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단, 유교문화의 경제적 기반인 농사신에게 제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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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단, 유교문화의 경제적 기반인 농사신에게 제사하다
  • 오경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1.03.08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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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백성의 안녕 기원하던 ‘사직단의 흥망성쇠 역사’

[시사매거진273호] 새 나라를 개창하며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왕조의 가장 중요한 두 축은 종묘(宗廟)’사직(社稷)’이다. 정신세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며 유교문화의 경제적 기반인 농업 신들을 숭상하는 가시적 공간이다. 종묘가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들의 혼을 담은 궁궐이었다면 사직은 토지신과 농사신의 혼을 담은 제궁이다. 통치자와 함께 흥망성쇠를 같이 한 이곳은 그래서 역사와 문화적 가치가 높다.

북신문은 신이 드나드는 문이다. 다른 문과 다르게 특별히 3문을 조성되어 있다. 가운데는 신들이 출입하는 신로이다. (사진_안나겸 사회부 기자)
북신문은 신이 드나드는 문이다. 다른 문과 다르게 특별히 3문을 조성되어 있다. 가운데는 신들이 출입하는 신로이다. (사진_안나겸 사회부 기자)
북신문은 신이 드나드는 문이다. 다른 문과 다르게 특별히 3문을 조성되어 있다. 가운데는 신들이 출입하는 신로이다. (사진_안나겸 사회부 기자)
북신문은 신이 드나드는 문이다. 다른 문과 다르게 특별히 3문을 조성되어 있다. 가운데는 신들이 출입하는 신로이다. (사진_안나겸 사회부 기자)

또한 대한제국 시대에는 황제국 칭호에 따라 사직이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으로 격상되어 제사가 행해졌으나 일제강점기 때 한국인의 정신을 말살하고자 하는 일본제국주의 정책에 의해 훼파되었다. 1911년에는 아예 신주가 불태워졌으며 거룩하고 신성하게 여기던 사직단이 간이공원으로 평토화되어 일인의 발에 짓밟혔다. 제단을 비롯한 대문과 안향청만 남기고 여러 부속 건물들이 헐리게 되었다. 이어 도로 확장과 도시 개발에 따라 대문도 24m 뒤로 옮겨졌다. 그러던 사직단이 1985년 복원 계획 수립과 더불어 정비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현재 사적 제121호다.

조선왕조의 정궁이며 법궁인 경복궁(景福宮)’을 중심으로 서쪽에 위치한 사직단(社稷壇)을 탐방하기 위해 지하철 경복궁역 1번 출구를 통해 서촌으로 나왔다. 이곳은 현재 세종마을이라 불리며 인왕산 동쪽과 경복궁 사이에 위치해 있다. 2010년부터 이곳 주민들은 세종대왕의 얼이 살아 있는 문화예술마을로 가꾸고자 하는 열망을 담아 세종마을이라 이름 지어 부르기 시작했다.

과거 조선시대에는 준수방, 인달방, 순화방, 웃대, 우대, 상대마을(상촌)이라고 불리며 중인과 일반 서민들이 거주했다. 이후 세종대왕의 생가터를 중심으로 백사 이항복이 살았고,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가 그려졌으며 추사 김정희의 명필이 탄생한 곳이다.

또한 옥계시사(백일장)’가 열리던 곳으로 많은 문인들을 비롯해 근현대에는 화가 이중섭, 시인 윤동주, 소설가 이상, 화백 박노수, 화가 천경자, 화가 이상범 등이 거주하며 다양한 작품활동을 전개했다.

아직까지 보존 중인 600여 채의 한옥과 전통시장, 소규모 갤러리, 공방 등이 어우러진 세종마을 골목길을 벗어나 큰 대로를 따라 500m 남짓 발걸음을 옮기면 조선왕조와 흥망성쇠를 같이 했던 농업의 신, 곡식의 신, 토지의 신 제사 터인 사직단을 만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훼파된 북신문 터 (사진_안나겸 사회부 기자)
일제강점기에 훼파된 북신문 터 (사진_안나겸 사회부 기자)

사직단, 농경사회 최고의 제단으로 국가와 민생의 근본

서울 종로구 사직동(社稷洞) 1-28번지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건축물 단지(壇址)1963121에 지정된 사직단은 사적 제121호이다. 크기 면적은 대략 9,075이다. 조선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고려의 제도를 따라 경복궁 동쪽에 종묘, 서쪽에 사직단을 설치하였다. 이 사직이란 토지의 신인 ()’와 곡식의 신인 ()’을 말하며 이들 신들에게 제사 지내는 제단(祭壇)이 바로 사직단이다.

