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의 뒷동산, 왕의 걸음으로 걷다

[시사매거진276호] 조선왕조 정치의 중심은 제1궁인 경복궁이다. 이와 더불어 생활의 중심은 제2궁인 창덕궁이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경복궁과 함께 소실되고 난 후 1609(광해군 1) 재건된 창덕궁은 275년간 법궁이며 정궁 역할을 대신했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의 절반이 넘는 긴 세월이다. 조선왕조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임금들이 기거했으며 또한 가장 많이 사랑받던 곳이다. 건축 초기 원형에 가까운 전각이 다수 남아 있으며 건축과 조경이 조화롭게 배치된 공간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 현재 관리되고 있는 조선왕조의 궁궐 중 원형이 가장 잘 보존돼 있으며 여백의 미는 물론 자연미가 가장 아름답게 살아있는 왕실 정원과 함께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

낙선재 일원은 크게 낙선재와 석복현, 수강재 3곳을 아울러 통칭한다. 그 부속 건물로는 상량정, 한정당, 취운정 등이 있지만 현재는 비공개 구간이다.(사진_나은미 사진작가)

경복궁 옆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된 <동궐도>는 조선왕조의 궁궐 사역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조감도 형식의 건축 그림이다. ‘경복궁과 후원의 배치도를 그린 <북궐도>와 더불어 창덕궁창경궁의 지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동궐도>는 당시 화원들의 뛰어난 화공기법과 정밀성을 통해 조선왕조의 궁궐 모습을 쉽게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1395(태조 4)에 지어진 경복궁(景福宮, 사적 제117)’과 그 이궁으로 1405(태종5)에 지어진 창덕궁(昌德宮, 사적 제122,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그리고 1418(세종 즉위)에 지어진 창경궁(昌慶宮, 사적 제123)은 서로 다른 별개의 궁궐이다. 하지만 종로구 세종로 1번지에 위치한 경복궁과 다르게, 와룡동 2-71에 위치한 창덕궁과 와룡동 2-1번지에 위치한 창경궁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이로 인해 두 궁궐을 형제궁궐 혹은 동쪽에 위치한 궁궐이라는 뜻의 동궐이라 불렀다.

낙선재 제24대 헌종이 후궁인 경빈김씨가 기거할 공간으로 1847년(헌종 13)에 건립했다. 정조대왕의 개혁 정신을 이어받아 조선왕실의 권위를 확립하고 왕권을 강화하며 실사구시를 실천하려는 의지를 두고 있다. ‘선(善)을 즐거워한다’는 뜻을 담고 있으며, 외관은 화려하지 않고 소박하며 단청을 칠하지 않았다. 대신 창살과 벽을 아름다운 문양으로 장식했다.(사진_나은미 사진작가)
석복헌은 1848년(헌종 14)에 낙선재와 연이어 동쪽에 지었다. ‘복(福)을 내리는 집’이란 뜻으로 새로 들어온 후궁 경빈김씨를 맞이해 아들을 낳기를 바라는 소원이 들어있다.(사진_나은미 사진작가)

창덕궁 후원으로 가는 길목의 낙선재 일원

창덕궁은 크게 외전과 내전으로 나뉜다. 본래 생활공간으로 지어진 궁궐이 이후 정치공간으로 확장되었기에 부득불 진선문과 숙장문 사이에 위치한 인정전(仁政殿, 국보 제225)’을 중심으로 선정전, 희정당, 성정각 등이 외전에 속한다. 그리고 인정전의 부속 건물인 진설청, 선원전, 양지당이 내전에 속하고, 숙장문 밖 대조전과 낙선재, 후원에 속한 부용정, 영화당, 선향재, 연경당 등이 내전에 속한다.

