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역서울 284, 독립운동가 강우규와 서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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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서울 284, 독립운동가 강우규와 서울역
  • 오경근 기자
  • 승인 2020.08.05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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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서울역은 국제역으로 도약

[시사매거진266호=오경근 칼럼니스트]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교통 중심지는 서울역(KTX 신역사)’이다. 과거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발달한 41역도 516역의 전국역로망체제와 역참제도(驛站制度) 그리고 파발제 등은 근세기 철도 시설과 사업이 도래하면서 급격히 쇄락했다. 현재는 구파발이나 말죽거리, 역촌 등의 지명으로 흔적이 남아있을 뿐이다.

현재 ‘문화역서울 284’ 광장에는 한복 두루마기를 입은 한 인물의 동상이 자리 잡고 있다. 왼손은 머리 크기만 한 주먹을 불끈 쥐고, 오른손에는 수류탄 모양의 폭발물을 들고 있다. 그는 일제강점기인 1919년 9월2일, 조선에 새로 부임해온 일본인 총독 ‘사이코 마코토(齋藤實)’를 죽이려고 서울역에 폭탄을 던진 독립운동가 강우규(姜宇奎) 선생이다.
현재 ‘문화역서울 284’ 광장에는 한복 두루마기를 입은 한 인물의 동상이 자리 잡고 있다. 왼손은 머리 크기만 한 주먹을 불끈 쥐고, 오른손에는 수류탄 모양의 폭발물을 들고 있다. 그는 일제강점기인 1919년 9월2일, 조선에 새로 부임해온 일본인 총독 ‘사이코 마코토(齋藤實)’를 죽이려고 서울역에 폭탄을 던진 독립운동가 강우규(姜宇奎) 선생이다.

슬픈 사실이기는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일본 도쿄와 시모노세키-조선의 부산과 서울역-중국 만주 등지로 이어지는 3개국 일제 수탈의 통로로 설치된 서울역(현 문화역서울284)’은 대륙의 중간 기지역일 뿐만 아니라 국제역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기도 하다. 서울역을 거쳐 만주와 시베리아, 더 나아가 모스크바와 베를린까지 연결하려는 일제의 구상이 기획된 곳이다.

하지만 광복 75년이 지난 2020년 현재는 KTX 신역사의 개통을 통해 기존 기차역으로서의 기능은 소멸되고, 구서울역사로써 원형을 복원해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그리고 그곳에 대한민국의 독립정신을 세계만방에 기리 알린 왈우(曰愚) 강우규(姜宇奎) 독립투사가 있다. 일제 총독 사이토를 향해 폭탄을 투척한 시대의 선각자며 교육자인 강우규 의사의 정신을 조명해 본다.

2007년 7월24일 한국철도공사에서 문화재청으로, 그리고 2008년 5월1일 다시 문화체육관광부 소속으로 바뀌었다. 이후 2011년 8월9일 구 역사는 대국민 공모에 의해 ‘문화역서울 284’라는 이름으로 새 개장 후 복합문화공간으로 전환되었다.
2007년 7월24일 한국철도공사에서 문화재청으로, 그리고 2008년 5월1일 다시 문화체육관광부 소속으로 바뀌었다. 이후 2011년 8월9일 구 역사는 대국민 공모에 의해 ‘문화역서울 284’라는 이름으로 새 개장 후 복합문화공간으로 전환되었다.

경성역, 일본과 조선 그리고 중국 만주를 잇는 수탈 철도

현재 서울역(Seoul Station)’은 서울특별시 중구 통일로 1번지에 위치한다. ‘구 서울역혹은 경성역으로 불리던 이곳은 1923년 일제강점기에 건설되었다. 그전에는 서울과 인천을 연결하는 경인선이 1899918일에 이미 개통된 상태다. 조선 반도 침략과 수탈 물자를 일본으로 실어가기 위해 인천항으로 철도를 놓은 것이다. 개통 당시에는 한강 바로 앞 노량진에서 끊겨 사실상 서울(경성)을 완벽하게 연결하지 못했다.

190075일 한강철교가 개통하고 난 후 경인선이 서울역(경성역)까지 완전히 이어지게 되자 33.057m2(10) 크기의 목조 바라크 건물을 염천교 아래 논 가운데에 가설하여 역사를 열었다.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일본인 주거지와 가까운 용산역의 규모가 더 컸으므로 경성역은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후 1905년 경부선이 개통하여 교통이 개선되기는 하였으나 역시 그 규모는 작았다.

