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온양에서 읊은 '강호사시가'의 ‘세종임금은이샷다’

[시사매거진] 21세기 대한민국의 행정수도인 세종특별자치시가 중부권인 충청도에 위치함에 따라 이곳 지역의 위상과 미래가 변화하고 있다. 특히 서해와 인접한 충청남도는 도시와 해양을 연결하는 교두보로써 국제적 환서해권의 거점지역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이어 중부권의 핵심 리더, 국가발전의 중심축, 통일시대 지방자치단체의 롤모델이 되겠다는 미래상을 제시한다. 특히 북부권, 서해안권, 백제권, 금강권 등 4개 지역으로 구분해 자원과 지리, 역사와 문화 특성을 살려 차별화된 지역 기능 도시로 급부상하려는 아산시(牙山市)가 크게 주목을 받고 있다. (자료_김호일 고불맹사성기념관 학예연구사)
 

 

아산은 자족경제권에 기치를 걸고 지역 첨단산업, 임해 지역 장치산업 중점배치, 주거·생산·유통·레저 등 복합기능 수행 신도시, 수도권 시장공략을 위한 포도농업 육성 등 3가지를 목표로 지역 개발 강화에 집중하고 있다.

더욱 13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아산시의 온양온천은 특기할 만하다. 조선 초기 성군인 세종대왕과 그의 권신들에 얽힌 의창제도미담이 전해지고 있으며, 당대 최고의 명재상인 맹사성(孟思誠, 1360~1438)과 최영 장군의 생애를 엿볼 수 있는 유적지가 자리 잡고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가 공존하는 고불 맹사성 고택을 통해 역사는 물론 문화적 의미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맹사성 고택. 사적 제109호. 조선초 명재상 맹사성 일가가 살던 옛집으로 우리나라 살림집 중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지는 고려 vs. 뜨는 조선’, 최영 장군과 맹사성의 인연

서울에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2시간여 달리면 성남시를 거쳐 용인시, 오산시, 평택시, 천안시 순으로 맞닿는다. 다시 그곳에서 21번 국도를 타고 아산시로 접어들면 도로 초입에 배방읍 행단길로 향하는 도로가 나타난다. 불과 10여 분 거리에 <고불맹사성기념관>맹사성 고택이 위치해 있다.

조선 태조와 정종, 태종, 세종 4대 임금을 보필하며 영의정 황희와 더불어 최고의 권력인 좌의정과 우의정을 역임한 명재상 맹사성(孟思誠). 그의 청백리 정신에 걸맞게 단아하고 기품 있는 맹사성 고택이 현대인을 맞이하고 있다. 넓은 뜰 안에 정면 4, 측면 3칸 규모의 자형 맞배지붕집이 바로 그곳이다.

본래 고려 말 무신인 최영 장군이 지은 집으로, 그의 손서(손자사위)인 맹사성에게 물려준 곳이다. 정면 4칸 중 가운데 2칸에 대청을 두고 툇마루를 달았으며 좌우에는 각각 3칸짜리 온돌방을 두었다. 대청의 정면창호는 5개의 분합문(들어열개창)1개의 외여닫이문으로 모두 정()자 살로 되어 있다. 고택 정면창호의 독특한 형식, 정자살의 형태, 두터운 문틀 등은 오래전부터 건축돼 온 고려시대 주택주거 문화임을 보여준다(고택 평면도 참조).

이러한 맹사성의 처가 조부 최영(崔瑩) 장군과 친가 조부 맹유() 군수는 고려시대 공민왕의 신하로 각각 무관과 문관을 역임했다. 뿐만 아니라 부친인 맹희도(孟希道)는 고려 문신 이색(李穡)의 제자로 정몽주(鄭夢周), 권근(權瑾)과 동문수학한 절친 사이다. 또한 아들 맹사성은 부친의 동문인 권근에게 사사한 수제자다(인물 관계도 참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가 공존하는 ‘고불 맹사성 고택’을 통해 역사는 물론 문화적 의미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가 공존하는 ‘고불 맹사성 고택’을 통해 역사는 물론 문화적 의미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맹희도는 1360년경(공민왕 9) 개경(현 개성)에서 흥양조씨 사이에서 맹사성을 낳고, 1364년경(공민왕 13)에는 최영 장군의 세거지이며 조부 맹유가 기거했던 온양 금곡동(현 배방읍 중리)에 와서 살았다. 이때 최영 장군과 이웃하며 교류를 돈독히 했는데, 문장이 뛰어나고 경전에 지식이 풍부한 신창맹씨 가문을 눈여겨본 최영 장군은 직접 맹희도를 찾아가 아들 맹사성과 손녀 동주최씨의 혼인을 약속받는다. 그 과정에 최영 장군이 낮잠을 잤는데 그의 집 배나무를 타고 용이 올라가는 꿈을 꿨었다고 한다. 잠에서 깨어보니 배나무에 5세 된 맹사성이 올라가 배를 따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1365(공민왕 14) 문과에 급제한 맹희도는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수문전제학(修文殿提學)을 역임하다가 1388년경 이성계 장군의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정계를 은퇴한다. 이후 반대파의 수장인 최영 장군이 제거되고 역성혁명을 추진하자 그는 서천군 한산면으로 내려가 떠돌다가 순절한 부친 맹유의 3년상을 치른 후 온양 금곡동(현 배방읍 중리) 최영 장군의 고택에서 맹씨행단(孟氏杏壇)’을 열고 학문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낸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와 태종 그리고 친구인 권근은 여러 차례 맹희도에게 온양에서 올라와 한양 조정을 위해 출사할 것을 요구했지만 이에 따르지 않고 끝까지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 하지만 아들 맹사성에게는 새로이 건국한 조선을 위해 제도에 입성하는 길을 만류하지 않는다. 비록 이성계에게 맞선 최영 장군의 일가친척들이 모두 몰살당했지만 손주사위인 맹사성만큼은 집안의 학식과 재능을 높이 산 까닭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당대 최고의 명재상인 맹사성(孟思誠, 1360~1438)과 최영 장군의 생애를 엿볼 수 있는 유적지.
당대 최고의 명재상인 맹사성(孟思誠, 1360~1438)과 최영 장군의 생애를 엿볼 수 있는 유적지.