특히 창덕궁 안쪽에 위치한 동궐 쪽에는 길이 세 갈래로 갈라져 북쪽으로 후원, 동쪽으로 창덕궁, 남쪽으로 낙선재 일원이 위치한다. 그중 낙선재(樂善齋, 보물 제1764)는 소박하고 정겨운 곳이지만 매우 의미심장한 역사를 담고 있다. 마지막 황제인 고종과 순종이 비빈과 고명딸이 이곳에 머물며 여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낙선재 일원은 크게 낙선재와 석복현, 수강재 3곳을 아울러 통칭한다. 그 부속 건물로는 상량정, 한정당, 취운정 등이 있지만 현재는 비공개 구간이다. 본래 낙선재는 제24대 헌종이 후궁인 경빈김씨가 기거할 공간으로 1847(헌종 13)에 건립했다. 무엇도다 정조대왕의 개혁 정신을 이어받아 조선왕실의 권위를 확립하고 왕권을 강화하며 실사구시를 실천하려는 의지를 두고 있다. 또한 중국의 태평성대를 이룬 순() 임금의 ()을 즐거워한다는 뜻을 담고 낙선재(樂善齋)라는 이름을 지었다. 외관 역시 화려함을 좇지 않고 소박함을 내세우고자 서재와 사랑채에는 단청을 칠하지 않았고 대신 창살과 벽을 아름다운 문양으로 장식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848(헌종 14) 낙선재와 연이어 동쪽에 석복헌(錫福軒)을 지었다. 그 뜻은 ()을 내리는 집이다. 정실인 효현왕후가 사망한 후 1844(헌종 10)에 효정왕후를 계비로 맞이하였으나 후사가 없었다. 이어 1847(헌종 13)에 새로 후궁 경빈김씨를 맞이하고 아들을 낳기 위해 복을 빌었다.

또한 석복헌 옆에 수강재(壽康齋)를 지었다. 이는 육순을 맞이한 조모 대왕대비 순원왕후 안동김씨가 기거할 곳이다. ‘서경(書經)]에서 말하는 다섯 가지 복() 중 장수와 강녕을 기원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낙선재 일원은, 정비가 아닌 후궁 경빈김씨가 거할 낙선재와 아들을 낳기 위한 석복현, 그리고 대왕대비가 거할 수강재가 나란한 위치에 배치돼 있다. 이것은 경빈김씨의 위상을 높이고 그 후사의 권위와 정통성을 높이려 했던 헌종의 숨은 의중 때문이다.

하지만 낙선재 일원은 조선왕조 마지막 대에 이르러 비운의 황실 여인들이 거처하는 공간이 되었다. 1884년 갑신정변 직후 고종황제는 낙선재를 집무실로 사용했으며, 순종황제는 1907년 황제의 지위를 물려받은 뒤 창덕궁으로 옮겨갔지만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후 1912년에는 다시 낙선재로 돌아왔다. 이때 순종황제의 계비인 순정효황후 해평윤씨가 석복헌에서 생활하다가 196673세로 사망했다.

이어 1962년에는 고종황제의 고명딸인 덕혜옹주(德惠翁主, 1912~1989)가 일본에서 돌아와 수강재에 머물다가 1989년 사망하고, 고종의 7남이며 조선왕실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이은(李垠, 1897~1970)’과 이방자(李方子, 1901~1989) 여사 부부는 1963년 귀국해 낙선재에 머물다가 7년 후인 1970년에 영친왕이, 19894월 이방자 여사가 사망함에 따라 조선왕조의 궁궐은 비워지게 된다.

수강재는 석복헌와 한 지붕 아래 있다.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기거할 곳으로 ‘장수와 강녕을 기원한다’는 뜻이다.(사진_나은미 사진작가)

 

낙선재 일원에 속하는 뒤뜰은 복원 중이라 일반에 공개되지 않고 있다. 조선왕조 마지막 대에 이르러 비운의 황실 여인들이 거처하는 공간이 되었다. 1912년 순종황제가 이곳에 돌아온 후 계비인 순정효황후가 석복헌에서 73세로 사망했다. 이어 1962년 덕혜옹주가 일본에서 돌아와 수강재에 머물다가 사망하고,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가 머물다가 사망함으로 궁궐이 모두 비워지게 되었다.(사진_나은미 사진작가)
좌측에 있는 부용정은 2개의 기둥이 연못에 들어가 있다. 정조대왕의 발자취가 서린 곳으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사상에 따라 네모난 연못 안에 둥근 섬을 만들고 커다란 소나무를 심었다. 또한 주합루 1층에는 수만 권의 책이 보관된 규장각이 있고, 2층은 학자들이 모여 토론하던 장소다. 입구는 어수문이라 하여 왕만 통과할 수 있게 만들었고, 그 옆의 작은 문은 신하들이 출입했다.(사진_나은미 사진작가)

자연과 인공미가 조화를 이룬 후원

창덕궁 북쪽으로 왕실의 정원인 후원(後苑)’이 있다. 비원(祕苑), 궁원(宮苑), 금원(禁苑), 북원(北苑), 내원(內苑), 상림원(上林苑) 등으로 불리는 한국 최대의 궁중 정원이다. 1405(태종 5) 10, 조선 왕들의 산책로로 설계되어 275년을 거치는 동안 100여 개 이상의 누각과 정자가 들어서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누각 18채와 정자 22채만 남아 있다.