이후 경성부에 사는 수도권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경성의 관문이 될 중심역을 만들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당시 경부선, 경원선, 용산선이 만나는 용산역은 군사적 목적으로 건설이 된 곳이다. 그로 인해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따라서 도심과 가까운 기존의 남대문정거장을 경성역(서울역)’으로 개량하여 1922년 역사 건설이 시작되었다. 이후 192311남대문정거장에서 경성역이라 역명을 바꾸고 본격적으로 경성부의 관문 역할을 부여했다. 일본 도쿄역에 이은 동양 제2의 규모로 지어진 역사는 1925년에 완공되었고, 이후 만주 방면의 국제 열차를 취급하는 등 한반도 철도 교통의 전초기지가 된다.

이러한 경성역은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일명 만철이)’가 주도했다. 이 회사는 경성역이 일본-조선-만주를 잇는 국제적인 수준의 역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 도쿄-시모노세키는 일본 국철, 시모노세키-부산은 부관연락선, 부산-신경(新京) 또는 북경(北京)은 직통 열차로 연결되고, 이후 시베리아 횡단 철도로 연결되어 모스크바와 베를린까지 간다는 구상이다. 이러한 세계관은 경성역이 한반도의 현관이며 식민지 침탈의 관문이라는 논리다. .

경성역 설계자는 도쿄대학 교수이던 쓰카모토 야스시(塚本 靖)’. 그는 도쿄역사를 설계한 바 있는 다쓰노 긴고(辰野 金吾)’의 제자다. 역사 건설은 조선총독부 철도국 공무과 건축계에서 담당했다. 지상 1, 지하2층의 르네상스식 건물이며, 지붕은 비잔틴풍의 돔 형식으로 건축됐다. 그 돔의 측면 반원형 아치 창으로부터 중앙홀 내부로 자연 광선을 끌어들여 밝은 홀 공간을 조성하였다. 1의 동양 도쿄역 다음으로 큰 규모를 가지고 있어 제2의 동양역으로 불렸다. 하지만 19506·25전쟁으로 파괴되었다.

문화역서울 284의 자체 기획 프로그램은 무료로 이루어지며 외부 대관 행사의 경우 유료 행사로 진행된다. 여타 박물관과 같이 매주 월요일 휴관하며, 오전 10시에서 오후 7시까지 개방된다.
문화역서울 284의 자체 기획 프로그램은 무료로 이루어지며 외부 대관 행사의 경우 유료 행사로 진행된다. 여타 박물관과 같이 매주 월요일 휴관하며, 오전 10시에서 오후 7시까지 개방된다.

구 서울역, ‘문화역서울 284’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

서울특별시 용산구와 중구에 걸쳐 있는 서울역은 본래 철도역이다. 이곳은 경부선과 경의선의 출발점이며 경부고속철도와 경부선 계통의 열차가 시작되는 중추역이다. 그중 경부선은 서울역 시작부터 부산역 끝까지 모두 지상 구간이며, 경의선 역시 서울역부터 도라산역까지 모두 지상 구간이다. 아울러 수도권 전철 경의선과 중앙선은 서울역 시작부터 문산역을 지나서 임진강역까지 지상 구간이다.

또한 서울역 동부에는 수도권 전철 1호선과 수도권 전철 4호선, 서부에는 인천국제공항철도가 운행된다. 수도권 전철 1호선은 서울역부터 청량리역까지 지하 구간이고 서울교통공사 구간이다. 인천국제공항철도는 서울역부터 디지털미디어시티역까지 지하 구간이다. 이어 지난 2016129일에는 KTX 호남선과 전라선 취급이 재개되었다.

현재 신 역사는 2003년에 개장한 민자 역사이며, 구 역사는 문화역서울 284’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사적 제284로 보존이 결정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경성역으로 출발했으나 1945년 대한민국 광복 후 서울역으로 개명이 되었고 1950년에는 6·25전쟁으로 파괴되었다. 이후 19581월 기존 역사 남측에 새마을호 대합실이 증축되어 개보수 되었고, 1988년 선상역사가 건설되어 많은 역무 기능이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2003년 남측에 신 역사가 준공되어 과거 경성역 혹은 서울역으로 불리던 옛 서울역사는 더 이상 철도역사로서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이에 따라 철도문화재단이 시네마테크를 비롯한 문화시설로 용도를 변경하려 하였으나 근현대사의 중요한 사적 제284로 지정된 서울역인 만큼 원형을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 2007724일 한국철도공사에서 문화재청으로, 그리고 200851일 다시 문화체육관광부 소속으로 바뀌었다. 이후 201189일 구 역사는 대국민 공모에 의해 문화역서울 284’라는 이름으로 새 개장 후 복합문화공간으로 전환되었다.

