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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세력의 재집권 야욕으로 얼룩진 한국의 민주주의-「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6, 17출간
- “광주항쟁을 빼놓고는 그 이후 역사를 설명할 수 없다”
  • 신혜영 기자
  • 승인 2019.05.20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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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서중석, 김덕련 | 출판사 오월의봄


군홧발에 억눌린 한국 현대사의 기록

[시사매거진=신혜영 기자] 5·18민주화운동, 즉 광주항쟁은 깨어있는 민중이 민주사회 발전의 원동력임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된 운동으로 기록되고 있다. 광주 시민들은 군부세력에 굴복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향해 스스로 싸웠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의 죽음을 계기로 한국 사회는 마땅히 민주화로 나아갔어야 했지만, 전두환‧신군부 세력에 의해 발목을 잡혔다. 왜 그랬을까.

‘거리에 나오는 걸 방치하는 등의 방식으로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하게끔 한다. 그런 것 등을 빌미로 쿠데타를 일으켜 계엄을 전국에 확대하고 국회를 해산하며 국보위 같은 걸 만들어 권력을 장악한다’,

광주항쟁이 왜 일어났는지를 알려면 우선 전두환‧신군부 세력의 10‧26 이후 행적을 살펴야 한다. 보안사령관인 전두환은 박정희가 죽자 일찍부터 국가 권력을 장악해야겠다는 시나리오를 짜고 있었다.

1980년 5월 정치권은 국회 소집에 합의했고, 대학생들은 거리로 나와 계엄 해제를 요구하며 전두환·신군부를 규탄했다. 이에 전두환 일당은 10·26 직후 선포돼 반년 넘게 계속된 비상계엄을 지속할 명분을 찾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5월 17일 쿠데타를 감행하고 결국 성공한다.

1980년 5월 18일 0시를 기해 전두환 정권은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정권을 곤고히 하고 반대파 세력을 물리치기 위한 일환으로 계엄령을 선포·확대한다. 이에 7공수여단은 18일 새벽 1시경 33대대를 전남대에, 35대대를 조선대에 각각 배치, 학생들이 항의하자 계엄군은 메가폰을 통해 해산을 종용하다 학생들에게 돌진해 곤봉을 휘둘렀다.

19일 새벽부터 1,000여 명의 공수 부대원들은 시민들에게 마구 폭력을 휘둘렀다. 곤봉을 마구 휘두르며 착검한 소총으로 시위 군중의 어깨, 다리 등을 마구 찔러 금남로 일대는 삽시에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군중과 이를 지켜보고 비명을 지르는 시민 등으로 아비규환이 되었다.

5월 21일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통해 시위가 확산된 이유는 ‘지역 불순 인물 및 고첩’들이 ‘사태를 악화시키기 위해 유언비어 유포와 지역감정을 자극, 선동하고 난동 행위를 선도’했기 때문이라는 내용의 담화문을 발표한 후 다음 날인 22일 계엄사는 김대중 사건에 대한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한다. 김대중이 정부 전복을 기도했다는 내용이었다. 전날 이희성이 발표한 것과 똑같이 조작, 허위 사실, 중상모략으로 가득 찬 발표였다. 광주 시민들은 이 소식을 듣고 또 한 번 분노한다.

급기야 24일, 공수 부대가 어린이까지 사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27일 마지막으로 도청에 남아 있는 시민군은 200여 명이었다. 이에 반해 진압 작전에 투입된 병력은 3‧7·11공수여단, 20사단, 31사단, 전교사 예하 병력 등 총 2만 317명이었다. 이토록 대규모의 병력이 광주 시내로 진입, 광주 전 지역을 폐쇄하고 총, 칼을 앞세워 도청과 시내전역을 장악한 후에야 마침내 피로 물든 역사의 시간은 마침표를 찍었다.

전두환을 주축으로 한 신군부는 12.12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장악한 다음, 당시 분출되고 있던 전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민주화운동세력과 야당의 정적을 제거해야 했다. 그 제물이 김대중의 정치적 근거지 바로 광주였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6권 ‘광주항쟁, 한국 사회를 뒤흔든 시민 항쟁’

전두환, 진짜 광주 학살의 최고 책임자인가

그렇다면 여기에서 전두환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5월 21일, 자위권이 발동된다. 자위권 발동을 국방부 장관에게 건의하는 형식의 회의가 21일 오전에 열리는데, 전두환도 이 자리에 참석했다. 실질적 권력자인 전두환이 그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란 건 자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날 오후 1시 광주 시민들을 향해 발포를 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자위권을 천명하는 담화문을 발표하는데, 여기에서도 전두환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걸로 밝혀졌다. 이튿날 22일, 전두환은 공수 부대원들에게 격려금을 하사하도록 지시한다. 또한 전두환은 25일 최규하로 하여금 광주로 내려가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5월 27일 새벽에 벌어진 상무 충전 작전에서도 전두환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즉 전두환은 광주에서 진행된 여러 작전이나 자위권을 결정하는 자리에 참석했고, 가장 중요한 27일 작전을 결정하는 자리에도 참석했다. 미국 또한 전두환이 최종 결정을 할 수 있는 군 실력자라고 보고 있었다. 무엇보다 전두환은 27일 상무 충정 작전을 몇 시간 앞두고 사병들에게 거액의 하사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이런 점을 보면 분명 전두환이 광주 학살의 최고 책임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7권 ‘전두환과 5공 잔혹사, 무소불위의 권력 휘두르다’

전두환과 5공 잔혹사, 무소불위의 권력 휘두르다

삼청교육대,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녹화 사업 강행, 5공화국 등장…17권 ‘전두환과 5공 잔혹사, 무소불위의 권력 휘두르다’ 편에는 1980년대 전반기 한국 현대사를 살피고 있다. 광주항쟁을 짓밟고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 일당은 버젓이 인권 유린을 저지르며 권력을 쟁취했는데, 그 과정과 결과를 상세히 기록해놓았다.

전두환은 2단계를 통해 대통령이 되려고 했다. 먼저 최규하를 물러나게 하고 자신이 ‘통대’에 의해 대통령이 된 다음에, 자기들이 만든 헌법에 따라 또 대통령이 되는 방식이었다. 1980년 8월 10일, 최규하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작성했다. 그리고 전두환·신군부의 강박에 의해 8월 13일 김영삼이 정계 은퇴를 발표했다. 8월 14일에는 김대중 등 24명에 대한 군사 재판이 시작됐다. 8월 16일에는 마지막 수순으로 최규하가 대통령을 사임했다. 8월 21일 전국 주요 지휘관 회의에서 전두환을 국가 원수로 추대했다. 8월 27일 전두환은 장충체육관에서 체육관 대통령이 되었다. 9월 29일 이번에는 헌법 개정안을 공고했다. 10월 22일 국민 투표로 헌법 개정안이 확정되었고, 1981년 2월 대통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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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혜영 기자  gosisashy@sisamagazin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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