왕과 왕실 가족이 독서를 즐기거나 휴식을 취하던 곳으로 제사를 지내거나 연회를 베푸는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또한 과거 시험을 보기도 했다. 무엇보다 왕이 사냥을 하거나 무술을 연마하는 곳으로 일반 백성의 출입이 철저하게 금지되었다. 때문에 이곳을 금원(禁苑, 출입할 수 없는 정원)’이라 불렸다.

하지만 190311, 일제강점기 때 후원을 관리하는 기구로 비원은 만들면서 1904<고종실록>에 광무 8715일자에는 비원이라 기록되기도 한다. 이어 1908년부터는 아예 비원(祕苑)이라 불리며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일본 막료들과 친일 대신들의 비밀 연회 장소로 사용되었다. 하급 관리들을 비롯한 일반인이 출입하면서 훼손된 후궁을 광복 후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재정비를 하여 옛날의 모습으로 복원하고 있다.

이곳 후원은 크게 6구역으로 나뉜다. 첫째는 부용지와 주합루이고, 둘째는 애련지와 의두합니다. 셋째는 연경당이고, 넷째는 존덕정 일원이고, 다섯째는 옥류천 일원이고, 여섯째는 신 선원전 일원이다. 현재는 다섯째 옥류천 일원과 여섯째 신 선원전 일원이 발굴, 복원 중이라 관람이 불가하다.

첫째 부용지에 있는 주합루와 영화당은 정조대왕의 발자취가 서린 곳이다. 처음 부용지 구역은 사방이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어 출입문을 통해야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주합루와 영화당을 두고 하나의 아름다운 연못 정원을 이룬다. ‘천원지방(天元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은 음양사상에 따라 땅을 의미하는 네모난 연못 안에 하늘을 뜻하는 둥근 섬을 두고 커다란 소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2개의 기둥이 연못에 들어간 부용정과 더불어 주합루가 있다. 특히 1층은 수만 권의 책이 보관된 규장각이 있고, 2층은 학자들의 토론 장소가 있어 둘을 하나로 합친다는 의미의 주합루라 불렀다. 그 입구는 어수문이라 하여 왕만 통과할 수 있게 만들었고 옆의 작은 문은 신하들이 드나들었다. 동쪽 영화당 앞마당에서는 비정기적으로 특별 과거시험이 치러지기도 했다.

둘째 애련지와 의두합 초입에는 불로문이 있다. 숙종 때 내 연꽃을 사랑함은/ 더러운 곳에 처하여도 맑고 깨끗하여/ 은연히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이다애련지라는 이름이 붙었다. 거기에 이 문을 통과하면 늙지 않는다는 의미의 돌로 된 불로문이 있다. 그리고 단출한 느낌을 주는 애련정과 효명세자가 서재로 사용했던 의두합, 가장 작은 건물 운경거가 있다.

셋째 연경당은 순조 때 지어진 건물로 조선시대 양반집을 본떠 지은 건물이다. 훗날 순조와 왕비가 이곳에 머물며 조촐한 삶을 향유했다. 안채와 사랑채, 서재인 선향재, 농수정 등으로 이루어진 연경당은 120여 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 양반집이 99칸인 것과 다르다.

넷째는 존덕정 일원이다. 이곳은 애련지 오솔길을 따라 산속으로 향한다. 창덕궁에서 마지막으로 지어진 곳이다. 역시 자연 친화적인 공간으로 아름다운 연못과 존덕정, 폄우사, 승재정 등 여러 석조 건축물을 볼 수 있다. 그리고 2중 지붕에 육각형 모양을 한 존덕정은 왕의 휴식 공간이라 천장에 청룡과 황룡의 그림이 장식되어 있다.

그 외 옥류천 일원은 인조 때 지은 소요암과 작은 폭포가 있다. 또한 소요정, 취한정, 청의정, 태극정, 농산정 등 여러 개의 아담한 정자는 왕이 쉬거나 독서를 했던 장소다. 그중 청의정은 초가지붕으로 지어졌는데 그 앞 작은 논에서 왕이 직접 농사를 짓고 파종을 하며 추수를 한 후 볏짚으로 지붕을 덮은 곳이다.

부용지 동쪽에 위치한 연화당 앞마당에서는 비정기적으로 특별 과거시험이 치러졌다.(사진_나은미 사진작가)
연경당은 순조 때 지어진 건물로, 조선시대 양반집을 본떠 지은 건물이다. 훗날 순조와 왕비가 이곳에 머물며 조촐한 삶을 향유했다. 안채와 사랑채, 서재인 선향재, 농수정 등으로 이루어진 연경당은 120여 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 양반집이 99칸인 것과 다르다.(사진_나은미 사진작가)

오경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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