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실 가족의 희락과 비애가 공존하는 생활공간

[시사매거진277호] 조선왕조 5대 궁궐 중 하나인 창경궁(昌慶宮, 사적 제123)’은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 2-1번지에 위치한다. 혜화역 4번 출구에서 10분 거리인 778m이다. 종묘와 더불어 조선시대 동궐에 속하며 단 한 번도 정궁이나 본궁으로 사용된 적이 없는 단순 부속궁궐이다. 하지만 조선왕실 가족의 생활공간으로 여성 내명부를 다스리는 왕비와 비빈의 내전(內典)’이 발달한 곳이다.

또한 영조와 정조에 걸친 조선왕조 문화부흥기에는 정문인 홍화문앞에서 영조가 균역법에 대한 찬반 여부를 백성에게 직접 들었으며, 효심 깊은 정조의 경우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하여 백성에게 손수 쌀을 나눠주던 곳이다. 그리고 숙종 때는 인현왕후 민씨와 희빈 장옥정을 둘러싼 노론과 소론의 갈등이 첨예하게 엇갈린 통명전이 위치한 곳으로 창경궁은 조선왕실 가족의 희락과 비애가 함께 뒤섞여 있다. 현재 조선왕조 궁궐 전각 중 가장 오래된 곳이다.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 앞에서 영조가 균역법에 대한 찬반 여부를 백성에게 직접 들었으며, 효심 깊은 정조의 경우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하여 백성에게 손수 쌀을 나눠주던 곳이다.(사진_안나겸 기자)
‘명전문 및 행각’은 일대 지형을 고려해 좁은 공간 속에서 문의 축을 살짝 틀어줌으로써 전체적 중심축을 자연스레 잡아주고 있다. 건축사적 의미가 있는 보물 제385호다.(사진_안나겸 기자)

조선왕실의 무강과 평강’ & ‘창성과 경사위한 공간

창경궁은 세종과 성종의 효심으로 탄생한 궁궐이다. 먼저 1418년 제4대 임금인 세종은 자신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난 아버지 태종을 위해 만수무강과 평안을 바란다는 뜻의 수강궁(壽康宮)’을 지었다. 예인기질이 다분한 장남 양녕대군, 종교계에 입문한 차남 효령대군과 달리 학자풍의 삼남 충녕대군은 왕으로 즉위하면서도 많은 부분 아버지 태종에게 의지했다.

태종 이방원 역시 살아서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주었으나 유사시를 대비해 반란군을 제압할 수 있는 군사권은 쥐고 있었다. 상왕이 된 후에도 세종을 위협하는 정적을 하나씩 제거해가며 왕권을 강화하는 데 만전을 기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악업은 다 내가 지고 갈 테니, 너는 성인군주가 되어라고 유언했다. 그런 아버지를 좋아하여 세종 역시 죽음이 임박할 때 아버지 태종의 묘가 있는 헌릉 곁에 묻어달라고 유언할 정도였다.

태종 사후 한동안 비워져 사용하지 않던 창경궁은 1482년 제9대 성종에 의해 증·개축 된다. 1457년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추존왕 덕종)20세에 요절하자 19세인 차남 해양대군이 왕위에 올라 제8대 예종이 되었다. 하지만 14개월 남짓 통치하던 그 역시 절명한 후 세조의 친손자이며 의경세자의 1612녀 중 차남인 자을산군13세의 나이로 제9대 성종에 즉위한다. 이후 1469년부터 1476년까지 7년간 친할머니며 세조의 정비인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을 받는다.

1476년 친정을 시작한 성종은 할머니이며 세조의 정비인 정희왕후 윤씨, 자신의 생모이며 덕종의 정비인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 예종의 계비인 안순왕후 한씨를 모시기 위해 과거 태종이 거쳐 하던 수강궁을 수리하고 대대적인 궁역 확장을 통해 조선왕실 가족이 머물 공간을 만들었다. 이름도 창성하고 경사스럽다는 뜻의 창경궁(昌慶宮)’이라 고쳤다. 처음 건축될 당시부터 왕실 웃어른을 모시기 위한 궁궐로 지었기 때문에 정치 공간인 외전보다 생활공간이 내전이 더 넓게 발달해 있다.

