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대이자 최고의 품격 지닌 ‘광릉’ 국립수목원

광릉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홍살문(사진_안나겸 기자)
광릉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홍살문(사진_안나겸 기자)

[시사매거진300호] 조선시대 정궁이며 법궁인 경복궁(景福宮)을 중심으로 한양 사대문(四大門) 밖은 조선 왕들이 죽어서 묻힐 ‘신(神)들의 정원(庭園)’으로 역사학계에서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서울 강남구 선릉과 정릉 외 헌릉과 인릉을 비롯해 총 40기의 왕릉은 물론 왕세자와 왕세자빈, 왕의 사친 무덤을 뜻하는 원(園) 13기, 왕족의 묘(墓) 52기가 그것이다. 추가로 북한에 왕릉 10기가 남겨져 있다.

그중 경기도 남양주시에 위치한 ‘광릉(光陵, 사적 제197호)’은 조선 제7대 임금인 세조와 정비인 정희왕후의 무덤으로 ‘풍수지리(風水地理)’에 입각해 수려한 자연 풍광을 자랑한다. 특히 조선왕릉 최초로 왕과 왕비의 능을 서로 다른 언덕 위에 별개로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형식으로 인해 능원(陵園)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흥미를 더한다.

허례허식을 경계하기 위해 무덤 둘레의 12지신 병풍석을 생략하고 간략하게 난간석에 새겨 넣었을 뿐만 아니라 능역 아래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참도를 없앴다. 하지만 왕릉 주위에 선 문인석, 무인석, 상석, 망주석, 호석, 석양 등으로 인해 그 위엄만은 압도적이다. 종교적 관점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지만 성리학적 예식에 기반을 둔 석물의 배치는 당시 왕권의 위상이 어떠한지 가히 짐작게 한다.

정자각을 중심으로 좌측은 세조의 무덤이고 우측은 정희왕후의 무덤이다.(사진_안나겸 기자)
정자각을 중심으로 좌측은 세조의 무덤이고 우측은 정희왕후의 무덤이다.(사진_안나겸 기자)

토끼 모양의 ‘동원이강릉’ 무덤 형식의 독특함

조선시대의 ‘왕릉(王陵)’은 배치상으로 볼 때 4가지 형식으로 나뉜다. 첫째 단릉(單陵)으로 왕과 왕비 어느 한쪽만 매장된 무덤이다. 둘째는 쌍릉(雙陵)으로 소구릉에 나란히 두 개의 무덤을 쓴다. 셋째는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으로 두 개의 소구릉에 각각 별개로 하나씩 무덤을 쓴다. 넷째는 같은 무덤에 부부를 함께 매장한다.

또한 왕의 주검을 매장할 때는 머리를 북쪽으로 향하게 한다. 본래 선사시대에는 동쪽이나 남쪽으로 머리를 두었으나 삼국시대로 내려오면서 고려와 백제가 중국의 영향을 받아 ‘북침(北枕)’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북쪽으로 머리를 두고 있다. 그 외에 능원의 조건은 토양에 윤기가 흐르고 물기가 없으며 지나치게 건조하지도 않아야 한다.

또한 주변에 세우는 석물은 담장 안에 석양(石羊) 4마리를 동서로 나누어 세우고 석호(石虎) 4마리는 북쪽에 둘, 동·서의 석양 사이에 하나씩 두어 봉분 밖을 향하게 한다. 왕릉 앞에는 석상을, 좌우로 망주석을 하나씩 세우고 그 앞으로 한 단을 낮추어 중앙에 장명등을 세웠다. 여기에 양쪽 ‘문석인(文石人)’ 각각 하나씩과 석마(石馬) 한 필씩 세우고, 다시 한 단을 낮추어 ‘무석인(武石人)’ 한 쌍과 석마 한 필씩 세웠다.

국립수목원인 광릉숲길 가는 산책로(사진_안나겸 기자)
국립수목원인 광릉숲길 가는 산책로(사진_안나겸 기자)

광릉과 세조, 남양주 진접읍에 묻히다

조선 제7대 임금인 세조와 정희왕후가 묻힌 ‘광릉(光陵)’은 남양주시 진접읍 광릉수목원로에 위치한다. 이곳에 가려면 의정부와 청량리, 강변과 강남 등지에서 연결된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 된다. 먼저 경희대 사회복지대학원이 위치한 봉선사 입구에서 내려 제1경 ‘맞이길 정원’을 따라 걷는다. 이후 제2경 ‘전나무 복원숲’을 지나 제3경 ‘사계찬미’, 제4경 ‘나물정원’, 제5경 ‘산새소리정원’, 제6경 ‘고사리 숲길’을 따라 걸으면 제7경으로 ‘광릉 가는 길’이 나온다. 일명 국립수목원 광릉숲길이다.

광릉은 긴 산책로로 조성된 숲길을 따라 맨 끝 지점에 위치한다. 광릉역사문화관에서 여러 가지 유물을 살펴보고 난 후 언덕을 향해 걸으면 홍살문을 지나 정자각이 나오고 그곳 양편으로 세조와 정희왕후의 능이 보인다. 정자각을 마주해 왼쪽 언덕이 세조, 오른쪽 언덕이 정희왕후의 능이다. 또한 곧바로 계단을 올라가면 왕릉과 재단을 볼 수 있다. 낮게 쌓은 담장 안에 석양과 석호, 문인상, 무인상 외 장명등이 세워져 있다.

제8경 물의정원(사진_안나겸 기자)
제8경 물의정원(사진_안나겸 기자)

광릉과 광릉수목원, 유네스코 생물권 보존 지역

광릉의 원래 능호(陵號)는 ‘태릉(泰陵)’이었다. 예종이 제시한 이 능호를 신숙주가 반대하여 다시 개명되었다. 태릉은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의 멸망을 떠올리게 해 후대의 평가가 좋지 않다는 이유다. 결국 광릉(光陵)으로 정해진 후 태릉은 문정왕후 능호가 된다.

