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매거진264호=유광남 작가] 장예지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충격을 맛보았다. 그리운 얼굴이었고, 부르고 싶은 대상이었으며, 기대어 마음껏 울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김충선이 거기 그렇게 장승마냥 서있었다. 
‘예지...다!’
그는 발사되어 화약이 장전되지 않은 빈총을 내려놓지 못한 채 그대로 경직되어 버렸다. 마치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전혀 의외의 돌발적인 해후이긴 했지만 이렇게 반응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녀와의 만남이 자연스럽지 못할 것이라는 것쯤은 마음속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상 했던 그 이상으로 온 전신의 세포 하나하나가 민감한 반사작용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여기 있쑤.”
화적중 한 명이 재 장전된 조총을 불쑥 내밀었다. 그때서야 김충선은 장예지를 향하고 있던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총기를 들어 올리고 심지의 불꽃이 타들어 갔다.
‘넌 어디로 갔었니? 얼마만큼 숨어 있었니?’
탄환이 발사되고, 그것은 장예지를 노리고 달려들던 왜적의 미간을 여지없이 꿰뚫었다. 
‘널 찾아 나서고 싶었으나 용기가 없었다.’
장예지는 걸음을 떼었다. 갑자기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하면서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꽁꽁 숨어 살기로 맹세했는데...... 우리 이렇게 만나네요.’
그녀 역시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다. 의도하지 않은 돌발적 상황으로 수습하기 불가능한 모습이었다. 눈물이 흘렀다. 참았던 슬픔이 봇물 터진 것처럼 하염없이 쏟아졌다. 
‘이제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무너지네요.’
장예지가 다가왔다. 눈물로 범벅된 모습이 애절하고 안타깝게 김충선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오래만이요.”
“그러네요. 사부, 강녕하셨지요?”
“물론이요. 제자는 어땠나?”
“시름을 잊고 산중마을에 그냥 묻혀 지냈어요.”
“그랬군.”
“만일 왜적의 패잔병들이 마을을 점령하지 않았다면 이리 도망 나오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럼 우린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그러게요”
“다행인가?.”
“불행이죠.”
“불행인가?”
“다행이죠.”
그리고 더 이상 대화는 없었다.

제 17장  국청의 희망
      

        드디어 국문(鞠問)이 시작 되었다. 
        내게 가해질 고초는 두렵지  않았다. 
        단지 결백을 주장함에 있어 어전회의에서 원하는
        바를 주지 못한다면 난 죽게 되리라. 
        고작 목숨을 구걸하기 위한 변명(辨明) 따위는 싫다.
        나라와 백성을 대함에 추호의 부끄러움도 없다.
        난 싸웠고, 죽도록 싸웠고 그리고 승리했다!
        과연 나의 희망은 이순신의 나라인가?
        운명(運命)이란 이상한 영감(靈感)을 동반한다.
        
       (이순신의 심중일기(心中日記) 1597년 정유년 3월 13일 계묘)

