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주 칼럼위원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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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란 무엇인가?

칼럼 · 오피니언

(시사매거진258호=오병주 칼럼위원) 법(法)이란 물수(氵)변에 갈 거(去)자이므로 ‘한물’ ‘간 것’이 법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보고 실소한 적이 있다.법이란 한자에서 보듯이 물(水)이 흐르는(去)것과 같은 순리를 바탕으로 사회의 정의와 질서를 지키고자 세워진 최종적 기본원칙이라 할 것이다.물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른다. 우리는 5천년 역사에 1천여 회나 중국과 왜구로부터 침략을 받아왔다. 이것은 우리나라가 평화를 애호하였기 때문이라고 간단히 당정하기 보다는 오히려 국력의 수위(水位)가 중국과 일본의 국력 수위보다

오병주 칼럼위원

석구봉 도사이야기②

칼럼 · 오피니언

(시사매거진257=오병주 칼럼위원) 1987년 상주지청에 근무하던 시절 불교신자인 지청장께서 속리산 암자에 있는 어느 도사와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했다. 사실 다른 일정도 있고 하여 적절한 핑계를 대고 빠지려 했는데 입회계장이 ‘그 스님은 유명한 도승으로 좀처럼 상주 시내에 나오지 않으며 과거 6개월간이나 단식을 하여 주간지 등에도 기인으로 소개된 분이니 만나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고 했다.당시 상주 시내에는 변변한 식당이 없었고 그나마 지역 유지들이 많이 이용하는 ‘금강식당’이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었다. 그곳에서 그 도승을 만나

오병주 칼럼위원

조선시대 역관의 경제적 지위

칼럼 · 오피니언

(시사매거진256호=오병주 칼럼위원) 허생전에서 가난뱅이 허생에게 선뜻 일만 냥을 빌려주었던 변 부자의 직업은 역관(譯官)이었다. 바꿀 역(譯)에, 관리 관(官), 지금으로 말하면 통역관이라 할 수 있고 중인의 신분에 해당한다.역관은 조선 중기에 출중한 외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중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중개묵역으로 부를 축적한다. 그리고 천거제라는 제도를 도입해 부와 명예를 세습시켰다.허생전 변 부자의 실제모델로 알려진 숙종ㅎ시대 역관 변승업은 지금으로 말하면 천억 이상의 돈을 가진 부자였다. 그리고 부인이 죽었을 때 감히 왕가의 상제

오병주 칼럼위원

아사노 동경지점 부부장 검사와의 만남

칼럼 · 오피니언

(시사매거진254호=오병주 칼럼위원) 한국에서 회의에 참가하기 전에는 이번 UN범죄방지회의 일정이 이렇게까지 타이트한지는 생각하지도 못했다.막상에 회의에 참가해 보니 아침 9시 30분부터 저녁 5시에 이르기까지 계속 회의와 세미나가 진행되었다. 또한 일과시간 이후에도 분임별로 UN본부에 입법을 건의하기 위한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어느 때는 밤 10시까지 계속 토론을 한 적도 있었다.바쁜 일과가 진행되던 어느 날, 이주까 검사가 동경지검 아사노 부장이 오 검사를 만나고 싶어 하니 시간을 내어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했다. 일과 후

오병주 칼럼위원

고려시대, 우리는 로켓을 쏘았다

칼럼 · 오피니언

(시사매거진252=오병주 칼럼위원) “행주산성의 승리는 내가 화차를 가지고 있었음이라.”권율장군은 행주대첩 승리의 공헌을 ‘화차’에 돌렸다.600년 전 고려는 로켓원리를 이용한 강력한 화약무기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날아가는 불이라는 뜻의 주화. 주화는 언뜻 보면 화살과 비슷하다. 하지만 화살은 화살대 뒤에 홈이 파져 있어 활시위에 걸고 당기면 그 힘으로 날아가지만, 주화에는 그건 홈이 없다. 그러면 고려시대 만들어진 이 주화는 어떻게 날아갔을까?옛날에 진포로 불렸던 전북 군산항은 세금으로 바치는 곡식을 모아 놓은 창고, 이른바 조창

오병주 칼럼위원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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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매거진244호=오병주 칼럼위원) 지금으로부터 203년 전인 1795년, 정도 임금이 왕위에 있을 때 제작한 ‘원행을묘정리의궤’라는 제목의 기록을 자세히 보면 ‘자’, ‘궁’, ‘회’, ‘갑’, ‘연’, 즉 임금의 어머니 회갑잔치라는 글이 있다.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28살의 한창 나이에 아버지 영조 임금의 지시로 뒤주에 갇힌 지 8일 만에 굶어 죽었다. 죄인으로 죽은 아버지 때문에 자신의 정통성에 하자가 있었던 정조는 치밀한 정치 이벤트를 꾸민다.서울대학 규장각에는 당시 정조의 행차를 볼 수 있는 ‘원행을묘정리의궤’의 원본이

오병주 칼럼위원

국민들의 질서의식, 양보정신 결여만을 탓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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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매거진243호=오병주 칼럼위원) 버클리시에서 샌프란시스코 시내를 들어가려면 바다 위에 가설된 베이교(Bay Bridge)를 건너야 한다. 통행료는 1달러였다.다리는 2층으로 가설되어 상층 4개 차선은 버클리에서 샌프란시스코 방향으로 하층 4개 차선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버클리 방향으로 가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지금부터 무려 70여 년 전에 벌써 왕복 8차선의 교량을 건설하였고 그 다리가 지금도 불어난 막대한 교통량을 무난히 소화해 내며 잘 유지되고 있다.금문교도 마찬가지다. 수십 년간의 세월동안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어난 두 차례의

오병주 칼럼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