이러한 광릉 주변에는 극상림(極上林) 단계의 숲이 있다. 이곳은 희귀 동식물이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2010년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 지역’으로 지정되었다. 또한 국립수목원(일명 광릉수목원)이 들어서며 전문적인 관리가 시작되었다. 예약을 해야만 들어갈 수 있으며 하루에 5천 명 제한은 물론 광릉숲 전역은 1년에 딱 2일만 개방한다는 방침이다.

봉선사 연꽃 연못(사진_안나겸 기자)
봉선사 연꽃 연못(사진_안나겸 기자)

특히 ‘세조의 능림(陵林)’으로 조선 왕조 500여 년간 보호되어온 까닭에 숲이 우거지고 아름다우며 다양한 생물이 서식한다. 그중 천연기념물 제197호로 지정된 고유종이자 1급 멸종위기종 ‘광릉 크낙새’의 서식지로 명성이 높다.

또한 ‘광릉물푸레’라는 고유 자생 식물을 비롯해 총 287종의 수목과 더불어 고유 자생종인 광릉갈퀴, 광릉골무꽃, 광릉요강꽃 등 494종의 초류가 서식하고 있다. 그 외에 장수하늘소를 비롯한 2,880종의 동물은 물론 3,344종의 식물이 자생하고 있어 국내 최대이자 최고의 규모를 자랑하는 수목원으로 보호받고 있다.

 

세조와 정희왕후의 생애, 조선 왕조의 기틀을 다지다

1417년 9월, 세조 이유(李瑈)는 세종대왕 이도(李祹)와 소헌왕후 심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428년 부친인 세종이 즉위하자 11세의 나이로 진평대군에 봉해졌고 이후 함평대군과 진양대군이란 호칭을 거쳐 1445년에 28세의 나이로 수양대군에 봉해졌다.

그는 첫째 형인 문종 이향(李珦)에 비해 무예에 능하고 병서에 밝았으며 영특하고 명민했다. 그런 까닭에 불교 서적 번역을 관장했고, 향악의 악보를 정리했으며, 형이 즉위한 후에도 관습도감 도제조에 임명되어 국가의 실무를 맡아보았다.

광릉숲 내 위치한 봉선사(사진_안나겸 기자)
광릉숲 내 위치한 봉선사(사진_안나겸 기자)

그러나 약 30여 년간 세종을 보필했던 문종이 왕위에 올라 2년 4개월 만에 병사하자 12세의 어린 세자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를 찬탈한다. 이때 세종은 추락한 왕실의 권위를 되찾겠다는 기치를 내걸고 권람, 한명회 등과 결탁하여 계유정난을 일으켜 조정을 장악했다.

1455년 등극한 세조는 왕권 강화를 위해 의정부서사제를 폐지하고 육조직계제를 단행했다. 뿐만 아니라 집현전을 폐지하고 경연을 없앴다. 왕명 출납 기능이 있는 승정원을 강화하고, 호패법을 복원하였으며, 군제를 정비하였다. 하지만 즉위 초 여러 차례의 단종 복위 운동으로 사육신 등과 수많은 정적을 제거하고 상왕인 단종을 폐위시켜 사사했다.

말년에는 왕위찬탈에 대한 뉘우침으로 불교에 귀의하여 원각사를 창건하였다. 이후 1468년 왕세자 예종에게 선위한 후 하루 뒤 수강궁 정침에서 5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러한 세조와 더불어 정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1418년~1483년) 파평부원군 윤번과 흥녕부대부인 이씨의 딸로 1418년 홍천 공아에서 태어났다. 10세 되던 1428년(세종 10)에 진평대군과 혼인하여 낙랑부대부인에 봉해졌으며, 1455년에 세조가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예종이 즉위한 후 왕태비가 되었으며 재위 1년 2개월 만에 예종이 세상을 떠나자 다시 일찍 죽은 첫째아들 의경세자의 차남 ‘자산군(훗날 성종)’을 지목하여 왕위에 올렸다. 그리고 12세의 성종이 즉위하자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시행하였다. 7년 후 성종이 왕권을 행사하자 수렴청정을 거두고 왕실 어른으로 생활하다가 1483년(성종 14)에 온양 행궁에서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진_안나겸 기자)
(사진_안나겸 기자)

<송와잡설(松窩雜說)>에는 정희왕후 윤씨에 대한 일화가 전한다. 세종대왕이 수양대군의 부인을 간택하기 위해 궁궐의 감찰상궁과 보모상궁을 윤번의 집으로 보내 큰딸을 살피도록 했다. 이때 작은딸인 정희왕후가 어머니 이씨 뒤에 숨어서 이야기를 듣다가 감찰상궁 눈에 모습을 드러낸다. 언니보다 동생의 자태가 더 비범하다고 느낀 상궁에 의해 정희왕후가 수양대군의 부인으로 간택되었고 이후 낙랑부대부인으로 봉해진다. 이후 계유정난 당시 사전 정보가 누설되어 거사를 망설이는 수양대군에게 손수 갑옷을 입혀 용병을 결행하게 할 만큼 강직함을 내보였다.

광릉은 본래 동래정씨 정창손의 선대 묘역이었다. 그러나 세조의 광릉이 조성되면서 동래정씨 묘역은 다른 곳으로 이장되었다. 풍수지리적으로 세조의 광릉 묫자리가 좋아 조선 500여 년을 그 후손들이 통치하였다고 평가한다.

 

새시대 새언론 시사매거진

오경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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