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 쌉싸름했던 영화판과의 조우, 그리고 내일

   
나와 영화현장의 첫 만남은 스물네 살에 이뤄졌다. 제대 후 영화감독을 꿈꾸며 서울로 상경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 당시 대학로 소극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나는 어느 날 출근하기 전에 조조할인 영화를 보러 갔다가 영화를 예매하고 돌아서는 순간 군대에서 인연을 맺은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게 되었다. 한국예술종학학교 영상원을 다니다가 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1년이라는 경력 차이를 무시하고 친구처럼 지냈던 후임의 전화였다.

제대 후 복학해서 학교 워크숍 과제로 단편영화를 만들고 있는데 마침 출연하기로 한 배우가 맹장이 터져 못 나오게 됐으니 나보고 대신 좀 와줄 수 있겠냐는 거였다. 참으로 난감한 상황임에는 분명했다.
‘그 놈이 아니라 내가!’
하지만 전화를 끊자 말자 예매한 표를 취소하고 소극장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한 뒤 늦게 출근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내고 부랴부랴 낙산공원으로 향했다. 이름만 들어도 감개무량한 영화현장으로!
“부담 갖지 마. 너랑 어울리는 역이니까.”
친구의 말을 곱씹으며 행복의 나라로~ 잠시 후 영화현장에 도착 한 순간, 그만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친구를 비롯해 고작 모여 있는 사람이라고는 나 포함해서 다섯 명. 촬영장비라고는 16mm 필름 카메라 한 대.
게다가 여자 감독님으로부터 영화 내용과 내가 맡은 역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니 참을 수 없는 곤란이 밀려왔다. 호흡곤란! 초등학교 여학생을 성추행하는 변태를 연기하라는 것이었다. 내가 입고 있는 옷도 잘 어울린다고 감독은 웃어 보였다.
아무 것도 모른 채 해맑게 웃고 있는 여학생의 얼굴을 보다가 나를 보며 더 해맑게 웃고 있는 친구의 얼굴을 보게 되는 순간 다시 한 번 호흡곤란!
하지만 난 성실하게 첫 경험을 완수했고 영화를 만든 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게 되었다. 워크숍 상영회에 참석해 몇몇 사람들 그것도 여자들부터 “연기 잘하던데요?”라는 칭찬 아닌 칭찬도 듣게 되었다. 엔딩 크렛딧에 오른 내 이름을 보고 가슴 벅찬 흥분도 느꼈다.
그 후 영화공부를 계속하게 되었다. 참 많은 일들이 있기도 했다. 자신도 있었고 자만도 했다. 그러다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도 줬고, 그 이상으로 내가 상처 받기도 했다. 결국 부끄러움만 가득한 삶을 끝내 보려고도 했었다. 그렇게 십여 년 가까운 삶을 살아내고 두 달 전 쯤 “끝까지 영화를 사랑하는 마니아로 살다 가자”는 다짐을 하게 됐다.
그 계기는 다름 아닌 찬란하게 떠오르는 태양을 본 후였다. 어쨌든 아침은 밝아오고 하루는 이어지게 마련이니까. 폐인이든, 평범한 직장인이든, 영화광이든, 그 하루를 피해갈 수는 없을 것이었다.
이왕이면 그토록 꿈꾸던 영화광, 마니아로 살기로 했다. 삶은 살아가는 자의 의지가 핸들 역할을 한다. 자칫 그것을 놓치게 되면 벼랑끝으로 혹은 수렁으로 빠져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어쨌든 나는 잠시 놓쳤던 핸들을 다시 붙잡았고, 조금 남루하고 덜컹거리는 내 생의 자동차는 힘차게 달려가고 있다. 이 길 끝에 언젠가 만들게 될 내 영화와 배우들과 관객들이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기다려라. 내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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