명정전은 2단의 월대 위에 솟은 단층 구조로 ‘동향’을 고집하고 있다. 배산임수의 지형적 특성에 따라 지세가 낮은 동쪽으로 명당수가 흐르고 뒤쪽에는 산세가 받쳐주고 있는 자연의 입지를 활용했다. 국보 제226호다.(사진_안나겸 기자)
문정전은 왕이 일상 업무를 보던 곳이다. 1759년에는 66세의 영조가 15세의 정순왕후를 맞아 가례를 치른 장소이다.(사진_안나겸 기자)

홍화문 일원의 숨겨진 보물과 진실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弘化門, 보물 제384)’은 동쪽을 향해 열려 있어 떠오르는 아침 태양을 받아들이는 것이 특징이다. 다른 정문과 달리 아담하고 반듯한 2층 구조다. 이 문은 정면에서 보는 것보다 뒤편에서 올려다보는 것이 훨씬 아름답다. 문밖을 나서지 못하는 왕실 여인들이 대문 안쪽에서 바라보도록 미감을 더했다.

무엇보다 이곳 홍화문 남북에는 정문처럼 동향한 2개의 문이 있다. 먼저 월근문(月覲門)1779년부터 정조가 매월 초하루 아버지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현 서울대병원 터)에 수시로 참배하려 다니기 위해 출입한 문이고, 선인문(宣人門)은 건립 당시 서린문(瑞麟門)으로 불리며 관원들이 권래각사로 출입하도록 했다. 이후 연산군이 쫓겨나간 문이기도 하고, 사도세자가 죽은 비운의 장소기도 하다. 그 외 임금이 성균관 태학으로 다니던 집춘문(集春門)’이 있다.

홍화문 안쪽에서 명정문 사이에서 몸을 단정히 하도록 흐르는 금천(禁川)’ 위에는 옥천교(玉川橋, 보물 제386)’가 놓여있다. 처음 수강궁이 건축된 후 64년이 흐른 1482년에 수리가 되면서 1484년에 완공된 창경궁과 함께 이 다리는 동궐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손꼽힌다. 아직까지 맑은 물이 흐르고 있는 유일한 곳이며, 다리 난간에는 좋은 징조의 길상과 악귀를 쫓아내는 벽사동물이 도깨비 얼굴로 새겨져 있다. 앵두나무, 자두나무, 살구나무 등이 활짝 핀 옥천교는 경복궁의 영제교, 창덕궁의 금천교와 더불어 대표적 궁궐의 3대 돌다리다.

숭문당은 왕이 독서나 국사를 논하던 곳으로 ‘학문을 숭상한다’는 영조 친필 편액이 걸려 있다.(사진_안나겸 기자)
통명전은 왕비의 침전으로 내전 공간 중 규모가 크다. 희빈 장씨가 통명전 일대에 흉물을 묻어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를 저주하다가 사약을 받은 곳으로 유명하다.(사진_안나겸 기자)
함인정은 ‘해동의 만 가지가 인의에 흠뻑 젖는다’고 하여 영조 때는 이곳에서 문무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을 접견하는 등 크고 작은 행사가 이뤄졌다.(사진_안나겸 기자)

명정문 영역의 자연 지세 활용한 건축술

창경궁의 법전인 명정전은 현존하는 정전 중 가장 오래된 전각이다. 특히 이곳으로 들어가는 명전문 및 행각(明政殿, 보물 제385)’은 남북으로 광정문(光政門)과 영청문(永淸門)이 있고, 일대 지형을 고려해 좁은 공간 속에서 문의 축을 살짝 틀어줌으로써 전체적 중심축을 자연스레 잡아주고 있다. 그런 까닭에 매우 귀중한 조선시대 궁궐 건축양식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창경궁 최고의 정전인 명정전(明政殿, 국보 제226)’2단의 월대 위에 솟은 단층 구조로 동향을 고집하고 있다. 배산임수의 지형적 특성에 따라 지세가 낮은 동쪽으로 명당수가 흐르고 뒤쪽에는 산세가 받쳐주고 있는 자연의 입지를 활용했다. <광해군일기>에는 남향으로 바꾸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광해군이 선대께서 하신 일을 거역할 수 없다고 해서 그대로 고수되었다.

