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피는 봄, 가족과 함께 자연과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사찰로 떠나자

세속에서 벗어나 자연과 어우러져 있는 사찰에 다다를 때면 마음과 몸이 자연과 하나 됨을 느낄 수 있다. 자연을 벗 삼아 덩그러니 자리 잡고 있는 사찰은 우리에게 마음의 여유가 무엇인지 느림의 미학을 안겨주는 듯하다. 그래서 마음 편안해지는 사찰여행은 늘 좋다. 꽃이 피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봄이 오면 더더욱 발길을 모으는 사찰, 종교적 의미를 떠나 자연과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사찰로 가족과 함께 떠나보는 건 어떨까.

한국 3대 관세음보살 성지 남해 ‘보리암’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의 말사이다. 683년(신문왕 3) 원효가 이곳에 초당을 짓고 수도하면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뒤 산 이름을 보광산, 초암의 이름을 보광사라 지었다고 한다. 훗날 이성계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하고 조선 왕조를 열었다는데, 그 감사의 뜻으로 1660년 현종이 이 절을 왕실의 원당으로 삼고 산 이름을 금산, 절 이름을 보리암으로 바꿨다. 1901년과 1954년에 중수하였고, 1969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금산의 정상에 자리 잡고 있는 보리암은 금산의 온갖 기이한 암석과 푸르른 남해의 경치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절이다.

현존하는 건물로 보광전, 간성각, 산신각, 범종각, 요사채 등이 있고, 문화재로는 보리암전 삼층석탑(경남유형문화재 74)이 있다. 이외에 큰 대나무 조각을 배경으로 좌정하고 있는 향나무 관세음보살상이 있으며 그 왼쪽에는 남순동자, 오른쪽에는 해상용왕이 있다. 일설에 따르면 이 관세음보살상은 수로왕의 부인 허황옥이 인도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경내에는 원효대사가 좌선했다는 좌선대 바위가 눈길을 끌며, 부근의 쌍홍문이라는 바위굴은 금산 38경 중의 으뜸으로 알려져 있다. 보리암은 전국의 3대 기도처의 하나로 양양 낙산사 홍련암(강원문화재자료 36), 강화군 보문사와 함께 한국 3대 관세음보살 성지로 꼽힌다.

남해 역사의 산실이자 호국 사찰 ‘화방사’

 

화방사는 경남 남해군 고현면 대곡리 망운산(望雲山) 중턱에 위치한 사찰로 신라 신문왕 때 원효대사가 보광산(금산)에 보광사를 세우고 망운산 남쪽에 연죽사를 건립한 것이 화방사 역사의 시작이다. 신라 신문왕(681∼692년) 때 원효(元曉)가 창건, 창건 당시에는 연죽사(煙竹寺)라 불렀고, 고려 중기 혜심(慧諶:1178∼1234)이 중창한 뒤에는 영장사(靈藏寺)라 하였다. 임진왜란 때 승병들의 근거지로 쓰이다가 불에 타 없어진 것을 1636년(인조 14)에 계원(戒元)과 영철(靈哲)이 현 위치로 옮기면서 절 이름을 화방사라 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응진전·명부전·칠성각·일주문·채진루 등이 있다. 이 중 대웅전과 마주보고 있는 채진루(採眞樓)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52호로 지정되었다.
화방사는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임진왜란 때 순국한 장병들의 영혼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던 호국사찰로 채진루에 서있는 ‘이 충무공 충렬묘비’ 목판비문이 호국사찰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채진루 맞은편에는 천연기념물인 산닥나무 자생지가 화방사의 역사를 품고 있다. 화방사 고문서의 완문절목에 보면 이곳에 한지를 생산하는 지소가 있었고, 서울의 각 관청에까지 종이를 보급하였으며, 31가지의 종이를 생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물로는 옥종자(玉宗子)·금고(金鼓)·이충무공비문목판(李忠武公碑文木版) 등이 유명하다. 이 중 옥종자는 절을 짓고 불상을 모실 때 밝혔던 등잔으로 한번 불을 붙이면 꺼트려서도 안 되고, 일단 꺼진 뒤에는 다시 불을 붙일 수 없다고 전한다. 1234년(고려 고종21) 이전에 불을 붙였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꺼졌다. 이런 까닭에 다시 불을 붙이지 못하여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금고는 조선 중기 때의 유물로 범자(梵字)가 사방에 양각되어 있으며, 이충무공비문목판에는 모두 2,000자가 새겨져 있다. 이밖에 완문절목(完文節目) 12종, 중건중수기 6종, 선생안(先生案), 계안(契案) 8종, 현판기문(懸板記文) 5종, 양안(糧案) 1권 등 고문서가 전한다. 

영험을 안고 있는 ‘망운암’

 

경상남도 남해군 고현면 대곡리 남해바다 최고의 높이를 자랑하는 망운산 정상. 구름이 바람에 휘날리는 진풍경을 자아내는 곳에 북쪽 지리산 천왕봉과 서쪽 백운산을 바라보며 고려시대 진각국사 혜심스님이 창건한 망운암이 고요히 자리하고 있다. 중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기도를 드리면 병이 씻은 듯이 낫는다는 영험 있는 기도도량으로 유명한 망운암은 보살을 형상화한 보물급 석불과 약사전 앞 사리탑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도 봉안되어 있다. 또한 보물급에 해당하는 보살을 형상화한 석불이 있는데 수백 년의 인고의 세월을 이겨냈다고 전한다.