이미 삼국시대부터 농경사회를 이룩하던 우리나라는 땅과 곡식이 국가의 근본이었기에 사직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를 관리하고 제사와 실무를 담당하는 관아까지 두었다. 바로 사직서(社稷署)’. 또한 수도 한양 외에도 군현에 이르기까지 전국 각지의 요충지에 사직단을 세워 국가와 백성의 안녕을 기원하기도 했다. 고려를 거쳐 국가의 가장 중요하고 격이 높은 제사로 자리매김 된다.

1395(태조 4) 사직단 안에 2개의 설단이 완성되자 그 주위로 담장을 두르고 그 안에 신실(神室)과 신문(神門)을 세웠다. 사직단은 동서양단 2개 단으로 조성되었는데 동쪽에는 국사(國社:正位土神)’를 모시기 위한 사단을, 서쪽에는 국직(國稷:正位穀神)’을 모시기 위한 직단을 두었다. 그리고 단 주위에는 주척으로 높이 2.5, 너비 1자의 석주(돌기둥)를 각기 세워 후토씨(后土氏)와 후직씨(后稷氏)를 배향하였다.

설단은 네모반듯하며 세벌장대석을 높이 3자가 되게 하고 한 변이 25(주척)의 크기로 평면을 설정하였다. 또한 설단의 4면에는 3층의 돌계단을 설치하였으며 단상 네 귀퉁이에는 구멍난 돌이 박혀 있고 큰 쇠고리가 꽂혔는데, 이는 기둥을 세우고 차일을 치도록 설비하였던 것이다.

사직단에는 1년에 4회 제사를 지낸다. 대사(大祀)와 선농(先農선잠(先蠶우단(雩壇)이다. 그 외 특별한 경우에는 중사(中祀), 기곡제(祈穀祭),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기도 했다.

북신문에서 바라본 사단과 직단 (사진_안나겸 사회부 기자)
북신문에서 바라본 사단과 직단 (사진_안나겸 사회부 기자)

문헌에 기록된 사직단의 배치와 의미

우리나라 사직단의 역사는 <삼국사기><문헌비고>에서 시작된다. 고구려는 391(고국양왕 9)에 국사(國社)를 세웠고, 신라는 783(선덕왕 4)에 사직단을 세웠다. 고대 농경사회에서 국토(토지)와 오곡(곡식)은 국가와 민생의 근본이었기에 이미 두 신에게 제사 지내는 사직단이 삼국시대부터 행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려 때는 <고려사>를 통해 991(성종 10) 처음으로 도성인 개경 서쪽에 사직단을 만들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이후 사직단을 수축하거나 사직단에서 행한 제례를 정비한 사실 역시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전통을 조선에서 그대로 답습한다.

조선태조 이성계는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하고 난 후 제일 먼저 종묘와 사직단을 조성했다. 1395(태조 4) 1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4월에 완성했다. 그리고 1406(태종 6) 6월에는 주변 지형에 맞게 사직단을 개수하였고, 이를 관리하며 지키는 관리를 두었으며, 나라 안 여러 주요처에 사직단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현재 지방에 남아 있는 사직단은 노변동사직단(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6), 남원사직단(전라북도 기념물 제79), 보은회인사직단(충청북도 기념물 제157), 산청단성사직단(경상남도 기념물 제255), 창녕사직단(경상남도 기념물 제278) 등이며 각각 지방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그 외 한양도성 서쪽인 한성부 의인달방(儀仁達坊)에 설치한 사직단은 지금의 사직공원으로 터만 남아 있다.

사직단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한양도성 서쪽의 우백호에 해당하는 인왕산줄기가 내려온 지형과 조화되도록 조성되었기 때문에 정확하게 남북을 향하지 않고 약간 동남쪽으로 틀어져 있다. 그럼으로 도성 쪽을 바라보는 형상이다. 이러한 배치는 조선 상황에 맞게 남북 방위를 지키는 풍수지리에 의한 것이다.

1414(태종 14) 4월에 설단 주위에 담을 둘렀으며, 담 안에는 신실(神室)과 신문(神門)을 세웠다. <국조오례의> <사직단도(社稷壇圖)>에서는 사직단의 배치에 있어서 가장 중심에 사단과 직단을 두고, 이를 중심으로 단을 낮게 둘러싼 ()’를 두었으며, 그 밖으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다시 둘레담을 두었다. 유와 둘레담에는 각각 사방의 중앙에 홍살문이 있고, 둘레담의 북문만 삼문(三門)으로 되어 있다.

