치한 (주)한국레미콘은 지역의 레미콘 업계를 이끌고 있는 중견기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제품의 규격에 맞지 않으면 납품을 하지 않는 철저한 품질경영과 신뢰경영으로 업계를 선도하는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는 (주)한국레미콘을 10년간 최고경영자의 자리에서 진두지휘하고 있는 김윤기 대표를 만나 그의 진한 사업역정을 들어보았다.

시골 소년의 작은 소망
부산 신평공단의 (주)한국레미콘을 찾았을 때 김윤기 대표는 비즈니스를 위해 다른 곳을 방문하고 있었다. 시간을 조금 넘긴 뒤 나타난 김 대표는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고 자리에 앉았다. 그의 얼굴에서는 젊은이 못지않은 자신감과 강인함이 느껴졌다. 언뜻 보면 그의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여 별로 어려움을 겪지 않고 사업을 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러한 추측은 인터뷰를 하면서 기자의 예상이 빗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경북 성주가 고향인 김 대표는 어린시절에 버스가 하루에 몇 대도 들어오지 않는 오지에서 살았다. 명절이면 객지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 속속들이 찾아오곤 했는데, 몇 대 되지 않는 버스가 만원이 되어 더 이상 사람을 태울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애타게 기다리던 사람들을 태우지도 않고 가버리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에도 드물었던 자가용이나 택시를 타고 오는 사람이 있었는데 당시 소년이었던 김 대표는 그것을 보고 자신도 성공을 해야만 하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고. 군입대전 5년간 직장생활을 하면서 고향 집에 한번도 찾아간 적이 없습니다. 제가 성공을 하기 전에는 찾아가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오랫동안 집을 찾지 않아 어머님께서 저에게 편지를 쓰시면서 눈물자욱이 역력한 그 편지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는 차남이지만 88세의 어머님이 집에 계시는 것이 마음편하다고 말한다.

부산 레미콘 업계의 새로운 유통질서를 확립
직장생활 10년을 마지막으로 김 대표는 자신의 사업을 위해 사업아이템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1978년 8월 15일 김 대표는 하단동에서 시멘트 블록사업을 시작하여 전자동유압 성형기를 설치해 업계에서 가장 견고하고 튼튼한 시멘트 벽돌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는 시멘트 블록을 생산하면서 새벽 먼동이 트면 트럭을 직접 끌고 모래를 싣고 공장에 내려놓는 일을 몇 번을 하고 나서야 직원들이 출근을 했다고 한다. 직원이 출근을 하면 그때서야 자신은 아침식사를 했다고. “시멘트 블록 사업을 하면서도 납기일을 지키지 않은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직원들의 월급날을 한번도 어기지 않았고, 상여금도 다른 업체보다 많이 지급했기 때문에 당시 시멘트블록 업계에서 인력이동이 많았지만 저의 사업장에서는 그러한 문제가 빈번하지 않았습니다.”
승승장구하며 성장을 거듭하던 시멘트블록사업은 건축법의 강화로 점점 그 수요와 사업성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고, 김 대표는 새로운 사업을 찾아야 했다. “시멘트블록 사업을 하면서 늘 레미콘 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러한 생각을 현실로 옮겼지요. 기존의 레미콘 업체들이 이미 진출해 있는 상태여서 시장진입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1994년 한국레미콘을 법인으로 등록 했다. 그러나 당시의 레미콘 업계는 업체간의 반목과 질시가 심해서 단합이 잘 되지 않고, 단가 경쟁을 하는 등의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둘로 나누어져 있는 레미콘 공업협동조합과 협회를 통합하기 위해 1인집행체제 준비위원장을 맡아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업체 하나하나를 찾아다니며 발로 뛰기 시작했다.
“업권보호를 위하여 한 업체를 몇 번씩 찾아다니면서 부정적인면은 설득하고 회유도 하고 해서 결국은 부산 레미콘의 협회와 조합의 1인집행체제를 이루어 냈습니다. 지금 제가 6년 동안 협회 회장과 조합 이사장직을 맡고 있으면서 레미콘 업계의 고질적인 덤핑 판매나 관급수주의 문제점을 대부분 해결을 했습니다.”지금도 부산레미콘 업계의 건전한 유통질서 확립과 단합을 위해 대표자들과 자주 모임을 갖고 있다며 부산레미콘 업계의 단합을 위해 오늘도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자기개발에 대한 끊임없는 노력
김 대표의 책상에는 항상 몇 권의 책이 꼽혀 있다. 자신의 개발을 위해 새로운 책을 읽어야 사고가 유연해 지고 급변하는 시대를 따라잡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러한 생각 때문일까. 그는 바쁜 일상 중에서도 야간대학을 다니면서 젊은 학생들보다 열심이다.
“대학에서 리포트를 과제를 내면 직접 자료를 찾고 자필로 작성해서 제출합니다. 그렇게 하나하나를 알아갈 때의 기쁨이 무엇보다도 크기 때문입니다.”바쁜 일상에 힘이 들기도 하지만 학교에서 무엇인가를 배운다는 것에 상당한 만족을 느낀다고 김 대표는 밝힌다. 최고경영자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김 대표는 사업이라는 것은 운에 맡겨서는 결코 되지 않는다며 실현 가능한 장기적인 계획과 세심한 검토를 거친 후에 과감한 도전정신으로 끝까지 밀고 나간다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비 CEO들에게 당부한다.
올해 제40회 저축의 날에서 저축대상을 수상하기도 한 김 대표는 적금 통장이 무척이나 많다. 한 은행에서 21년 만기의 적금을 17년 이상 적금을 넣고 있는 통장도 있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지역사회를 위해서도 많은 봉사활동과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 김 대표는 87년 사하 청년회의소 회장을 비롯해 하단동 동정자문위원, 해동고등학교 육성회장, 사하경찰서 초대, 2대 방범 자문위원장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적극적인 사회, 봉사활동으로 지역주민의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인고의 세월을 견딘 후에 피는 꽃의 향기가 만리(萬里)를 가듯이 (주)한국레미콘의 김윤기의 삶에서 진한 사람의 향기가 느껴지는 것은 그의 열린 생각과 끝없는 도전정신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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