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문화탐방] 천재 김시습과 강릉
시대의 아픔과 상처를 방랑과 저작(著作) 활동으로 승화
[시사매거진307호]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저동 호반에 위치한 경포대(鏡浦臺)는 지방유형문화재에서 보물로 승격된 역사적 정치·문화 인물의 보고(寶庫)이며 산실(産室)이다. 고려시대인 1326년 충숙왕 때 관동존무사 박숙정(朴淑貞)이 세운 경포대를 중심으로 조선시대 동인 수장인 초당 허엽과 강릉 5문장인 악록 허성, 하곡 허봉, 난설헌 허초희, 교산 허균 그리고 대학자이자 정치가인 율곡 이이와 천재 문인 매월당 김시습이 거했던 고택(古宅)과 외가(外家) 등이 자리한다.
그중 무반 가문의 혈통을 이어 서울 성균관 북쪽 지역에서 태어나 5세 때 세종대왕을 만나 시를 지음으로 ‘천재(天才)’, ‘신동(神童)’라 인정받은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은 불운한 가정환경과 정치적 혼란기를 몸소 겪으며 유랑과 방랑으로 점철된 삶을 산다. 그는 주기론적 철학을 바탕으로 한 시 2,200여 편을 짓는 것 외에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남겼다. 그를 기념하기 위해 현재 그의 관향이자 모친의 시묘살이를 했던 외가 강릉시 경포대 인근에 <매월당 김시습 기념관>을 건립했다.
바랑 하나에 생애를 걸고 / 인연 따라 세상을 살아가오 / 삿갓은 오직 하늘의 눈으로 무겁고 / 신발은 조국 땅의 꽃으로 향기롭소 / 이 산 어디에나 절이 있을 터이니 / 어디인들 내 집이 아니겠느냐 / 다른 해에 선심을 찾을 때 / 어찌 길이 멀고 험하다고 탓하겠느냐
매월당 오언율시 유필(遺筆) 전문 -
무반 가문의 신동(神童) 김시습의 불운한 생애
조선 초기 학자이며 문인인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호는 매월당(枚月堂), 동봉(東峰), 청한자(淸寒子), 벽산청은(碧山淸隱), 췌세옹(췌世翁) 외에 법호로 설잠(雪岑)이 있디. 1435년(세종 17) 서울 성균관 북쪽에 세거지를 둔 무반 출신의 김일성(金日省)과 선사장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는 안주목사(安州牧使) 김윤주(金允柱), 조부는 오위부장(五衛部將) 김겸간(金謙侃), 부친은 음보(蔭補)로 충순위(忠順衛)를 지낸 김일성(金日省)이다.
생후 8개월 때 글의 뜻을 깨우치기 시작했으며 3세 때인 1437년(세종 19)에는 외조부로부터 글자를 배우기 시작하여 한시를 지을 줄 아는 천재성을 내보였다. 이후 5세 때는 <정속> <유학자설> <소학> 등을 배우고 읽어 신동(神童)으로 소문이 났고, 세종대왕 앞에서 직접 글을 지음으로 ‘오세(五歲, 5세)’라는 별호를 얻게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집현전 학사 최치운은 <논어> 학이편의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을 따서 그의 이름을 ‘시습(時習)’이라 지어 주었다. 이후 이웃집에 살고 있던 예문관 수찬(修撰) 이계전(李季甸)으로부터 <중용>과 <대학>을 배웠고, 이후 13세인 1447년(세종 29)까지 이웃집의 성균관 대사성 김반(金泮)에게서 <맹자> <시경> <서경>을 배웠으며 겸사성 윤상(尹祥)에게서는 <주역> <예기>을 배웠다.
그러나 1449년(세종 31) 15세 때 모친 선사장씨를 여의며 불운한 삶의 여정이 시작된다. 강릉인 외가 농장 곁 무덤 옆에 여막을 짓고 3년 시묘살이를 마칠 무렵 그를 양육하던 외숙모가 별세하였고, 당시 새 장가를 든 부친 역시 아내의 병환으로 곤란한 상황이었다. 또한 이 무렵 훈련원도정(訓鍊院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과 혼인한 김시습은 원만한 가정을 꾸리지 못한 채 파탄을 맞았다.
연이은 가족의 죽음으로 인생의 무상함을 깨달은 김시습은 18세 때 송광사에서 선정에 드는 불교 수행에 입문하였다. 이후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로 들어가 공부를 계속하였고, 21세 때인 1455년(세조 1)에는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규탄하고 단종의 죽음을 애도하며 철원에 은거하였다.
