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유광남

[시사매거진274] ‘내가 그런 무서운 자를 만났었다.’

눈앞이 캄캄하였다. 침을 질질 흘리고 바닥을 기어 다니는 평생 불구자의 몰골이 된다면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 사내가 은근히 던져오던 유혹의 말투는 평범하지 않았다.

선전관이라면 그래도 나라의 정세는 어느 정도 판단할 터이니 말해주리다. 만일 통제사 이순신장군이 이번 오명을 뒤집어쓰고 병신년의 김덕령장군 꼴이 된다면 이 나라 남해 바다는 희망이 없는 것이요. 그리되면 호남은 꼼짝없이 정복당하게 되고, 호남이 끝장나면 경상 충청에 이어 조선도 자연 멸망하게 되는 것이니 반드시 통제사를 구원 해야만 하오. 당신이 장계를 찾는다면 그건 조선을 구하는 일이기도 하오.”

조영의 부인은 부들부들 떨며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남편을 보면서 혀를 찼다.

간밤에 술이 얼마나 과하셨으면 아직도 몸을 가누지 못합니까.”

의관을 주시오.”

아니, 이런 몸으로 어쩌시려고요.”

죽어도 가야하오.”

어딜 가신다고 이리 성화이십니까.”

도승지 영감을 만나야겠소.”

 

이 사람아, 절대 함구하고 있으라 했거늘 그게 무슨 소린가?”

도승지 오억령은 몹시 놀라고 흥분하며 다구 쳤다. 조영은 몸의 군데군데에서 발생하는 은은한 통증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시각이 여삼추요. 도승지 영감, 지난 해 올라 온 장계의 행방이 어찌 된 겁니까? 헌부에서도 통제사 장계의 일자 변조를 문제 삼았던 적이 있으니 이건 아무리 숨기고 감추려 해도 드러나게 되어있지 않습니까? 주상의 명일지라도 이제는 밝혀야 합니다.”

도승지는 입안이 바싹 타들어 갔다. 선전관 조영이 토설 하게 되면 이순신의 장계 사건은 일파만파의 후폭풍이 예상되는 것이다.

이럴게 아니라 좌상대감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누세.”

조영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국청에서 이미 기선을 제압당하여 곤경에 처해 있소이다. 통제사를 추국하기 위해서는 장계의 유무가 매우 중요란 관건이 되었지요. 소신은 부정 하였지만 이미 그 내용을 알고 있는 곳이 헌부와 예조이니 아무리 단속을 한다 하여도 끝내는 발설되지 않겠소이까?”

상감마마의 지엄한 분부를 신하된 자들이 어찌 망령되게 불복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절대 함구할 것일세.”

도승지 영감! 자신하시오?”

도승지 오억령은 평소의 조영과는 매우 다른 조영이 목전에 서 있음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정도 표시를 했으면 감읍하고 물러나야 정상이었다.

자네, 어디 불편하신가?”

매우 그러하오.”

그렇다고 이리 무모한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 되는 일일세. 어심(御心)을 살피셔야지.”

애초에는 그럴 생각이었소이다. 군왕의 뜻을 신하 된 도리로 받들었지요. 그러기에 도승지 영감의 지시대로 통제사의 장계에 손을 쓴 것이 아니었겠소이까.”

오억령은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어린 아이도 아닐 진데 이놈이 계속 물고 늘어지는 연유가 어디 있는가?

입을 조심해야 할 걸세.”

이것이 소신만 조심한다고 될 일이 아니외다. 헌부와 예조에도......”

도승지는 서둘러 말을 끊었다.

어허, 이미 오래 전에 마무리 된 사안일세. 자네만 조용히 하면 되는 것이야. 알겠나?”

그래도 끈덕지게 조영은 도승지를 물고 늘어졌다.

송구하오만 병조의 이대감이 장계의 행방을 추적하고 있으며 소신을 보자고 하시었소이다. 이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모르시옵니까? 장계의 존재 여부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다는 것이옵니다.”

도승지의 안면이 보기 흉할 정도로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이보게, 설사 이순신의 장계가 존재 한다고 해도 국문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일세. 그가 저지른 죄가 어디 한 두 가지인가?”

선전관 조영은 저미듯 찾아오는 통증에 이를 악물었다. 간헐적인 고통이 공포감을 상기시켜 주고 있었다.

그리 자신이 있다면서 어찌 장계를 숨긴단 말입니까? 행방을 말씀해 주소서!”

무모한 사람 같으니라고. 알게 되면 더 위험해 진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사실 추호도 알고 싶지 않으나... 내가 모를 경우 아주 비참한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외다. 어디에 있소?”

난 모르네.”

그럼 당장 물러나서 병판대감을 만나겠소. 속 시원하게 장계에 대한 설명을 할 것이요.”

자네...제정신인가?”

날 지키려면 장계의 안전성이 담보되어야 하외다.”

막무가내의 조영을 상대하며 도승지는 진땀을 흘렸다. 하여간 일단은 입을 막고 볼 일이었다.