건물 내부는 건립 당시의 형식으로 복원되었으며, 다양한 문화예술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문화역서울 284의 자체 기획 프로그램은 무료로 이루어지며 외부 대관 행사의 경우 유료 행사로 진행된다. 여타 박물관과 같이 매주 월요일 휴관하며, 오전 10시에서 오후 7시까지 개방된다.

군중 속을 헤쳐 나온 강우규 선생은 사이토의 생사를 확인하며 결연한 의지로 재거사를 계획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9월17일 서울 가회동 하숙집에서 친일파 순사 김태석에게 붙잡혀 일제 법정에 서게 된다.
군중 속을 헤쳐 나온 강우규 선생은 사이토의 생사를 확인하며 결연한 의지로 재거사를 계획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9월17일 서울 가회동 하숙집에서 친일파 순사 김태석에게 붙잡혀 일제 법정에 서게 된다.

정신이 살아 있는 문화역서울 284’독립운동가 강우규

현재 문화역서울 284’ 광장에는 한복 두루마기를 입은 한 인물의 동상이 자리 잡고 있다. 왼손은 머리 크기만 한 주먹을 불끈 쥐고, 오른손에는 수류탄 모양의 폭발물을 들고 있다. 그는 일제강점기인 191992, 조선에 새로 부임해온 일본인 총독 사이코 마코토(齋藤實)’를 죽이려고 서울역에 폭탄을 던진 독립운동가 강우규(姜宇奎) 선생이다.

그는 1855714일 평안남도 덕천군 무릉면 제남리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 호는 왈우(曰愚)이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누나의 손에서 자랐지만 어려서부터 총기가 있었고, 의기 또한 대범하여 장래가 촉망되었다. 특히 청소년기에 친형에게 한학과 한방 의술을 익혀 직업으로 삼았다. 그러다가 개화사상에 관심을 가지고 기독교 장로교에 입교한다.

188328세 때 함경남도 홍원으로 이주한 강우규 선생은 한약방을 열어 큰 재산을 모은 후 이를 기반으로 교육 계몽운동을 펼친다. 읍내에 사립학교와 교회를 세워 신학문을 전파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등 민족 계몽운동을 전개한다. 또한 당시 관서·관북 지방민들의 존경을 받던 이동휘 선생과 친교를 맺으며 구국운동에 전적으로 투신하게 된다.

19108월 경술국치를 맞아 강우규 선생은 50대 초로의 나이에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결심하고, 1911년 봄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 화룡현 두도구로 망명한다. 이후 만주와 연해주 일대를 순방하면서 박은식, 이동휘, 계봉우 등 애국지사들과 만나 독립운동의 방도를 모색하는 등 활동을 넓혀 나간다. 그중 1914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계봉우 성생이 집필하는 <만고의사 안중근전>을 읽게 된다. 이로 인해 그는 자신도 안중근 의사와 같이 독립운동을 위해 산화하기로 결심한다.

1915년 제정러시아 정부가 연해주 일대의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기에 이르자 강우규 선생은 다시 우수리강 대안의 길림성 요하현으로 이주하게 된다. 그는 북만주에 위치한 이곳이 남만주연해주를 연결하는 지리적 요충지라 판단하고,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구상한다. 한인 동포들을 불러 모아 새로운 마을을 형성하고 이름을 신흥동(新興洞)’이라 명명한다. 한민족을 새롭게 발흥시키려는 뜻이다.

이러한 선생의 노력으로 불과 1년여 만에 100여 호의 한인 마을로 성장한다. 이를 기반으로 선생은 크게 3가지 일을 추진한다. 첫째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세워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둘째 교회를 세워 한인들에게 기독교 박애주의에 입각한 동포애와 민족적 일체감을 심어주었다. 셋째 노령과 만주 각지의 독립운동 세력을 연결하는 거점으로 신흥동을 부흥시켰다.