살아서 저항한 충정과 절개의 생육신(生六臣) 김시습
불교에 귀의하여 승려가 된 그는 전국을 유랑하며 지내다가 사육신이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양으로 올라와 거열형을 당한 사육신(死六臣)의 시신을 바랑에 담아 노량진 가에 임시 매장한다. 이후 관서지방을 유람하며 역사와 자연을 경외하는 시로 시대의 아픔과 상처를 달래며 <매월당집>에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을 남긴다.
책 발문에는 ‘나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질탕(跌宕)하여 명리(名利)를 즐겨하지 않고, 생업을 돌보지 아니하여, 다만 청빈하게 뜻을 지키는 것이 포부였다. 본디 산수를 찾아 방랑하고자 하여, 좋은 경치를 만나면 이를 시로 읊조리며 즐기면서 친구들에게 자랑하곤 하였지만, 문장으로 관직에 오르기를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하루는 홀연히 감개한 일(세조의 왕위찬탈)을 만나 남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도(道)를 행할 수 있는데도 출사하지 않음은 부끄러운 일이며, 도를 행할 수 없는 경우에는 홀로 그 몸이라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고 유랑의 뜻을 밝혔다.
26세 때인 1460년(세조 6)에는 관동지방을 유람한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을 엮었고, 29세인 1463년(세조 9) 때에는 호남지방을 유람하여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을 엮었다. 그해 가을, 서책을 구하러 간 한양에서 불교에 독실한 효령대군(孝寧大君)을 만나 세조의 ‘불경언해사업(佛經諺解事業)’에 참가해 교정(校正)하는 일을 맡게 된다.
31세 때인 1465년(세조 11)에 평소 경멸하던 정창손(鄭昌孫)과 김수온(金守溫)이 영의정과 공조판서에 봉직되자 김시습은 다시 경주로 내려가 금오산(金鰲山)에 집필실을 마련하고 칩거하며 ‘금오산실(金鰲山室)’의 ‘매월당(梅月堂)’이란 칭호를 사용해 창작에 전념한다. 그로부터 6년간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창작한다.
1471년(성종 2) 37세의 나이로 다시 한양에 입성해 성동 폭천정사(瀑泉精舍)와 수락산 수락정사(水落精舍) 등지에서 10여 년을 생활하다가 10년 후인 1481년(성종 12)에는 안씨와 재혼하여 환속한다. 하지만 이듬해 ‘폐비윤씨사건(廢妃尹氏事件)’이 일어나자 다시 강릉을 비롯한 양양, 설악 등 관동지방으로 방랑의 길을 떠난다.
간혹 지방에서 젊은 청년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시와 문장을 벗 삼아 독거하는 삶을 살기도 한 그는 <관동일록(關東日錄)>에 100여 편의 시를 남기기도 했다. 이후 충청도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생활하다가 1493년(성종 24)에는 59세의 나이로 병사한다. 후세 사람들은 김시습과 이맹전(李孟專), 조여(趙旅), 원호(元昊), 성담수(成聃壽), 남효온(南孝溫)을 아울러 살아서 저항한 ‘생육신(生六臣)’이라 칭한다.
‘현실 참여와 은둔’이란 양가감정의 ‘김시습 사상과 철학’
한미한 무반 가문에서 태어나 당시의 집권 세력에 결탁할 수 없었던 김시습은 신동과 천재라는 세종대왕의 인정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소외된 삶을 살아간다. 게다가 개인적인 불행과 가정적인 불운, 사회적 불만과 성격적 결벽성은 당시의 주류 계층에 비판적 기질을 형성하여 쉽게 융화되지 못하고 방랑과 유랑의 길을 떠나게 했다. 고로 김시습은 현실 참여와 은둔 사이에서 양가감정을 느끼며 고뇌의 삶을 살았다.
이후 불교 선종(禪宗)에 관심을 기울이며 승려로 반생애를 살고, 또한 유교 사상에 기저를 두고 시작과 창작활동으로 반생애를 살며, 사회적으로는 농민의 처지에 동조하고 정치적으로는 집권 사대부에게 항거하는 비판적 지식인이자 고독한 방외자의 길을 걸었다. 김시습의 철학은 도덕적 이념보다 현실을 중시하는 주기론적(主氣論的) 철학에 기반한다.
특히 그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는 당대의 사회적 횡포와 이념적 허위를 공격하는 성향으로 평가된다.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권력형 세조에 항거하는 자세를 높이 평가하며 숙종 때에 이르러 ‘생육신(生六臣)’의 한 명으로 규정되고, 정조 때에는 이조판서로 추봉되었으며, 경주의 매월사(梅月祠), 양주의 청절사(淸節祠), 강릉의 매월당영당(梅月堂影堂) 등 수많은 사당에 배향되었다.
