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유광남

곽재우가 설명했다.

자헌대부 김충선이 지난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우연히 김덕령 장군의 정혼녀이던 예지를 구원한 후 장군의 요청으로 예지에게 무술을 가르쳤다 합니다. 그래서 스승이 되었지요.”

스승을 대단한 분으로 모셨군. 그의 탁월한 재능은 내 인정하는 바이야. 면전에 두고 칭찬이 부끄럽긴 하지만 사실은 사실 아닌가. 사야가 김충선의 희생적 결단이 아니었다면 우리 조선의 운명도 예사롭지 않았을 것이야. 난 그 점을 분명히 알고 있지!”

도원수 권율은 지난 임진, 계사 양 해에 왜적들과 벌렸던 숱한 전투들을 떠올렸다. 행주대첩과 진주성 전투 등 크고 작은 대 혈전이 벌어 졌었다. 그 생사의 갈림길에 늘 유능한 항왜장이 참여하고 있었다. 화승총 한 자루를 걸머지고 장창과 환도로 무장한 전사는 타고난 싸움꾼이었다.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행주산성도 버틸 수 없었다.”

노장군이며 도원수의 입에서 나온 이 한 마디는 실로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행주산성 전투는 조선의 사기를 결정적으로 올려 준 육군의 최고 대승리였다. 장예지는 물론이고 곽재우도 처음 듣는 소리였다.

우린 부녀자들까지 동원하여 마지막 사력을 다하였네. 화약이 동나고, 화살도 끝이 났지.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성내의 돌덩이 뿐이었어. 그것으로 과연 얼마나 더 버틸 수 있겠는가? 그때 김충선이 화약과 신기전(神機箭)의 화살을 수송해 왔지. 항왜의 조총부대원들과 더불어서 말일세! 아찔한 순간이었어. 조금만 더 늦었어도......행주산성은 무너졌을 것이야.”

김충선은 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그것은 그저 소신의 임무에 불과할 뿐이옵니다. 도원수 영감의 불굴의 정신과 기백으로 전선이 압도당한 것이었지요. 저의 공로라니 천부당만부당 하옵니다.”

이보시게... 그리 당황해 하지 말고 더 겸손할 필요도 없네. 여긴 우리끼리 아닌가. 자네를 매우 깊이 알고 있는.”

권율은 오늘 그 답지 않게 매우 자상한 미소를 떠올렸다. 홍의장군 곽재우도 흡족해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서 도원수께서 상감에게 주청을 올리셨던 것이군요.”

도원수 권율은 부인하지 않았다.

그리하지 않고 어찌 견딜 수 있었겠소? 이런 유능한 항왜의 장수를 포기한다는 것은 조선의 신하 된 도리가 아니지 않소. 우리 조선은 이러한 전란이 실로 처음이요. 김충선과 같은 풍부한 전투, 전술의 달인이 꼭 필요했소.”

김충선이 겸손해 했다.

과찬이십니다. 도원수! 그로 인해서 관직을 제수 받고 조선의 이름을 지니게 되었으며 명실공이 조선 사람이 되었나이다. 모든 공로는 저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당연한 것일세. 나 또한 조선인이 되어 활동하는 자네의 뒷모습을 보며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르네. 정말 장하고 감사하지!”

권율은 대견하게 성장하는 김충선을 내심 뿌듯하게 느끼고 있었다는 그 심경을 드러내고 있었다. 설마 이토록 뼛속 깊이 조선인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도원수를 뵙고자 먼 길을 달려왔습니다. 조선인 김충선으로 이 답답함을 어쩌지 못하여 왔으니 헤아려 주십시오.”

도원수 권율이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길에 도달한 느낌이었다. 홍의장군 곽재우와 사야가 김충선이 방문 하였다. 게다가 지난해 억울하게 희생당한 김덕령의 정혼자도 그들과 동행 하고 있었다. 이들이 왜 자신을 예고 없이 찾아 왔는지 도원수 권율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통제사는 어찌 지내시던가?”

드디어 말문이 열어졌다. 김충선은 손아귀에 땀이 배이고 있음을 느꼈다.

번민(煩悶)하고 계십니다.”

도원수 권율이 식은 차를 마시었다.

그런가? ... 그럴 수도 있겠군. 왜적이 재침을 하는 이 시기에 그 누구인들 번민하지 않겠는가?”

곽재우가 조심스럽게 의중을 열어 보였다.

통제사가 위중합니다. 조정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으니 참으로 근심되옵니다. 혹여 김덕령 장군과 동일한 결과가 빚어진다면 이것은 참으로 조선의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도원수 권율의 얼굴에 먹먹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통제사 이순신은 그리 되어선 절대 아니 되네. 그가 존재하지 않는 수군은 수군이 아닌 것이야.”

