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노동자에서 법학박사까지! 노력과 연구로 일군 승리

청소년 노동자, 법학도, 신문에 실릴 정도의 고시헌법 스타강사, 백범정신실천겨레연합 창립, 무료법률자문위원, 대학교수 등 다양한 경험과 스토리로 인해 인생이 한편의 드라마와 같은 사람이 있다. 법학으로 인해 인생이 바뀌고, 법학으로써 사람을 도우며, 법학을 통해 통일 한국의 초석이 될 날을 기다리며 ‘백범식 섬김의 리더십’을 묵묵히 실천해 오고 있는 홍원식 법학박사를 <법의 날>을 맞이해 우리 사회의 발전과 통합에 공헌하는 법조인으로 선정하여 만나보았다.

사무치는 신념은 큰 뜻을 이루는 첩경

홍원식 박사는 10대 시절 방송통신고등학교에 다니며 한약재 도매상에서 한약재 배달일과 대금 수금 업무를 수행했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화장실 들어갈 때 맘과 나올 때 맘이 다르다는 말처럼 약재를 받고 대금을 수납하지 않는 일들이 많았다고 한다. 대금을 수납받기까지 폭력을 동반한 부조리한 대우와 고초가 있었지만 평소 업무였던 60kg이 넘는 무거운 약재들을 배달하는 일에 비하면 밀린 외상값을 받으러 가는 일은 소풍날 같은 기분이었다는 그는 성실하게 일해도 무시 받고 냉대 받는 인생을 바꾸기 위해 공부를 하여 훌륭한 판검사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에 우선 대학에 진학하기로 마음먹고 종업원 생활을 청산한 후 9개월 여 동안 하루 18시간을 목표로 혈투에 가까운 공부를 하게 된다. 그리고 1980년 11월 예비고사 날에 연습 삼아 본다는 마음으로 시험을 치렀는데 대학에 합격하게 되었다. 1년만 더 공부하면 서울 명문대에 합격할 수 있겠다는 주변의 권유는 가난 때문에 누구도 자신을 뒷바라지 해줄 수 없는 환경과, 제대로 먹지 못함에서 오는 급격한 체력저하 때문에 뿌리칠 수밖에 없었다. “명문대 법대생 못지않게 실력 있는 법학도가 되겠다는 각오로 정말 한 눈 팔지 않고 열심히 책만 보았습니다”라고 말하는 홍원식 박사. 그의 인생 제2막이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법학과 2학년 시절 처음 경험한 무료법률자문 뒤의 뿌듯한 보람

홍원식 박사는 현재 수원시에서 무료법률자문센터를 운용하고 온라인으로도 사이트를 개설하여 지역적으로 멀리 계신 분들까지도 법률자문을 하고 있다. “법학과 2학년 시절에 처음으로 법률자문을 경험하였는데 그때의 통쾌함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있습니다.” 우연히 만난 분의 어머니가 부당한 폭행을 당했지만 상대가 지역 유지의 부인이라 신고를 해도 보상이나 처벌이 없어 힘들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 형사고소장이라는 것을 처음 써보았습니다. 경찰서로 찾아가 상황실장에게 고소장과 진단서, 증인들의 증언을 묶은 문건을 던질 때는 겁이 없었죠. 무식하면 정말 용감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웃음을 터뜨리는 박사는 그 당시 자신을 통해 부당한 대우를 받은 사람들이 정당하게 보상받고 자신에게 눈물을 흘리며 감사해 하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얼마 전에는 산재피해자가 정상적인 의사능력을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1심 재판에서 패소해 극도의 상심에 빠져있는 본인과 가족들을 위해 고시 준비 시절 박사의 강의를 들었던 이병철 변호사와 함께 대법원 승소 판결을 받아냈다. 하지만 평생정신박약 상태에서 살아야 하는 환자가 9급 일시보상 결정이라는 최악의 판정을 받아 이병철 변호사를 비롯, 한나라당 원희룡 사무총장에게까지 도움을 청해 평생보상금을 받을 수 있는 7급 판정을 받아낸 사건이 특히 보람되었다면서 도움을 주신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고시준비 비용 마련 차 시작한 헌법 강의로 스타강사 반열

대학 졸업후 그는 제대로 된 군 생활을 해 보겠다고 두 번씩이나 해병대 학사장교 시험을 봤으나 ‘색약’ 판정을 받고 뜻을 이루지 못해 늦은 나이에 육군 사병으로 복무를 마치고 미련을 두고 있던 고시 준비를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재학 시절과 마찬 가지로 고시 준비 비용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던 터라 ‘벌어서 공부할 계획’으로 ‘통합헌법’이라는 강의 교재를 만들어 공무원 수험가와 고시촌에서 강의를 시작하였다가 예상치 못한 사태에 직면하였다. 수강생들이 그야말로 구름떼처럼 몰려들어 고시 비용과 식구들 생활비 정도만 충당할 수 있는 강의를 하고 조용히 고시 공부를 할 계획이 보기 좋게 무산되어버린 것.

