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태풍이 지나갔다. 전신주가 뽑히고, 낙엽을 밟으며 간판들이 굴렀다. 들녘의 벼들도 여물은 이삭이 무거웠는지 밤새 모두 쓰러지고 말았다. 한전 직원은 휑한 웅덩이에는 새 전신주 한 그루를 심어 놓았고, 대목을 맞은 간판장이들은 하루 종일 공중부양 중이었다.

하지만 바람맞은 벼들은 태풍이 사라진 방향으로 일제히 누워 뉘엿뉘엿 익어가고 있었다. 설익어 떨어진 나뭇잎들도 우르르 몰려다니다 태풍이 사라진 방향, 그 으슥한 모퉁이에 모여 붉게 물들고 있었다.

밤새 잠시 분 바람이었지만, 잔잔하던 것들은 모두 들쑤셔 놓고 간 바람이었지만, 뿌리째 뽑힌 전신주도 낙엽보다 먼저 떨어진 간판도 쓰러진 채 익어가는 벼들도,

태풍의 끝자락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가을을 맞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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