이어 문정전(文政殿)’은 현존하는 창경궁 유일의 외전이며 또한 유일한 남향 전각이다. 왕과 신하들이 접견하고 정사를 보살피던 편전이며 일상 업무를 보던 곳으로써 명정전과 나란히 동향할 경우 한 궁궐의 정전이 둘이 되어 옛 제도를 어지럽게 한다는 이유에서 남쪽과 사각기둥을 사용해 품격을 달리하였다. 1759년에는 66세의 영조가 15세의 정순왕후를 맞아 가례를 치른 장소기도 하다.

그런 문정전을 돌아 나오면 서쪽 경사진 곳에 숭문당(崇文堂)’이 있다. ‘학문을 숭상한다는 영조 친필 편액의 의미대로 이곳에서 독서를 하거나 국사를 논했다. 또한 함인정(涵仁亭)해동의 만 가지가 인의에 흠뻑 젖는다고 하여 영조 때는 이곳에서 문무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을 접견하는 등 크고 작은 행사가 이뤄졌다.

통명전 연당은 돌난간을 두른 네모난 연지와 둥근 샘을 만들어 여인들의 생활공간에 편익을 도모했던 공간이다.(사진_안나겸 기자)
서쪽에 있는 산자락을 화계(정원식 돌계단)로 처리하여 왕비의 침전인 통명전 주위를 아름답게 꾸며주고 있다.(사진_안나겸 기자)

조선왕실 생활공간, ‘희락과 비애가 썩인 공간

창경궁의 중심인 통명전(通明殿)은 왕비의 침전으로 내전 공간 중 규모가 크다. 서쪽에 있는 산자락을 화계(정원식 돌계단)로 처리하고 그 아래에 돌난간을 두른 네모난 연지와 둥근 샘을 만들어 여인들의 생활공간에 편익을 도모했을 뿐만 아니라 매우 아름답다. 희빈 장씨가 통명전 일대에 흉물을 묻어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를 저주하다가 사약을 받은 곳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통명전을 중심으로 대비와 세자빈, 후궁들의 처소로 쓰인 여러 전각이 모여 있다. 그중 환경전(歡慶殿)은 임금의 침전으로 1484(성종 15)에 건립되었다. 성종이 이곳에서 주로 기거하였으며 후에는 중종과 소현세자와 효명세자가 승하한 곳이다.

그리고 경춘전(景春殿)’은 왕대비와 세자빈의 침전으로 쓰였으며 주로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 한씨와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세상을 떠난 곳이자 정조와 헌종이 탄생한 곳이다. 동쪽 벽면에는 정조가 태어날 당시 꾼 태몽이 용의 형상을 하고 있다. 현재는 크게 장수한다는 순조의 어필 현판이 걸려있다.

양화당(養和堂)은 침전 중 하나로 1565(명종 20)에는 임금이 거처하며 친히 독서당 문신들의 시험을 주관했고,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으로 파천하였던 인조가 환궁하면서 이곳에 거처했다. 이후 1878(고종 15) 철종의 정비 철인왕후 김씨가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현판은 순조의 어필이다.

또한 동쪽 행랑에 둘러싼 영춘헌(迎春軒)은 정조가 재위하는 동안 기거하던 곳이자 서재였으며 1800년 승하한 곳이다. 또한 집복헌(集福軒)’1735(영조 11)에 사도세자가 태어났고, 1790(정조 14) 6월에는 순조가 태어나 돌잔치를 연 곳이다. 이러한 영춘헌과 양화당 위쪽으로는 후원으로 향하는 산책로가 놓여있다. 그곳에 1777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지은 자경전(慈慶殿)이 있었다. 멀리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현 서울대병원 터)을 바라볼 수 있도록 언덕 위에 지었다. 이후 정조의 비인 효의왕후 김씨가 물려받아 기거하다가 승하하고 현재는 소실되어 빈터만 남아 있다.

