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 자연미 & 전통적 정감 살아있는 궁궐

[시사매거진275호] 조선왕조 건국이념을 담은 정치적 성향의 남성적 법궁이 경복궁(景福宮)’이었다면, 생활주거 공간으로써 자연 친화적 성향의 여성적 이궁이 창덕궁(昌德宮)’이다. 반듯반듯 유교의 예법대로 지어진 웅장하고 근엄한 경복궁과 다르게 이곳 창덕궁은 한국의 자연미를 드러내며 지형지세에 맞게 유연하고 아름다운 풍광과 정취를 보여준다. 특히 건축과 조경의 조합이 빼어나 한국적 공간 미학(美學)의 정수로 손꼽힐 뿐만 아니라 건축사에 있어서도 조선시대 궁궐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어 그 가치가 높다. 창덕궁과 더불어 왕실의 정원인 후원(後苑)’은 세계문화유산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역에 따라 1997126일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유산으로 등록돼 있다.

인정문 앞 즉위식 현장 (사진_나은미 사진작가)

조선왕조의 정치적 이념에 따라 유교 예법을 표방하며 일직선 상으로 질서 정연하게 지어진 경복궁(景福宮, 사적 제117)’과는 달리 이곳 창덕궁(昌德宮, 사적 제122,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은 지리적 여건과 환경에 맞게 한국의 자연미를 그대로 수용한 전통 궁궐이다. 경복궁을 비롯해 창경궁과 경희궁이 정문에서 일직선 상으로 정전을 볼 수 있게 설계되었다면 이곳 창덕궁만큼은 정문인 돈화문에서 정전인 인정전이 직선거리로 보이지 않는다. 이는 자연의 지형에 따라 제각각 특징을 살려 친화적으로 전각을 지었기 때문이다.

또한 왕위와 왕권의 위엄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건축물이기보다는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며 왕족이 생활하기에 편리하도록 설계된 정적 공간이다. 왕의 숙소는 물론 왕비와 비빈, 대비와 왕대비, 왕자와 공주, 옹주들이 기거하는 여성적 장소이기에 아기자기 아름다운 공간으로 배치돼 있다. 특히 후원(後苑, 사적 제122, 세계문화유산)을 비롯한 궁궐 곳곳에 정자와 연못, 폭포와 화단, 나무들을 조화롭게 배치하여 휴식과 체험, 경연과 독서를 할 수 있도록 했다.

북한산과 매봉산에서 뻗어내린 산줄기를 창덕궁 안으로 끌어들여 나지막한 언덕과 비탈을 만들어 산책로를 조성하고, 계곡물을 끌어들여 연못과 작은 폭포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정자를 지어 시절을 감상할 수 있게 하고, 산그늘 아래 숲을 이용해 체험터는 물론 활쏘는 궁터, 경작하는 농터를 만들어 삶의 기쁨을 느끼도록 했다. 궁궐 건축물과 산, 숲이 조화롭게 어울어져 고고한 전통의 미를 극대화한다.

돈화문(사진_나은미 사진작가)
금천교와 진선문(사진_나은미 사진작가)
금천교와 진선문(사진_나은미 사진작가)

2궁 창덕궁의 역사, 탄생과 확장의 비화?