꿈꾸다 죽은 늙은이라 써준 ‘매월당 김시습 기념관’
강릉시 운정동 ‘매월당 김시습 기념관’은 김시습의 관향이자 모친의 시묘살이 연고로 그의 문학과 사상을 살펴볼 수 있게 구성한 기념관과 그의 사당인 숭절사, 과거 덕원서원이라 불리던 9위 사당 창덕사로 구성돼 있다.
먼저 이곳 기념관은 출입구에서 우측으로 김시습 인물소개 전시관, 이생규장전 포토존, 금오신화 애니메이션, 유물전시관(매월당집 전시)이 있고 복도 쪽에는 김시습 서적 및 유물전시관이 설치돼 있다.
김시습 인물소개 전시관에는 매월당 김시습의 생애와 연도별 수신, 복기, 용처 등을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는 패널이 구성돼 있고, 아생(我生)의 시구 중 마지막 4구절 내용이 적혀 있다. ‘백세표여광(百世標余壙) / 당서몽사로(當書夢死老) / 서기득아심(庶幾得我心) / 천재지회포(千載知懷抱), 백 년 후에 내 무덤에 표할 적에 / 꿈꾸다 죽은 늙은이라 써준다면 / 나의 마음을 잘 이해했다 할 것이니 / 품은 뜻을 천년 뒤에 알아주리.’ 또한 김시습의 시를 영상으로 음미하며 이해할 수 있는 스크린이 설치돼 있다.
다음 이생규장전 포토존에는 <금오신화>의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등 5편의 소설 중 ‘이생’이라는 남자가 최씨녀를 만나 사랑하여 결혼하고, 홍건적의 난으로 부모와 아내인 최씨녀를 잃게 된다. 죽은 줄만 알았던 최씨녀가 환생하여 꿈 같은 신혼을 보낸 후 이승의 인연이 다해 최씨녀가 사라지자 이생 역시 매일같이 최씨녀를 그리워하다가 병을 얻어 죽게 된다는 사랑 이야기를 이미지로 구현해 놓았다.
그 외 김시습 서적 및 유물 전시관에는 <중용>과 <대학> 등 수많은 고서적이 전시되어 있다. 한국의 최초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비롯해 김시습의 시문집 <매월당집>과 매월당 김시습의 친필이 전시돼 있고, 1796년 목판본으로 인쇄된 <장릉사보(張陵史補)> <동국풍아(東國風雅)> <북창 고옥 양선생 시집(北窓古玉兩先生詩集)> <도연명시고(陶淵明詩稿)> <고사(高士)>를 비롯해 먹으로 매화를 그린 ‘묵매도(墨梅圖)’와 <동방도통(東方都統)> 등 다양한 문집과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우리나라 최초 한문소설 <금오신화>의 문학적 가치와 평가
매월당 김시습은 경주 금오산에 위치한 ‘금오산실(金鰲山室)’에서 약 6년간에 걸쳐 형식이 자유로운 여러 장르의 작품을 창작한다. 유불선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사상을 토대로 풍류기어(風流奇語)를 창작하여 단편 소설 <금오신화>로 엮는다. 그는 당시 주로 읽히던 기존의 전기소설(傳奇小說)과는 다른 소재와 발상으로 신비로운 이야기를 엮었다고 하여 ‘신화(神話)’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승과 저승, 속세와 용궁, 실재하는 현실 공간과 상상 속에서 그려낼 수 있는 상징의 공간을 통해 인간성을 긍정함은 물론 현실 속에서 제도(制度), 인습(因襲), 전쟁, 인간의 운명 등과 강력히 대결하는 인간의 의지를 표현해 문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중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은 ‘민간에 널리 퍼져 있는 귀신의 존재를 부정했던 작가’가 역설적으로 죽은 최씨녀를 등장시켜서 인간의 깊은 슬픔을 통찰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참혹한 현실을 역설적이며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현실의 비극을 강렬하게 고발했다는 평가다. 또한 현실적이고 일원론적 세계관에 근거해 주의 깊게 현실이 지닌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 문학성은 물론 소설사적 가치를 높인다.
또한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는 천당과 지옥, 무당과 귀신설 등을 믿지 않던 경주의 박생이 어느 날 꿈을 꾼 후 크게 깨닫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를 통해 김시습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유교관, 불교관, 정치관 등을 염라대왕과 박생이 서로 질문답하면서 조율해가는 과정이 현존하는 <금오신화> 5편 중 가장 독창적이라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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