청백리 재상 맹사성, <강호사시가>임금은이샷다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1360(고려 공민왕 9) 717일 수문전제학을 지낸 맹희도(孟希道)와 흥양조씨(興陽趙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신창(新昌)이고 자는 자명(自明성지(誠之)이며 호는 고불(古佛)이다. 고려시대 최고의 무신인 최영(崔瑩) 장군의 손서(孫婿)이다.

1376(우왕 2) 17세 무렵에 문과 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된 후 1386(우왕 12)에 문과 전시에 장원급제하여 춘추관검열이 되었다. 이어 여러 고위 관직을 두루 거친 후 1392년 조선 건국을 맞이해 태조 때 예조의랑이 된다. 그리고 정종 때 간의우산기상시, 간의좌산기상시가 되었다.

태종 초에는 좌사간의대부, 동부대언, 이조참의를 두루 역임하였으며 1407(태종 7) 예문관제학이 되어 진표사(進表使)로 명나라에 가는 세자 양녕대군을 따라 시종관으로서 수행하여 다녀왔다.

맹사성

 

1408년 사헌부대사헌이 되어 지평 박안신(朴安信)과 함께 태종의 차녀인 경정궁주와 결혼한 사위 평양군 조대림의 반역을 왕에게 보고하지 않고 잡아다가 고문하였다. 이 일로 태종의 큰 노여움을 사서 처형될 뻔하였으나 영의정 성석린(成石璘) 등 많은 신하가 극형을 반대하여 죽음을 면하였다.

1411년 다시 기용되어 판충주목사로 임명되었다. 그러자 예조에서 관습도감제조인 맹사성이 음률(音律)에 정통하므로 선왕의 음악을 복구하기 위하여 서울에 머물게 하여 바른 음악을 가르치도록 건의하였다. 이어 그 이듬해에는 풍해도도관찰사에 임명되자, 영의정 하륜(河崙)이 음악에 밝은 맹사성을 서울에 머물게 하여 악공(樂工)을 가르치도록 건의하였다.

1416년 이조참판에 이어 예조판서가 되었고, 이듬해엔 생원시에 시관(試官)이 되어 권채(權採) 100인을 뽑았다. 세종대왕이 친림한 문과 복시에 독권관(讀卷官)이 되었으며 그해 늙은 아버지 맹희도의 병간호를 위해 사직을 원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역마(驛馬)와 약을 하사받았다.

이어 호조판서가 되어서도 고향인 아산 온양에 내려갈 것을 알렸으나 세종대왕은 충청도도관찰사로 삼아 부친을 봉양하게 하였다. 1418년 공조판서가 되어 또다시 노부의 병간호를 위해 사직하려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1419(세종 1)에는 이조판서와 예문관대제학이 되고, 이듬해에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 1421년 의정부찬성사를 역임하고 1427년에 우의정이 되었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432년에 좌의정이 되었으며 1435(세종 17)에는 드디어 76세의 나이를 핑계로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그러나 나라에 중요한 정사(政事)가 있으면 반드시 맹사성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1438(세종 20)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세종대왕은 자신의 스승인 맹사성을 조상을 치르기 위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매우 크게 슬퍼했으며 그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내린다.