창덕궁은 조선왕조의 이궁이다. 공식이 아니라 비공식 궁궐인 셈이다. 정궁이며 법궁인 경복궁이 태조 4년인 1395년에 건축되었다면 이곳 창덕궁은 태종 4년인 140510월에 완공되었다. 두 궁궐 사이에 10년이란 간극이 있다. 특히 이곳은 경복궁 동쪽 향교동(지금의 종로구 와룡동)에 위치하며 임진왜란 때 정궁인 경복궁이 화재로 소실된 후 275년간 정궁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다가 조선후기인 1868(고종 6) 대원군에 의해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정궁의 지위를 잃었다. 1897년에는 아관파천으로 인해 덕수궁으로 돌아온 고종황제의 정치로 황궁 자리를 물려주었다. 하지만 1907년 순종황제가 창덕궁에 기거함으로 정치와 생활의 중심이 되어 다시 정궁이 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청사와 관사에 이어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청와대(靑瓦臺)’가 건축되어 궁궐의 사명은 다했다. 다만 이씨 황족의 생활공간으로 유지되며 순정효황후(순종의 비 해평윤씨), 영친왕(고종의 7째 아들 이은, 이왕세자, 의민황태자). 이방자 여사(영친왕 이은의 일본왕족 아내), 덕혜옹주(고종의 고명딸)가 창덕궁 내 낙선재에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이러한 창덕궁의 탄생 비화도 남다르다. 1392년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 이성계가 통치 4년째인 1394년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고 그해 12월에 경복궁을 착공했다. 그리고 19359월에 390여 칸의 1차 궁궐을 완공했다. 하지만 3년 후인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다. 태조 이성계가 경복궁에서 정사를 펼치는 동안 8남 방석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5남 방원이 사병을 이끌고 난을 일으켜 막내 이방석, 7남 이방번, 신하 정도전을 살해한다. 이후 자신의 첫째형 이방우(태조 즉위 후 사망) 대신 둘째 형 이방과를 왕(정종)의 자리에 앉힌다.

이에 정종은 1399년 형제들이 죽어간 살육의 현장인 경복궁을 벌리고 옛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으로 천도한다. 그리고 다시 2년 후 동생 이방원에게 왕위(태종)를 물려준다. 1405년 개경에 있던 태종은 한양 재천도를 단행했다. 이때 태종은 경복궁에 입성하기를 꺼려하여 경복궁 동쪽에 자신이 거할 새로운 궁궐을 짓도록 명령했다. 바로 창덕궁이다. 완공이 되지 않아 입궐이 불가능한 데도 경복궁에 들어가지 않고 민가에 일주일간 머물다가 기어이 창덕궁으로 입성했다.

그는 큰 의례나 행사가 있을 때는 정궁이며 법궁인 경복궁을 사용했고, 자신의 생활과 일상 범일 정치는 창덕궁을 이용했다. 경복궁과 창덕궁 양궐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그리고 첫째 양녕대군 이제, 2남 효령대군 이보를 대신해 3남 충령대군 이도가 왕위(세종)에 오르자 경복궁 확장 공사를 지시해 왕권을 강화한다. 자신은 협소한 창덕궁에 머물렀지만 아들은 매우 화려하고 권위적인 경복궁에서 정사를 펼치도록 경회루를 건설하고 추가 중수 공사를 진행했다.

이로 인해 세종대왕은 경복궁에서 집현전과 궐내각사 등 여러 전각을 새로 짓고 활용하며 인재를 등용하는 조선조 최고의 왕도정치(의정부서사제)를 구현했다. 그리고 그 이후 조선후기 왕들은 경희궁과 창덕궁을 오가는 양궐체제를 활용했다. 조선왕조와 더불어 정치와 사회, 인생의 영광과 오욕을 같이 하다가 세월의 부침 속으로 박제가 된 것이 바로 이곳 창덕궁이다.

인정전(사진_나은미 사진작가)
선정문(사진_나은미 사진작가)
청기와로 지어진 선정전(사진_나은미 사진작가)

창덕궁 공존, 내전과 외전, 사적과 공적인 공간

창덕궁은 외전과 내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이 신하들과 공식적인 정치적 업무를 보던 공간이 외전(外殿)이고, 왕과 왕실 여성들이 생활하던 공간이 내전(內殿)이다. 궁궐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 보물 제383)’을 시작으로 진선문과 숙장문 사이의 인정전, 선정전, 희정당, 성정각 등이 외전에 속한다. 그리고 그에 부속된 진설청, 선원전, 양지당 그리고 대조전과 낙선재 외 후원의 부용정, 영화당, 선향재, 연경당 등이 내전에 속한다.