1994년 성균관대를 시작으로 연세대, 고려대, 이화여대 등의 고시반 특강을 도맡으며 연간 3만부의 강의 교재 판매 기록을 세우며 그는 명실상부한 스타강사 반열에 올랐다. 그런 그가 홀연히 고시촌을 떠났다. 1998년 정기국회가 백범 김구 선생님 서거 50주기를 앞두고 ‘백범서거 50주기 추모행사 예산’을 의결하였는데 이 예산이 추진 주체들 간의 알력으로 집행이 무산될뻔한 일이 있었다. 이를 안타까워한 홍원식 박사는 당시 소위 가장 잘나가던 고등고시 수험헌법 스타강사 자리를 그만두고 ‘무보수 총괄대변인’ 직함으로 어렵게 ‘백범추모공연’을 개최하게 된 것이다. 이 행사 후 북한에서 제안해 온 남북공동 백범추모 행사 등을 진행해야 되는 현실적 필요성 등으로 인해 자비로 비영리사단법인인 백범정신실천겨레연합(약칭 백범정신/www.bagbum.kr) 을 창설하여 무료법률자문센터, 백범리더십포럼, 백범봉사단, 백범장학회 등을 운영하고 있다.

대한적십자사 경기도 혈액원 홍보위원, 대한민국 방송코미디언협회 법률자문단장, 경기도의원입법지원위원, 수원시 규제개혁심의위원, 각 단체의 법률자문위원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활동을 하고 있는 홍원식 박사는 최근 경기대학교 경영전문대학원 최고위과정 외래교수로 출강하면서 경찰청 본청 및 지방경찰청을 순회하며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경찰청장을 지낸 김구 선생님의 공직관’을 주제로 강의를 하고 있다.

‘백범의 꿈’을 이루고자 자신의 저서 6,000권 북한 보급

여러 활동들을 하고 있지만 국민대학교에서 북한법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전후로 당국의 승인을 받아 10여 차례 북한을 방문해 ‘남북공동 백범추모 행사’, ‘남북한 제주평화축전’ 등 크고 작은 남북공동 행사 실무회담을 치른 남다른 경력의 홍원식 박사는 그의 저서 ‘백범김구(상,하)’ 6천권을 남북당국의 승인을 받아 평양에 보급하기도 하였다.

그는 항상 김구 선생님을 멘토로 삼아 ‘섬김의 리더십’, ‘소통과 화합의 리더십’을 배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천하범사에 기한이 있고, 사무치는 신념이 있는 한 모든 목적은 이룰 때가 있다는 성구가 있습니다. 그 말을 푯대로 삼고 백범선생이 꿈꾸었던 문화적 통일한국을 만드는데 일조하기 위해 끊임없이 정진할 것이고, 그 밑바탕을 다지는 초석으로 쓰임 받는 인물이 되는 것이 저의 목표이자 비전입니다”라고 밝히는 그는 큰 꿈을 가질수록 더욱 낮은 자세로 봉사와 연구에 정진하고자 한다. 평소 세 아들에게 신의를 지키고 은혜를 입었으면 꼭 그 이상으로 갚으라는 말을 강조한다는 그는 ‘順天者興, 逆天者亡’라는 교훈을 아들에게, 후학들에게 전해주고 싶다고 말한다.

홍원식 박사에게 선물하고 싶은 『백범일지』의 한 구절이 있다. ‘누구나 제가 옳다고 믿는 것을 혼자만이라도 실행하는 것이 필요하니 저마다 남이 하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저마다 제 일을 하면 자연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라. 어떤 사람은 정계(政界)에, 또 어떤 사람은 학계(學界)나 상계(商界)에 이처럼 자기가 합당한 방면으로 활동하여서 그 결과가 모이면 큰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라’ 법학으로 사람과, 세상과 소통하는 홍원식 박사. 앞으로 그의 행보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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