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2010년 우리나라에서 도축된 동물의 수는 대략 8억 마리가 넘는다(개와 어류는 제외한 것이다). 8억은 우리나라 인구수의 13배에 달하는 숫자다. 매년 이런 어마어마한 양의 도축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그보다 몇 배는 많은 동물들이 사육되고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적어도 20억 마리 이상의 가축들이 한반도 절반의 땅에서 우리와 공존하고 있는데, 왜 그 동물들을 만나는 일은 드문 것일까? 수십 억에 이르는 그 많은 동물들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사실 우리는 그 많은 가축들을 동물이 아닌 ‘고기’의 형태로 매일 만나고 있다. 지난해 한국인은 개인당 평균 40kg 이상의 육류를 섭취했다고 한다. 20년 전보다 거의 두 배 가까이 늘어난 수치다. GNP가 늘어나고 생활수준이 향상되면서 적어도 중산층 가정에서는 매일 고기반찬을 먹는 일이 그닥 어렵지 않게 되었다. 가난하던 시절에는 꿈도 꾸지 못한 일이다. 육식화된 식탁의 풍경은 우리가 더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다는 단적인 지표가 아닐까?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의 저자 멜라니 조이는 ‘식탁의 육식화’가 더 나은 삶이기는커녕 윤리적으로도 올바르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산뜻한 제목이 던지는 호기심에 이끌려 책을 펼쳐보았다간, 예상치 못한 공격과 충격적 내용에 당황할 수도 있다. ‘육식주의를 해부한다’라는 책의 부제가 작심하고 ‘식탁의 육식화’를 비판하는 저자의 진의에 더 가깝다. 잡식동물인 인간이 고기를 먹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렇다. 그러나 지금처럼 1년에 개인당 평균 40kg 이상의 고기를 먹고, 이러한 ‘육식화 된 식탁’을 유지하기 위해 매년 8억 마리 이상의 가축을 도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본능과는 거리가 멀다. 엄청난 양의 육류소비를 감당하기 위해 대부분의 사육농가는 기업농 형태의 대규모 ‘가축공장’에서 동물들을 사육하고 있다. 이 책의 3장에서 저자가 묘사하는 미국의 ‘가축공장’의 실태는 구토가 치밀만큼 끔찍하고 잔인하다. 2000년대 이후 ‘사육시설의 대형화’ 추세가 일반화된 한국의 ‘가축공장’도 이 책에서 묘사된 장면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 가지만 거론하자. 우리나라의 국토 면적 대비 가축 사육 규모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돼지들은 1㎢당 96마리가 밀집해서 사육된다. 돼지 1마리당 반평도 되지 않는 우리에서 자라는 꼴이다. 이런 좁고 불결한 우리에서 태어나자마자 마취 없이 거세된 수퇘지는 6개월만 살다 도살되고, 암퇘지는 오로지 강제임신만을 거듭하다 4년 후에 도살장에 끌려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물에 대한 야만적인 사육과 도살이 자행되는 ‘가축공장’의 실체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매일 고기를 먹는다. 만약 ‘가축공장’에서 자라는 동물들의 비참한 삶을 직접 눈으로 본다면 아마도 대부분 고기를 먹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동물을 고기로 변한 형태로 만나기 전에 사육되는 동물의 삶을 전혀 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거대한 식육산업의 시스템 속에서 ‘육식문화’에 대한 아무런 문제의식을 깨달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저자가 비판하는 ‘육식주의’란 단순히 고기를 먹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고기를 과잉 섭취하는 ‘육식화된 식탁문화’와 이를 유지하기 위해 대규모로 가축들을 사육하고 도축하는 야만적인 ‘사육공장’의 시스템을 보지 못하고 이 모든 것을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라고 믿는 우리들의 내면화된 신념체계를 의미한다.

눈에 보이는 것이 현실의 전부는 아니다. ‘육식주의’를 반성하고 깨닫지 못하는 한 100억 마리가 넘는 가축이 눈앞에 있더라도 우리의 눈에는 ‘살아있는 동물’이 보이지 않은 것이다.
한 가지 우려 때문에 덧붙인다면, 저자가 ‘육식주의’를 비판하다고 해서 독자에게 채식주의를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저자는 우리 시대에는 의식적으로 고기를 먹지 않는 일이 하나의 윤리적 행위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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