강호에 봄이 찾아드니 참을 수 없는 흥취가 저절로 난다
막걸리 마시며 시냇가에서 잡은 물고기가 안주로구나
이 몸이 이렇게 한가하게 지내는 것도 임금님의 은혜로다 /
강호에 여름이 찾아드니 별채에서 할 일이 없다
더위를 잊게 해주는 강물결은 시원한 바람을 보낸다
이 몸이 이렇게 시원하게 지내는 것도 임금님의 은혜로다 /
강호에 가을이 찾아드니 물고기마다 살이 쪄 있다
작은 배에 그물을 싣고 물결 흐르는 대로 띄워 던져두고
이 몸이 세월을 재미있게 지내는 것도 임금님의 은혜로다 /
강호에 겨울이 찾아드니 눈 깊이가 한 자가 넘는다
삿갓을 비스듬히 쓰고 도롱이로 옷을 삼아 입으니
이 몸이 춥지 않게 지내는 것도 임금님의 은혜로다

                                                                        - 고불 맹사성의 <강호사시가> 전문 -

고려 말 두문동 72현인 맹유, 맹희도, 맹사성 3대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고불 맹사성의 공복의 삶과 음악적 재능

조선시대 <필원잡기(筆苑雜記)>에는 맹사성에 대해 맹사성의 자는 성지이고 관향은 신창이다. 사람됨이 청렴하고 솔직하며 단아하고 묵중해서 재상으로 있으면서 대체만 지켰다. 천성적으로 음률을 좋아해서 언제나 젓대(옥적) 하나 가지고 다니면서 두세 마디씩 불었다.’

삽작문을 닫고 손님을 대하지 않았으며 공사를 결재 맡으러 오는 사람이 있으면 그제야 문을 열고 접대하였다. 여름에는 소나무 그늘 아래 앉았으며, 겨울에는 방안에 부들자리를 깔고 앉았다. 좌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공무로 왔던 사람이 돌아가면 곧 문을 닫았다. 공무로 오는 사람은 마을 어귀에 와서 젓대 소리를 듣고 공이 있는 줄 알았다고 기록돼 있다.

그런 그의 삶은 늘 조용하고 소탈했다. 비록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반드시 공복으로 예를 갖춰 대우했고, 효성 또한 지극하여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7일간 물도 마시지 않았고 장례를 마친 후에는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그의 효행이 알려져 1399년 효자 정려가 내려졌다. 이를 동국신속 삼강행실도에 <사성효감><희도부토>로 수록하였다.

또한 생활은 청백하여 살림을 늘리지 않았고 식량은 늘 녹미(祿米: 봉급으로 받은 쌀)로 하였다. 출입할 때에는 소() 타기를 좋아하여 보는 이들이 재상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영의정 성석린은 선배로서 맹사성의 집 가까이에 살았는데 매번 집을 오갈 때 그 집 앞에서 말을 내려 지나갔다.

특히 <흑기총(黑麒塚)>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흑기총은 맹사성과 검은 소 설화에 등장하는 검은 소의 무덤이다. 하루는 맹사성이 산에 오르던 중 아이들이 검은 소를 괴롭히는 것을 보았다. 맹사성은 아이들에게 짐승이라도 생명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고 꾸짖고 마을로 내려가 주인을 찾았으나 헛수고였다. 이에 검은 소를 집으로 데려와 보살폈고, 검은 소는 맹사성을 잘 따랐다. 맹사성은 평생 가마 대신 검은 소를 타고 다닐 정도로 검은 소를 가까이했다. 맹사성이 세상을 떠나자 검은 소는 사흘을 먹지 않고 울다가 굶어 죽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검은 소의 충심에 감동하여 맹사성의 묘 아래에 묻어주고 이를 흑기총(검은 영물의 무덤)이라 불렀다. 현재 흑기총은 경기도 광주시 직동에 있다.

그는 다양한 학문에 소질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음악 이론과 연구와 악기제작, 새로운 악보 체계를 만드는 등 세종 대 유교적 예악정치의 기초를 세우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아악과 향악의 적절한 조화를 추구하여 회례악에서 먼저 아악을 사용한 후 향악을 겸하여 연주하는 아악`향악 겸용론을 제시하여 이를 제도화했다. 세종대왕은 우리 조상이 살아서는 향악을 들으셨는데 종묘의 제사에 아악을 먼저 연주하고, 삼헌례에 이르러서야 겨우 향악을 연주하니 조상들이 평소 들으시던 음악을 쓰는 것이 어떨지 맹사성과 상의하라고 할 정도였다.

이렇게 맹사성과 관련하여 조선왕조실록에 총 989건이나 등장하며 그중 세종 대에 429건으로 가장 많다. 이는 세종을 도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음악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많은 업적을 남겼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영조 대에도 맹사성 관련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상신 맹사성의 자손을 수소문하여 그 봉사손을 바로 녹용(채용)하였다고 하는 기록이 나타나 있어 역사적으로 맹사성을 추숭했음을 알 수 있다. 그야말로 조선 전기의 문화 창달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문정공 맹사성이 1380년 경에 손수 심은 두 그루의 은행나무인 쌍행수로 당시 이 나무를 보호하기 위하여 축대를 쌓고 단을 만들었다. 뜻있는 사람들과 강학하던 자리라는 뜻으로 이곳을 행단이라 칭하였다. 충청남도 도목 제8-91(1982년 11월1일)

 

취재_안수지 사회부 기자 asj25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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