“과인의 생각은 변함이 없다. 통제사 이순신의 죄상에 대하여 그대들의 의견을 듣고 싶도다!”
정릉동 행궁의 어전에서 선조는 대신들을 모아 놓고 본격적으로 이순신의 죄를 물었다. 영의정 유성룡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병환을 핑계로 참석지 않고 있었다.
“조정을 기망(欺罔)하고 임금의 명을 무시한 죄를 지은 자이오니 국법의 지엄함을 보여줘야 할 줄 아룁니다.”
삼월 초 관직을 제수 받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심희수가 머리를 조아렸다. 이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좌의정 육두성도 거북한 음성을 토해냈다.
“이순신은 비단 어명을 거역했을 뿐만 아니라 적을 놓아주어 치지 않았사옵니다. 이것은 나라를 저버린 행위로써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죄이옵니다. 마땅히 엄벌에 처해야 하옵니다.”
이조판서 이우찬도 거들었다.
“그는 남의 공적을 때때로 가로채고 심지어 모함까지 하였사옵니다. 원균의 장성한 아들을 마치 어린아이인양 농락하여 공적을 비하(卑下)하였습니다. 이렇게 많은 죄목이 있으니 어찌 그를 살려둘 수 있겠사옵니까.”
대신들은 이미 임금의 의도를 충분히 숙지하고 있는 듯 일제히 이순신을 성토 하였다. 병조판서에서 관직이 공조판서로 바뀐 이덕형이 슬쩍 오성대감 이항복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신 병조판서 이항복 아뢰옵니다.”
왕을 비롯한 대신들의 시선이 오성에게로 쏠렸다. 새롭게 병권을 쥐게 된 이항복의 입에서 어떤 말이 튀어 나올지 저마다 궁금한 얼굴들이었다. 특히 선조의 표정은 미묘하기 그지없었다. 잔뜩 긴장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호기심 탓인지 전혀 알 수 없는 미소가 입 꼬리에 머물고 있었다.
“오성대감이시라면 기대가 되오.”
“황공하옵니다.”
이항복은 도원수 권율의 사위로 일찍이 알성급제하여 관직에 나왔으며 임진년에 왕을 모시고 의주까지 피난하는 등 최측근에서 선조를 보필하였다. 한음 이덕형과는 죽마고우(竹馬故友)이며 남다른 해학과 재기로 반짝이는 신하였다. 
“통제사 이순신의 죄는 죽어 마땅하나 그를 죽이게 된다면 크게 후회하실 세 가지가 있사옵니다. 그 첫째는 전쟁 중에는 군대의 신뢰를 받고 있는 장수를 죽이지 않는 법이옵니다. 군대의 사기가 저하되면 그 전쟁은 참으로 어렵게 되옵니다. 둘째는 백성의 지지를 받는 인사를 참하게 되면 그 주군의 백성들이 나라를 원망 하게 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살릴 수 있는 길을 모색하지 않고 그대로 죽이는 것을 능사로 삼는다면 옳은 신하를 얻지 못하시고 가벼운 신하만이 남게 될 것이옵니다. 끝으로 소신은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신하이옵니다.”
어전의 군데군데에서 미묘한 반응이 흘러 나왔다. 왕은 별로 만족스러운 표정이 아니었다. 그러나 기묘한 웃음기는 가셔지고 없었다.
“오성대감과 뜻을 같이하는 신하가 있는가? 그래...신임 공조판서는 어떠신가?”
이번에는 병조판서에서 물러난 이덕형에게 화살이 돌아왔다. 오성과는 단짝이니 의견이 같은지 알고 싶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이순신은 그 죄가 무겁다고는 하지만 임진년에 보여 주었던 기개를 무시할 수 없는 법입니다. 신은 애초 그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사오나 일전 한산도의 방문길에서 대다수의 백성들이 통제사를 칭송하고 그의 수군 함대가 왜적을 응징해 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고 있음을 보았나이다.”
좌의정 육두성의 비난성 발언이 튀어나왔다.
“공조판서는 대관절 무얼 보고 오신 겁니까? 이순신은 초기에 반짝 활략을 했다고는 하지만 그 이후 어떤 대단한 공이 있었습니까? 전하께서 삼도수군의 수장으로 신망을 두텁게 해주었더니 고작 그가 한 것은 동료인 원균을 모함하고 시기하는 행위였다는 것을 어찌 모르시오? 그는 죄질이 나쁘오!”
“장수가 긴급한 전투 상황에서 어찌 만만한 상대만을 골라서 전쟁을 치룰 수 있겠소. 나라가 위기일지니 조정의 명을 절대 거부할 수는 없는 법이요. 이순신은 법을 위반 하였으니 그에 합당한 벌을 받는 것이 조정의 권위와 나라법의 지엄함을 깨우치게 하는 것이외다.”
대사헌 홍진이 주걱턱을 내밀며 강경하게 위법 행위를 질타했다. 다수의 대신들이 허리를 굽혔다.
“이순신을 처벌해야 하옵니다.”
왕은 대신들을 굽어보며 다소 싸늘한 목청을 토해냈다.
“짐은 결코 죄가 없는 신하를 벌하였다는 오명을 듣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임금을 속이고 기만한 자는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을 것이므로 형벌을 끝까지 시행하여 그 죄상을 실토케 하라!”
영의정 유성룡이 입궐하지 않은 어전회의에서 남은 대신들은 일제히 왕명을 우러른다.
“성은이 망극 하나이다.”
“주상의 성은을 입은 신하로써 어찌 그런 망극한 행동을 저지를 수 있겠소이까? 소신은 적의 음모로 판단하였을 뿐이옵니다. 하지만 그 직후 함대를 출동 하였으니 이는 조정의 명을 따른 이동이었나이다.”
이순신은 국청(鞠廳)에서 심문을 하는 좌의정 육두성에게 당당히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당시 경상우병사를 통하여 가토의 도해(渡海)를 비밀리에 보고 받고 조정에서는 즉각 그대에게 통지 하였거늘 수군은 움직이지 않았다. 함대의 출동은 그 후 마지못한 시위였지 않은가?”
육두성의 힐난에 이순신은 침착하게 응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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