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선도의 생가터 있는 동숭동의 ‘대학로’
조선시대 ‘가르침 받드는 숭교방’에서 ‘젊음의 거리’로 변화
[시사매거진301호] 마로니에 꽃이 피는 초여름이다. 한두 달 더 지나면 열매가 맺은 계절이다. 희고 분홍빛 나는 꽃잎의 거리는 역시 서울시 중구 명동1가 소재인 동숭동 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정이었던 ‘마로니에 공원’이 으뜸이다. 이곳은 조선시대 최고의 시인인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선생의 집터가 있어 오래된 시간의 향기가 난다.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가 문학의 2대 시성(詩聖)으로 불리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 선생은 본래 ‘연화방(蓮花坊)’이라 불리던 현재의 ‘연지동(蓮池洞)’이라 에서 태어났
[시사매거진301호] 마로니에 꽃이 피는 초여름이다. 한두 달 더 지나면 열매가 맺은 계절이다. 희고 분홍빛 나는 꽃잎의 거리는 역시 서울시 중구 명동1가 소재인 동숭동 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정이었던 ‘마로니에 공원’이 으뜸이다. 이곳은 조선시대 최고의 시인인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선생의 집터가 있어 오래된 시간의 향기가 난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가 문학의 2대 시성(詩聖)으로 불리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 선생은 본래 ‘연화방(蓮花坊)’이라 불리던 현재의 ‘연지동(蓮池洞)’이라 에서 태어났다. 1595년 8세 되던 해에 작은아버지인 윤유기(尹唯幾)의 양자로 들어가 ‘숭교방(崇敎坊, 현 동숭동)’에서 성장했다.
남인의 세거지인 ‘낙산(駱山)’ 아래 숭교방과 더불어 인조(仁祖) 이후 효종(孝宗)으로 등극한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스승이 되어 공조좌랑, 형조정랑, 한성부서윤 등을 지냈다는 이유로 평생 치열한 당쟁을 치르며 일생을 거의 벽지의 유배지에서 보냈다. 시서화(詩書畵)에 능한 가문의 내력을 이어받아 문장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으며 당대 정철(鄭澈)과 더불어 시가 문학의 2대 시성으로 불린다.
내 벗이 몇 인고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 동산에 달 떠오르니 그것이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 하리 / 구름 빛이 좋다 하나 검기를 자주한다 / 바람 소리 맑다 하나 그칠 때가 많은지라 / 좋고도 그칠 때가 없기는 물뿐인가 하노라.
꽃은 무슨 일로 피면서 쉬이 지고 / 풀은 어찌하여 푸르듯 누르나니 / 아마도 변치 않는 것은 바위뿐인가 하노라 / 더우면 꽃 피고 추우면 잎 지거늘 / 소나무야 너는 어찌하여 눈과 서리를 모르느냐 / 땅속 깊이 뿌리가 곧을 줄을 그것으로 아노라.
나무도 아니고 풀도 아닌 것이 / 곧기는 누가 시켰으며 속은 어이 비었는가 / 저러고 사철을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비추니 / 밤중에 밝은 빛이 너만 한 것 또 있겠는가 / 보고도 말이 없으니 내 벗인가 하노라
- 고산 윤선도의 ‘오우가(五友歌)’ 전문 -
고산 윤선도 선생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시조 시인이다. 1587년 연화방(현 연지동)에서 태어나 작은아버지인 윤유기의 아들로 입적이 된 후 숭교방(현 동숭동)에서 성장했다. 문학은 물론 정치와 행정 방면에도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던 그는 봉림대군의 스승이 된 후 ‘남인’ 세력의 핵심으로 떠오른다.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서인’ 세력과 다투며 정치적 부침의 세월을 거듭한다. 특히 윤선도 선생은 ‘할 말은 꼭 하는 성격’인 탓에 서인의 집중 공격을 받곤 했다. 따라서 그의 정치 인생 20년간은 귀양 생활을 해야 했고, 그중 19년간은 벼슬을 내놓고 자연 속에서 살아야 했다.
하지만 시(詩), 서(書), 화(畵)에 능한 집안의 내력으로 문학 방면에 두각을 나타낸 그는 조선시대 중기의 예술을 발전시킨 공로가 크다. 특히 ‘오우가(五友歌)’는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와 더불어 고산 윤선도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명성이 높다.
무엇보다 또 다른 특징은 ‘연꽃’과 관련된 윤선도 선생의 생애다. 1587년에 출생한 연화방(蓮花坊)은 현재의 종로구 연지동(蓮池洞)에 해당한다. 한성부 동부 7방 중의 하나로 두 곳 모두 지명에 ‘연꽃 연(蓮)’ 자가 들어간다. 또한 유배지였던 땅끝마을 ‘녹우당’도 주소지가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蓮洞里)’이며, 완도군 보길도의 지명 또한 ‘부용동(芙蓉洞)’이다.
연은 진흙 속에 살면서 청정한 기운을 잃지 않고 꽃을 피우는 특성이 있다. 불교에서는 부처나 보살이 연꽃 위에 앉는다. 유학에서 연꽃은 ‘군자의 꽃’이라고 한다. 송나라 학자인 주돈이(1017~1073)의 시 ‘애련설(愛蓮說)’에서 ‘홀로 연꽃이 진흙탕에서 피어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맑은 출렁이는 물에 씻겼으나 요염하지 않으며, 속은 비었으되 겉은 곧고, 덩굴지지도 않고 가지를 치지도 않으며,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아지고, 우뚝하여 조촐하게 서 있으며, 멀리서 바라보기 알맞되 가까이 두고 함부로 바라볼 수 없음을 사랑하노라’는 데에 기인한다.