먼저 돈화문에서 금천교(錦川橋, 보물 제1762)’라는 돌다리는 건너 진선문 안으로 들어가면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인정문이 위치한다. 특히 외전 중문인 진선문(進善門)’에서 내전 중문 숙장문(肅章門)’으로 향하는 이곳 인정문 앞마당은 자연지형에 따라 긴 사다리꼴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효종과 현종, 영조 등 왕이 즉위식을 가졌던 곳이다.

무엇보다 이곳 인정전(仁政殿, 국보 제225)’은 창덕궁 외전 중 가장 중심이 되는 주요 정전이다. 2단 월대 위에 위용을 드러내도록 설계했고 그 외관은 2층이지만 실내는 통째 하나로 되어 있다. 일월오봉도 왕의 병풍과 아름다운 문양의 천장, 음양각으로 세긴 창틀 등이 빼어난 예술성을 자랑한다. 왕이 공식적인 업무를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외국 사신 영접, 왕과 왕세자의 즉위식을 거행했던 곳이다. 태종 때 처음 지어진 인정전은 임진왜란과 3번의 화재로 소실되고 현재의 것은 1804년에 4번째로 지어진 건축물이다.

숙장문 좌편으로 위치한 선정전(宣政殿, 보물 제814)’은 창덕궁에서 유일하게 청기와로 되어 있다. 가격이 매우 비싼 탓에 왕과 신하들이 정책을 논하는 편전(便殿)인 이곳에만 청기와를 올렸다. 이후 국사를 논하고 의논하는 편전의 역할이 희정당으로 옮겨가면서 선대 왕과 왕비들의 신주를 모시는 곳으로 바뀌었다.

희정당(熙政堂, 보물 제815)’은 본래 왕의 침전이었으나 후에 왕의 집무실인 편전으로 사용되었다. 내전으로 지어질 당시부터 위용이 있는 팔작지붕과 새 날개 모양의 익공 처마가 아름다운 전각이었다. 또한 여러 개의 돌기둥 위에 지어진 건물로 주변에 연못이 있어 운치를 더했다. 하지만 여러 차례 소실과 더불어 1917년 화재로 다시 재건될 당시 일본인들이 경복궁 강녕전을 옮겨와 본형을 훼손하고 분위기를 바꾸었다. 여기에 서양식 가옥구조를 가미해 응접실과 회의실을 꾸미고 마루바닥에 양탄자를 깔고 유리 창문에 휘장, 벽체를 바꾸었다.

희정당 뒤편에 있는 대조전(大造殿)’은 완벽한 내전이다. 외부와 차단된 왕실 여성들만의 생활 공간이다. 처음 왕비의 침소로 지어졌다가 후에 왕이 함께 거주하게 되었다. 중앙 마루를 중심으로 왕은 왼쪽 방을, 왕비는 오른쪽 방을 사용했다. 또한 이곳은 왕자와 공주가 태어난 곳이고 이어 교육하던 장소이다. 때문에 크게 만든다는 뜻의 대조전이란 명칭을 사용했다.

하지만 1910822, 순종황제가 기거하던 이곳 대조전에서 마지막 어전회의를 개최하고 이완용 총리대신, 박제순 내무대신, 조중응 농상공부대신으로 구성된 내각이 한일병합조약(경술국치)’을 결의하도록 종용했다. 이어 통감 데라우치 통감가 조인한 후 비밀에 붙이다가 829일 반포해 519년 조선왕조의 막이 내린다.

대조전 정문인 선평문(사진_나은미 사진작가)
왕이 거하던 왼쪽방(사진_나은미 사진작가)
왕비가 거하던 오른쪽방(사진_나은미 사진작가)

오경근 칼럼니스트 sisamagazine1@sisamagazin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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