김충선이 권율을 응시했다. 그의 눈이 소리쳐 외치고 있었다. 이순신을 위하여 도원수의 군대를 거병(擧兵)시켜야 한다고.

이순신장군은 무고하십니다. 왕은 장군을 용납하지 않으실 작정을 하고 있습니다. 영상대감을 구석으로 몰아가며 충성된 신하의 힘을 약화 시키고 간신배들을 농락하여 끝내 조선을 파국으로 치닫게 하십니다.”

무서운 말이었다. 조선의 왕 선조를 비난하는 것은 국법을 어기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장예지는 심장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만일 도원수의 불호령이 떨어진다면 그때는 상상하기 어려운 결말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상감마마를 원망하는군. 그래...이해는 하네만 우린 좀 더 신중해질 필요가 있네. 왜냐하면 지금은 전시가 아닌가. 왜적들이 코앞에서 난리를 치고 있는데...흥분하면 끝장이야.”

권율은 냉정하게 사태를 추이하는 모습이었다. 용맹한 장수이기도 하지만 지혜가 없다면 그건 반쪽에도 들지 못하는 장수이다. 진정한 장수란 지()와 용()을 겸비하고 열정과 충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도원수 권율은 그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는 대장군이었다.

통제사는 보내지 않을 것일세. 김덕령 장군처럼 그리 허무하게 보낼 수는 없지.”

그럼 도원수께서는 방도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김충선은 다급하게 물었고 권율은 짧게 대꾸했다.

없네,”

곽재우와 장예지는 인내심을 갖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김충선의 기다림은 더욱 간절했다. 그러나 권율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없어.”

곽재우가 서둘렀다.

통제사를 구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방법이 없다면 찾아야 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도원수 권율이 곽재우를 비롯한 김충선과 장예지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대들이 혹 방도를 가져온 것은 아닌가?”

김충선은 침을 꿀꺽 삼켰다. 곽재우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장예지는 그들을 번갈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이들이 가져온 방도란 무엇인가?

말씀을 올리면 따라 주시겠습니까?”

권율이 순순히 대답했다.

역모만 아니라면.”

 

19장 장계의 비밀

나는 나를 신뢰한다.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서 서장을 작성했다.

그 장계를 올리며 난 기원했었다.

왕명을 받아서 부산 앞바다로 돌진 하리라.

왜적의 함대를 그곳에서 전멸시킬 것이다!.

두 번 다시 우리 백성, 우리 강산을 유린하지 못하도록,

단 한 척의 배도 통과할 수 없도록 수장(水葬) 시키리라.

내 함대(艦隊)는 할 수 있다.

나의 수군(水軍)은 최강이며 내 함대는 무적(無敵)이다.

 

                                        (이순신의 심중일기(心中日記) 1597년 정유년 315일 을사)

 

유성룡의 얼굴에 약간의 화색이 감돌았다.

오성, 그게 사실인가? 통제사의 장계가 있었단 말이지?”

병조판서에 오른 오성대감 이항복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통제사의 증언입니다.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장계를 취하는 것이 관건이겠구먼.”

여기에는 의문이 있소이다.”

이항복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모습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만일 이장군의 서장이 제대로 전하에게 올려 졌다면 이번 통제사의 실각과 구금은 발생하지 않을 사안이었습니다.”

유성룡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이항복을 바라다보았다. 자네는 순진한 것인가? 아니면 일부러 모르는 척 하시는 건가? 대관절 어느 쪽인가?”

대감,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전하의 진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듯해서 말일세.”

오성 이항복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영의정 유성룡이 말하는 왕의 의도란 무엇인가?

혹시......?”

이항복은 조심스럽게 입술을 떼었다. 유성룡은 다소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왕은 통제사 이순신을 원하시지 않는다네.”

......!”

조일전쟁의 수렁을 경험하며 함께 어려움을 극복해 나왔던 두 사람은 잠시 말문을 닫았다. 조선의 왕 선조에 대한 신뢰는 자꾸만 흐려져 갔다. 군왕의 처신을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이건 아니었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일본이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바다의 장수입니다. 이러한 장수를 우리 손으로 해치려 한다면 조선은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겁니다.”

그래서 자네의 역할이 중요하다네. 우선 통제사의 장계 행방을 추적해야 할 것이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도승지를 뵈어야지요.”

유성룡이 당부했다.

군왕의 위엄을 지키고 신하의 의기를 봉쇄하지 말아야 하네. 이번 사태를 원만하게 수습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주게나.”

병부의 최고 책임자에 오른 이항복이었다. 왜적의 재침략이 시작되고 있는 당금의 사태를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해결해야만 했다. 육지에는 명나라 군대와 명장 도원수 권율이 존재했다. 수군이 문제였다. 만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이대로 사라지게 된다면 그 대안은 찾을 길이 없었다. 조정에서는 그 빈자리를 원균장군으로 하여금 채우고자 했지만 이항복의 판단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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