특히 유에 설치한 문을 유문(壝門)이라고 한다. 기와를 얹은 맞담인 유는 한 변의 길이가 25, 150척이다. 북유문과 북신문 사이에는 판위가 있고, 그곳에서 서쪽 홍살문을 거쳐 북신문 사이에는 넓은 터와 길이 나 있다. 이곳은 제의에 참여하는 관계 관원이 반열(班列)하는 곳으로 왕과 왕세자 그리고 제관의 대기 장소로 쓰이며, 친제(親祭) 때에는 이 사이의 길을 신로로 사용하였다. 이를 <사직서의궤(社稷署儀軌)>에 기록하였다.

북신문 안쪽으로 홍상문이 보인다. 사단과 직단을 둘러싸고 있는 두 개의 담장에는 사방에 각각 유문과 신문을 두었다. (사진_안나겸 사회부 기자)
북신문 안쪽으로 홍상문이 보인다. 사단과 직단을 둘러싸고 있는 두 개의 담장에는 사방에 각각 유문과 신문을 두었다. (사진_안나겸 사회부 기자)

흥망성쇠 거듭한 사직단, 철거와 복원의 역사

1908년 일제 통감부는 칙령을 내려 사직단 향사에 관한 시설을 대부분 철폐시킴에 따라 폐지되게 된다. 제일 먼저 1911년 사직서 관청 건물과 사직단 일대의 대지가 조선총독부로 넘어감에 따라 사직단은 경성부에 이관되었다. 그리고 1922년에 사직단 주변에 도로를 내고 공원을 조성하면서 부속 건물들이 철거되었다. 이 때 등과정 옛터에 경희궁 황확정을 같이 이전하였다.

그리고 1924년에는 공원으로 개설하였으며 1936년 사직단 일대를 고적 제57호로 지정한다. 이어 1936년 사직단 대문을 보물 제 117호로 지정하고 1940년에는 도시 공원으로 사용한다. 이로써 인왕산 줄기를 타고 내린 풍수지리를 훼손하며 사직단 본래 모습을 잃게 만든다.

해방 후 1962년 도시 확장으로 정문이 뒤로 이건 되었고, 1970년대에는 북쪽에 종로도서관과 동사무소와 파출소가 설립되었고, 서쪽에는 수영장 등이 건립되어 주변 환경이 훼손되었다. 무엇보다 사직단 대문은 1962년과 1973년 도로 확장으로 24m 가량 뒤쪽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정문은 임진왜란 뒤 재건된 것으로 정면 3, 측면 2칸의 단층 맞배지붕이다. 대문과 안향청(安香廳) 두 곳만 남기고 여러 부속 건물들이 철거된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1963년 사직단을 사적 제121호로, 대문을 보물 제 177호로 지정하여 그 가치를 되살린다. 그리고 1988년 사직단 보수 정비와 사직대제를 복원했다. 그리고 2012년 종로구청 관리에서 문화재청으로 변경되면서 우리문화 유산에 대한 보호와 관리 그리고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현재 사직대제는 2000년 중요문화재 제111호로 지정되었다. 제사를 드리는 대상은 사()와 직()을 정위(正位)로 하고, 여기에 후토(后土)와 후직(后稷)을 배향신으로 삼아 같이 모신다. 종묘제례와 더불어 사직대제는 매우 볼거리가 많은 행사다. 4세기경 고구려에서 시작된 사직대제는 통일신라를 거치면서 중국 <예제(禮制)>의 영향을 받아 정착되었다. 고려에서는 성종 10(991) 이후 당나라의 의례를 본받아 시행했는데 그 규모는 대사(大祀)였고, 제사 시기는 중춘, 중추, 납일이었다. 조선에서는 성종 5(1474)<국조오례의>를 편찬함으로 완성되었다.
 

서신문 쪽에서 전방의 직단이 보인다. 이곳은 곡식신에게 제사하는 곳이다. 2개의 홍살문이 동신문과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사진_안나겸 사회부 기자)
서신문 쪽에서 전방의 직단이 보인다. 이곳은 곡식신에게 제사하는 곳이다. 2개의 홍살문이 동신문과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사진_안나겸 사회부 기자)

오경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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