조선시대 ‘숭교방(崇敎坊)’, ‘가르침을 높이 여긴다’
현재 젊음의 거리로 일컬어지는 ‘동숭동 대학로’는 조선시대 숭교방(崇敎坊)으로 ‘가르침을 받들던’ 학문의 터였다. 조선 건국 초부터 태조 이성계는 국립대학 성격인 조선 ‘성균관(成均館)’을 이곳에 설치했다. 그리고 명륜동과 혜화동 등 성균관 주변 일대를 ‘가르침을 높게 여긴다’는 뜻의 숭교방으로 불렀다. 이후 600년 동안 성균관 일대는 학문을 하는 젊은 유생들의 활동 무대가 되었다.
조선시대 서울인 한양(漢陽)은 크게 3곳으로 나뉜다. 권세가 높은 양반들의 세거지인 북촌(지금의 사직동 옥인동 등 일대)과 가난한 양반과 하급 벼슬아치들이 거주하는 남촌(지금의 남산 기슭 일대) 그리고 상인들과 중인들이 거주하는 중촌(지금의 종로구 일대)이다.
그중 동숭동 대학로는 조선시대 숭교방에 해당하는 중촌 지역이다. 무엇보다 이곳은 성균관과 연계해 생업을 잇는 천민 백정과 갖바치가 살고 있는 터전이기도 하다. 모두 학문을 하는 젊은 유생들의 잡일을 돕기 위한 일력들이다.
성균관 제사를 위해 소와 돼지를 잡는 백정이 있고, 그 가죽을 재료로 신발을 만드는 갖바치가 있었다, 또한 근처 사직동 인근에는 악기를 만드는 악인들이 거주했다. 그들 역시 소가죽을 이용해 장구나 북을 만들던 사람들이다.
고산 윤선도의 생애와 남인 당쟁의 세월
고산 윤선도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인으로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이다. 1587년(선조 20) 6월 22일 한성부 동부 연화방(蓮花坊)에서 태어났다. 8세 때 1595년 숙부인 윤유기(尹唯幾)의 양자로 입적해 유교 경전을 비롯한 역사, 의약, 음양, 지리 등을 공부했다. 이때 <소학(小學)>을 읽고 크게 감명받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는다.
1612년(광해군 4) 26세 때 진사시에 급제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었고, 4년 후인 1616년(광해군 8) 12월 예조판서 이이첨(李爾瞻)의 횡포를 책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다. 국경의 귀양지에 중국인과 내통하는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2년 후인 1618년(광해군 10)에는 다시 죄인들을 남쪽으로 옮겼는데, 이때 윤선도 선생도 경상도 기장으로 이배(移配)되었다.
그는 1628년(인조 6) 41세 때 별시에 장원 급제하여 봉림대군(鳳林大君)과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스승이 되었고, 이후 5년간 공조좌랑, 형조정랑, 한성부서윤 등을 지냈다. 1636년(인조 14)에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강화도로 가다가 길이 막혀 다시 해남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인조(仁祖)가 청나라에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실망하여 이듬해 2월 제주도로 낙향한다.
그리고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보길도(甫吉島)에 갔다가 아름다운 그곳 경치에 반해 섬에 오랫동안 눌러앉게 된다. 그는 자신이 머물던 마을 일대를 ‘부용동(芙蓉洞)’이라 명명하고 격자봉 아래에 집을 지어 ‘낙서재(樂書齋)’라고 부른다. 특히 이곳에서 한가로운 생활을 즐기며 많은 시가를 짓는다.
1659년(효종 10) 그가 가르쳤던 효종이 사망하자 임금의 능을 쓰는 문제와 자의대비(慈懿大妃) 상복 기간을 둘러싸고 남인과 서인 사이에 당쟁이 일어났다. 이 싸움에서 남인이 패하면서 고산 윤선도 선생은 다시 함경도 삼수(三水)로 유배당한다. 이어 1665년(현종 6) 전라도 광양으로 이배되었다가 2년 뒤에 풀려난 후 80세가 넘은 나이로 보길도에 내려가 은거하다가 1671년(현종 12) 6월 11일 낙서재에서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시대 ‘숭교방’과 구한말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1905년 대한제국을 강압하여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었다. 조선의 독립을 염원하는 많은 지식인들은 교육의 필요성을 깨닫고 성균관이 있는 숭교방 일대에 민립대학을 세우고자 했다. 신문물을 배운 인재들을 길러내어 국가를 다시 회복하겠다는 의지의 발로다.
일본제국주의는 이를 간과하지 않고 지켜보다가 선제적으로 ‘민립대학설립운동’을 막기 위해 총독부가 관리하는 ‘관립대학’ 설립을 추진한다. 그것이 바로 ‘서울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제국대학’의 설립이다.
그리고 일제는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할 장소로 동숭동을 선택한다. 조선시대 600년 세월 동안 ‘가르침을 높게 여긴다’는 ‘숭교방(崇敎坊)’을 차용하여 지역명을 ‘동숭동(東崇洞)’으로 바꾸고 대학을 세운다. 당시 이곳에는 이미 공업전습소(현 방송대 별관)와 대한의원(현 서울대학병원), 부속의학교(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등 교육시설들이 들어서 있었다.
또한 이곳 대학로에는 ‘김상옥 열사’의 동상이 서 있다. 청년 김상옥(金相玉, 1889~1923)은 동숭동에서 태어나 23세 되던 해인 1912년경 비밀결사 광복단을 조직하고 일본 상인을 대항해 일화배척과 국산품장려운동을 벌인 인물이다. 무엇보다 그는 34세 무렵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하하고 이곳 동숭동 마로니에 공원에서 총격전을 벌이다 장렬하게 전사해 한국인의 기상과 위상을 널리 천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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