그러한 가운데 국제 정세가 변화하여 1917년 러시아혁명의 영향으로 레닌 정부가 약소민족 해방운동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공언하게 된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의 분위기 속에 국제사회에는 민족자결주의와 인도주의를 부르짖었다. 이 같은 사회 변화를 따라 민족 역량을 결집하여 19193·1운동을 맞이하게 된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 도쿄와 시모노세키-조선의 부산과 서울역-중국 만주 등지로 이어지는 3개국 일제 수탈의 통로로 설치된 ‘서울역(현 문화역서울284)’은 대륙의 중간 기지역일 뿐만 아니라 국제역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 도쿄와 시모노세키-조선의 부산과 서울역-중국 만주 등지로 이어지는 3개국 일제 수탈의 통로로 설치된 ‘서울역(현 문화역서울284)’은 대륙의 중간 기지역일 뿐만 아니라 국제역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기도 하다.

강우규 선생, ‘독립운동은 생각이 아니라 행동이다폭탄 투하

1919326일 블라디스토크로 건너간 강우규 선생은 독립운동가 이동휘의 부친인 이승교와 김치보, 박은식 선생 등이 결성한 <대한국민노인동맹단>에 가입하여 요하현 지부장을 맡아 활동하게 된다. 이들 동맹단은 40세 이상 70세 미만의 노인들로 결성해 실전에 참여하는 청년 독립투사들을 지원하는 임무를 맡는다.

그러나 그는 국제 정세를 분석하며 위기감을 느낀다. 3·1운동이 소강상태에 들어가며 대한 독립이 더 이상 요원할 것 같은 판단에 의해 새로운 조선총독을 처단하기로 결심한다. 당시 일제는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식민정책을 변경하는 술수를 꾀하는 한편 무단정치의 하세가와(長谷川好道)’ 대신 문화통치를 완수할 새로운 총독을 임명하려 했다. 이는 조선을 영구히 식민지화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이를 꿰뚫어 본 강우규 선생은 거사를 추진할 계획을 세운다. 그는 이미 구입해 두었던 폭탄을 조선으로 가져가기 위해 기저귀처럼 다리 사이에 찬다. 그리고 1919614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선편으로 원산항에 도착한다. 그리고 그곳 원산의 독립운동가 최자남과 평안남도 안주 태생 조선독립청년단 허형의 도움을 받아 85일 드디어 서울 안국동 김종호의 집에 들어간다.

며칠을 머물며 신임 총독의 부임 정보를 탐문하던 그는 신문 보도를 통해 92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신임 총독으로 부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어 그는 신문에 난 사이토의 사진을 오려 가지고 다니면서 얼굴을 익힌다. 그리고 사이토 부임 전인 828일부터 서울역 부근의 여인숙에서 지내며 본격적으로 거사 준비에 들어간다. 매일같이 역전에 나아가 지형지물을 면밀히 답사하고 조사하면서 투탄 위치를 탐색하는 등 주도 면밀한 계획을 타진한다.

드디어 92일 강우규 선생은 명주수건에 폭탄을 싸서 허리에 단단히 붙잡아 맨 후 저고리와 두루마기를 입으며 쉽게 꺼낼 수 있도록 준비한다. 그리고 오후 5시 사이토 일행이 서울역에 도착해 환영행사를 마치고 떠나려는 순간 그들이 탄 마차를 향해 민족의 의분을 담아 폭탄을 던진다. 천지를 진동하듯 터진 폭탄에 의해 겹겹이 둘러싼 사이토 일행이 허둥지둥 도망했다.

군중 속을 헤쳐 나온 강우규 선생은 사이토의 생사를 확인하며 결연한 의지로 재거사를 계획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917일 서울 가회동 하숙집에서 친일파 순사 김태석에게 붙잡혀 일제 법정에 서게 된다. 19202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그해 11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된다. 당일 감상이 어떠냐?”는 일제 검사의 물음에 그는 짤막한 시를 남기고 의연히 순국한다. “단두대 위에 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이는구나 /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겠는가((斷頭臺上 猶在春風 有身無國 豈無感想)”

그의 유서는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언제든지 눈을 감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는 전국 방방곡곡의 청년들이 눈앞에 선하다. (중략) 너는 나의 이 유언을 전국의 학교와 교회에 널리 알리도록 하여라고 했다.

이러한 의열투쟁 방식의 독립운동노선은 이후 김원봉의 의열단과 김구의 한인애국단 등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1945815일 대한민국은 독립을 맞이하게 된다. 이에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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