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대한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 사살

안중근 의사 이토 히로부미 저격 석판화. 안중근 의사는 일본인으로 가장해 하얼빈역에 잠입, 이토 히로부미가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환영 인파사이를 헤치고 그의 배와 등을 향해 권총을 쐈다. 이토 히로부미는 결국 수행하던 의사가 응급처치를 했지만 30분 만에 숨졌다.(사진출처_뉴시스)

(시사매거진246호=신혜영 기자) 1909년 10월26일 오전 9시30분, 만주의 하얼빈역에서 독립의 염원을 담은 총성이 울린다.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체프와의 회담을 위해 만주 하얼빈역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안중근 의사가 권총을 뽑아 든 것이다. 7발 중 3발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나머지 3발은 옆에 있던 수행비서와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 만주철도 이사를 향해 쐈으며 1발은 플랫폼에서 발견되었다.

대한의군 참모중장과 특파독립대장으로 거사를 치밀하게 준비해 온 안중근 의사는 거사 당일 일본인으로 가장해 하얼빈역에 잠입했다. 안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가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환영 인파사이를 헤치고 이토 히로부미의 배와 등을 쐈다. 수행하던 의사가 응급처치를 했지만 30분 만에 숨졌다. 대한제국 침략의 원흉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의 사망 소식은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까레애 우라!” 러시아어로 ‘코리아 만세’를 외친 안 의사는 러시아 헌병들에게 체포돼 일본 관헌에게 넘겨졌다. 여순 감옥에 수감된 안 의사는 이어진 재판에서 “을사늑약으로 조선을 침탈한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힌 죄인이어서 자신이 동양인을 대표해서 처단한 것”이라며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님을 밝혔다.

안 의사는 관동도독부지방법원 원장 마나베의 주심으로 여섯 차례의 재판을 받았고 이듬해 2월14일 오전 10시 30분에 개정되었고 재판장 마나베는 사형을 언도하였다. 당시 재판과정에서 보인 안 의사의 정연하고 당당한 논술과 태도에 일본인 재판장과 검찰관들은 탄복했다. 안 의사의 관선 변호인 미즈노는 “그 범죄의 동기는 오해에서 나왔다고 할지라도 이토를 죽이지 않으면 한국은 독립할 수 없다는 조국에 대한 적성(赤誠)에서 나온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변론하였다.

1910년 3월26일 여순감옥의 형장에서 31살의 나이로 순국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나라를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큰 뜻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최후의 유언-

안 의사는 죽음을 앞두고 안정근·안공근 두 아우에게 “내가 죽거든 시체는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返葬)하지 말라…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유언하였다.

1879년 9월2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안 의사는 가슴과 배에 7개의 점이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에 응해 태어났다는 뜻으로 아명(兒名)을 ‘응칠’이라 지었으며 자라서는 자(字)로 사용했다. 1895년 아버지를 따라 가톨릭교에 입교한 안 의사는 신식 학문을 접하고 가톨릭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웠으며 도마[Thomas, 多默]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1904년 홀로 평양에 나와 석탄상을 경영한 그는 이듬해 을사조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자 상점을 팔아 1906년 삼흥학교를 세우고 이어 남포의 돈의학교를 인수해 인재양성에 힘썼다. 그러나국운이 극도로 기울자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1907년 연해주로 가서 의병운동에 참가한다. 이곳에서 안 의사는 김두성을 총독으로 하고, 이범윤을 대장으로 해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자신은 참모중장이 되어 일제에 대항하는 투쟁을 시작했다. 그리고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거사를 치른다.

안 의사는 옥중에서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했으며 서예에도 뛰어나 옥중에서 휘호한 많은 유묵(遺墨)이 보물로 지정됐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고 1970년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 5가 471번지에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월26일 여순감옥의 형장에서 31살의 나이로 순국했다.(사진출처_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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