통명전 진입로는 왕이 창덕궁 대조전에서 왕비가 있는 창경궁 통명전으로 들어서는 길목이다. 창경궁 일대가 아름답게 내려다보인다.(사진_안나겸 기자)
환경전은 임금의 침전으로 1484년(성종 15년)에 건립되었다. 성종이 이곳에서 주로 기거하였다.(사진_안나겸 기자)
경춘전 동쪽 벽면에는 정조가 태어날 당시 꾼 태몽이 용의 형상을 하고 있다. 현재는 ‘크게 장수한다’는 순조의 어필 현판이 걸려있다.(사진_안나겸 기자)

조선왕실 후원 영역에 일제 흔적 남다

창경궁의 후원에 위치한 춘당지(春塘池)는 본래 활을 쏘고 과거를 보던 춘당대 앞 너른 터에 자리했던 작은 연못이다. 이후 백성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왕이 직접 농사를 지었던 내농포(內農圃)’라는 논이 있던 곳이다. 그러나 1909년 일제가 연못으로 개조해 물을 채우고 일본식 정원을 만들어 보트를 즐겼다. 이후 1983년 복원을 하면서 한국식 전통정원으로 다시 고쳤다.

대온실(식물원, 등록문화재 제83)’은 창경궁 후원 춘당지 북쪽에 있는 서양식 건물로 1909년 목재와 철재, 그리고 유리로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이다. 또한 건축 당시 동양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일제가 순종황제를 유폐시킨 후 그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건축했다.

처음에는 대온실 후면에 원형 평면의 돔식 온실 2개를 서로 마주 보게 세웠으나 후에 돔식 온실 2개는 철거하여 현재 대온실만 남아 있다. 19세기 말 시작된 세계박람회 전시 건물의 양식을 따른 근대 건축물로 한국 근대 건축사의 보고 중 하나다. 원래는 창경원에 딸린 식물원이었으나 복원 공사에 따라 1983년에 서울대공원으로 이전하고, 1986년 궁궐이 복원 후에는 자생목본류를 중심으로 야생화를 함께 전시하는 공간이 되었다.

그 끝으로 관덕정(觀德亭)이 춘당지 동북쪽 야산 기슭에 팔각지붕 정자로 위치한다. ‘활 쏘는 것으로 덕을 본다. 쏘아서 정곡을 맞추지 못하면 남을 원망치 않고 제 몸을 반성한다<예기>에서 유래한다. 성종의 원비이며 한명회의 딸인 공혜왕후 한씨가 잠례를 거행하던 장소에 1642(인조 20) 취미정(翠微亭)이란 이름으로 창건되었으나 1664(현종 5)에 지금의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양화당 왕이 거처하며 친히 독서당 문신들의 시험을 주관했고,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으로 파천하였던 인조가 환궁하면서 이곳에 거처했다.(사진_안나겸 기자)
춘당지는 본래 활을 쏘고 과거를 보던 춘당대 앞 너른 터에 자리했던 작은 연못이다. 이후 백성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왕이 직접 농사를 지었던 ‘내농포(內農圃)’라는 논이 있던 곳이다. 그러나 1909년 일제가 연못으로 개조해 물을 채우고 일본식 정원을 만들어 보트를 즐겼다. 1983년 복원 당시 한국식 전통정원으로 다시 고쳤다.(사진_안나겸 기자)
관덕정은 춘당지 동북쪽 야산 기슭에 팔각지붕 정자로 위치한다. ‘활 쏘는 것으로 덕을 본다. 쏘아서 정곡을 맞추지 못하면 남을 원망치 않고 제 몸을 반성한다’는 예기에서 유래한다.(사진_안나겸 기자)

오경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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