또한 남해 망운암 석조보살좌상은 현재 망운암 관음전(觀音殿) 법당에 도금되어진 양호한 상태로 봉안되어 있다. 여기에 봉안된 이 관음좌상은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8·15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망운암에 왕래가 많았던 지역 고로(古老)들의 구전에 따르면, 옛적에 경주 옥돌로 조성된 영험 높은 부처님이라 전해왔다는 것이다. 머리에 보관을 쓰고, 양쪽 무릎 위에 두 손을 각각 나란히 두었으며, 오른쪽 발은 군의 바깥으로 노출된 반가부좌의 보살상이다. 동종은 예부터 망운암에서 조석으로 타종해온 것으로 전하며, 고봉절정 암자에서 들려오는 이 종소리에 옛 어느 고승께서 ‘운암모종(雲庵暮鐘)’이라는 시를 읊었다고 한다.

천년의 고찰 대방산 ‘운대암’

운대암은 600여 년 전 고려 말에 창건돼 망경암(望景庵)으로 불렸다. 대방산(臺芳山) 중턱에 창건되어 산자수려(山紫水麗)한 팔선지(八仙地) 명당의 제일 기도도장으로 번창하여 오던중, 이조(李朝) 때 조선시대 스님 낙상하가 현재의 터로 내려와 다시 창건해 구름 위에 떠 있다 하여 운대암(雲臺菴)이라 개칭(改稱)하였다. 상좌중이 낙상(落傷) 사망하여 한동안 절이 비었다가 임진란(壬辰亂) 후에 세월선사(洗月禪師)가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운대암은 근 천년의 시대를 함께한 사찰로 일설에는 이순신 장군과의 인연도 이야기 되지만 그것은 확실하지는 않다. 대방산 운대암 주변에는 훌륭한 곳과 맛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많다.

창선면 상신마을 도로에 있는 운대암이란 이정표를 따라 마을을 질러 산길을 내쳐 오르면 대방산 굽이굽이 고개를 돌아 산마루에 오르자 지리산 계곡처럼 깊은 계곡 아래 저수지 물빛이 청명하다.
새소리를 길라잡이로 소나무숲 산빛을 깨치며 몇 구비를 더 돌면 운대암 범종루가 길을 막아선다. 아름드리 기목나무 옆 산기슭 부도에 머물던 눈길을 거두며 범종루를 지나면 층층 돌계단 위로 푸른빛 찬연한 청기와를 인 작지만 대방산 만큼이나 위용스런 무량수전이 떡하니 서 있다. 팔작지붕 다포식 공포가 화려한 무량수전 뒤로 맛배지붕 산신각이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다. 아침에 기도하면 저녁에 영험을 보는 기도도량으로 널리 알려진 팔선지 명당자리인 운대암. 내친 김에 봉수대 까지 올라 지리산 천왕봉과 사량도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풍광을 보지 않으면 저만 손해다.

천년의 역사 호국사찰 ‘용문사’

남해군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는 해발 650m의 호구산에는 남해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절, 용문사가 기다리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의 말사이다. 802년(신라 애장왕 3) 창건되었다.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 때 이 절 승려들이 승병으로 참여하여 왜군과 싸웠는데, 이 때 절이 불에 타 없어졌으며 1661년(현종 2) 학진(學進)이 인근 보광사(普光寺) 건물을 옮겨와 중창하였다. 용연(龍淵) 위쪽에 터를 잡았다고 해서 용문사라고 이름을 붙였다. 용문사 명칭에는 창건 유래가 있는데 고려 태조가 삼한 통일을 위하여 두운대사를 방문코자 동구에 이르니 바위 위에서 청룡 2마리가 나타나 인도하였다 하여 용문사라 불리운다. 임진왜란 이후 호국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숙종(재위:1674∼1720) 때 나라를 지키는 절이라며 수국사(守國寺)로 지정했다. 또 이 때 왕실의 축원당(祝願堂)으로 삼고 위패를 비롯해 연옥등, 촉대, 번 등을 하사했다. 그러나 지금은 번과 수국사 금패만 보존되어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천왕각·명부전·칠성각·봉서루·산신각·요사 등이 있으며, 산내 암자로는 1751년(영조 27)에 세운 백련암(白蓮庵)과 염불암(念佛庵)이 남아 있다. 용문사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처마 밑에 용두(龍頭)를 조각해 넣었다. 1974년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었다. 용문사천왕각과 용문사명부전은 1985년에 각각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50호,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유물로는 용문사석불과 촌은집책판이 각각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38호, 제172호로 지정되었다. 이 중 용문사석불은 높이 약 81cm로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절을 중창하기 위해 땅을 파다가 발굴되었다고 한다. 촌은집책판은 조선 인조 때 학자인 유희경(劉希慶)의 시집 ‘촌은집(村隱集)’을 간행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 밖에 임진왜란 때 승병들이 사용하던 대포 삼혈포(三穴包)와 숙종으로부터 하사받은 연옥등(蓮玉燈) 2개, 촛대, 번(幡), 수국사 금패(禁牌) 등이 있었으나 연옥등과 촛대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훔쳐갔다고 한다. 절 입구 일주문 오른쪽 언덕에 9기의 부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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