장계는 동궁의 세자에게 보내졌다네.”

동궁의 세자에게로?”

정월 이였지. 임금의 지시로 각사와 각 도의 장계를 재결하기 위해 동궁으로 보내졌으나 세자께옵서 차자(箚子)로 진정 하시어 다시 돌아온 적이 있었네. 그때 다른 장계들은 되돌아 왔으나 통제사의 장계는 돌아오지 않았네.”

조영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건 전혀 의외의 상황이었다. 이순신의 장계가 동궁의 세자에게 있다는 것이 아닌가? 하여간 선전관 조영은 안도의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 보기 흉한 꼴은 면하게 생겼구나.’

 

동궁에 세자가 숨기고 있다는 것인가?”

광해군....세자 저하께옵서?”

김충선의 설명을 듣고 영상의 정원에 머물러 있던 일행 들은 저마다 탄성을 토해냈다. 광해군은 전란의 시기에 매우 활동적으로 종묘사직을 위하여 최선을 다한 왕자 중 한 명이었다.

으음, 어째서 통제사의 장계만을 넘겨주시지 않은 것일까요?”

고개를 갸웃 거리는 홍의장군 곽재우를 넌지시 바라다보며 영의정 유성룡이 입술을 떼었다.

설명이 될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세 가지 연유 중 하나가 아니겠소.”

도원수 권율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

영상의 혜안을 평소 존경해 마지않았소. 금일 안목을 높일 수 있는 기회가 왔구려.”

이는 교객(嬌客)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니 그리 대단하다고는 할 수 없소이다.”

권율의 사위인 병조판서 이항복이 좌중을 둘러보면서 영의정 유성룡이 했던 말을 극구 사양했다.

감히 짐작이란 말을 받아 드릴 수는 없사옵니다. 경청할 따름이오니 영상께서는 지도하여 주십시오.”

이것은 그리 어려운 이유가 아니나 그 뒤가 훨씬 더 복잡 하외다. 우선 왕명에 의한 행동일 수 있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자 저하의 의지일 수도 있을 것이며, 마지막 하나는 실수로 누락된 것이 아닐까 추측할 수도 있소이다.”

상감께서 동궁의 세자에게 장계를 맡기셨다는 건 쉽게 납득이 되지 않소이다.”

그럼 세자의 의지에 따라서 장계를 보관 했다는 것은 이해가 되오?”

그것도......뭔가 확연하지 않소이다.”

각 도의 장계 중에서 통제사의 것만 돌려보내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면 그 또한 다시 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겠소?”

유성룡은 주위를 둘러보면서 조심스럽게 입술을 떼었다.

세자 광해군(光海君)은 비록 세자로 책봉되었다고는 하지만 항상 불안해하고 계시오. 아시다시피 당시에는 정상적인 시기가 아니라 임진년 피난처에서 서둘러 거행한 것이요.”

광해군은 선조와 공빈김씨(恭嬪金氏) 소생으로 둘째 아들이었다. 장자인 임해군도 있었으나 세자는 광해군으로 정해졌다. 광해군은 총기(聰氣)가 남다르고 용기도 출중하여 조일전쟁 기간 내에 많은 활동을 하였다. 특히 그는 김덕령과의 인연이 있으며 세자가 직접 익호장군이란 칭호를 내려줬었다.

세자 저하는 상감마마를 두려워하고 있소.”

아들이 아버지를 두려워하는 연유가 어디에 있는가? 각자의 안면에 심각한 기류가 형성되었다. 유성룡의 입에서 광해군의 호칭이 나오자 장예지의 표정도 금방 어두워졌다. 김충선은 그녀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주의 깊게 살폈다. 그녀는 불안감으로 떨고 있었다. 김충선은 이상한 기미를 느끼고 그녀 곁으로 바싹 다가섰다.

스승님!”

장예지는 확실히 평소와 달랐다. 그 이유를 듣고 싶었으나 오성대감 이항복의 목소리가 먼저 울렸다.

세자 저하가 혹시 통제사의 장계를 숨기고 계신 의도가...?”

서애 유성룡이 침통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조선의 14대 왕 선조와 세자 광해군 사이의 뿌리 깊은 갈등을 쉽사리 공개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요.”

도원수 권율 장군은 답답한 듯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는 무인답게 호방함을 그대로 드러냈다.

어려운 이야기를 돌려 말 하지 말고, 그냥 확 공개하십시오. 대관절 성상과 세자 사이에 어떤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겁니까? 동궁 전에서 통제사의 장계를 감추고 있는 의도가 뭐요?”

전원의 시선이 서애 유성룡과 오성 이항복에게 쏠렸다. 그들은 조선 최고의 재상으로 손색이 없는 인물들이었다. 젊은 이항복이 빙장에게 시선을 고정 시키며 아뢴다.

지난 3년 전, 갑오년에 명국에 조선의 세자책봉을 주청 하였으나 장자인 임해군(臨海君)이 있음을 이유로 거절당하였다는 것은 모두 알고 계시지요?”

곽재우가 오랜만에 응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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