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유예술의 한계를 벗어나 새로운 지평을 열다

   
▲ Untitled 04-D (Installation, Dyed & Mixed-Media on Korean Paper, 2004)

장갑은 인간 손의 연장이다
손은 펼치면 반가움과 기쁨을, 주먹을 쥐면 의지를, 말 못하는 이들의 의사소통을 위한 수화 등, 손은 인간의 사고와 의식을 행한다. 손은 우리에게 있어서 참으로 중요하다. 그러한 중요한 손을 보호하는 장갑이 정경연 작가에 의해 평면 혹은 입체, 설치, 영상, 조각, 판화 등 미술 작품으로 표현되었다. 정경연(鄭璟娟)작가는 ‘장갑’ 으로 섬유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단순한 섬유공예가 아닌 순수 조형예술로 확장시켰기 때문이다.
보통 우리에게 장갑은 손을 보호하거나 추위를 막거나 장식하기 위하여 손에 끼는 물건에 불과하지만, 정 교수가 장갑 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좀 더 특별하다. 미국 유학시절 어머니가 고생하는 딸의 손을 생각하며 보내온 목장갑을 염색해 어버이날에 다시 보내드린 것이 계기가 된 것이다. 이후 30년 동안 그녀는 목장갑의 여러 부분을 다른 농도로 염색해 일정한 패턴에 따라 엮거나 배치한 작품을 꾸준히 발표해 왔다. 무엇이 되 든 장갑으로 나타난 손의 형상에서 우리들은 삶의 고단함과 역동성을 동시에 경험하게 된다.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면장갑들은 작가의 손에 의해 각기 다른 표정의 작품들로 표현되어지며, 손가락 끝과 마디마디 각각의 사연들이 점으로 기록되어진다. 다시 그 장갑과 점들은 변형되거나 입체화되어 반복과 증식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이미지로서 현대 미술의 다양한 장르로 표현되었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작품세계를 어느 한 대형 공간에서 보여줌으로써 작가 30여 년간의 변모를 다양하게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 Untitled-Installation (420X400cm, Dyed on Cotton Materials, 1993)

신체성과 환상, 그리고 자아의 정체성 탐구
유재길 미술평론가는 “그녀의 첫 개인전은 한국 화단에 커다란 반향과 영향을 끼쳤다. 무엇보다 ‘섬유예술의 새로운 지평’이라는 평가를 받은 그녀의 작업이 단순한 섬유공예가 아닌 순수 조형예술로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모노크롬 콜라쥬 추상화는 중생의 삶을 의미하며, 점, 선, 면을 통해 회화성을 되살리고 있다. 이것은 순수조형의 실험을 뛰어넘어 삶의 의미를 제기하는 새로운 추상화가 된다. 처음 정경연은 자기 정체성(self-identity)으로서 장갑을 내세웠다. 익명의 장갑을 통해 정체성을 찾았던 그가 이제는 구체적 이미지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추구하며, 자아의 정체성 확립에 몰두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 외에도 이 일 미술평론가는 이번 작품전에 대해 “정경연은 과거의 실험적인 작업을 일단 청산하고 보다 집약된「장갑」연작을 보인다. 그렇다고 그것이 작가가 실험적인 추구를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실험적인 자세를 한 테마에 집중시켜 그 기능성을 끝까지 추구하려는 자세를 의미한다. 그리하여 그의 근은 보다 야심적인 스케일의 것으로 확산되어 갔으며 그것은 그와 같은 스타일에다 하나의 확고한「양식(樣式)」으로서의 통일성을 부여하려는 의지표명으로도 보인다. 정경연의 장갑, 그것이 표상하고 있는 손 그 손은 그에게 있어는 다름 아닌 「기도하는 손」이라고 한다. 아마도 그 기도하는 손처럼 가냘프고도 경건하고 동시에 그처럼 많은 의미를 담은 것도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장갑도 그 손만큼 실 따라 바늘 따라 많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건네고 있다”고 말했다.

섬유예술의 장을 펼치다

   
▲ Harmoney (installation, Mixed-Media &Video Art, 2007~2008)

작가 정경연은 이미 80년대 초부터 섬유미술뿐만 아니라 설치, 세라믹(도자), 테라코타, 브론즈 등의 조각 작품 및 영상 설치 등으로 탈 장르화의 바람을 선도하였다. 이를 계기로 1988 미술기자상, 제1회 석주미술상 등을 수상한 바 있으며, 또한 제1회 오사카 트리엔날레 특별상(회화부문), MANIF 국제아트페어 대상 등 국내외의 많은 수상 경력을 갖고 있다.
특히 이번에 전시되었던 비디오 설치 작품은 유학시절에 접했던 비디오아트의 경험이 자신의 정체성으로 대변되어지는 장갑과의 절묘한 만남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확장성을 보여줌은 물론, 작가의 작업관을 보여주는 영상 메시지는 점. 선. 면. 형체는 물론 자연, 인종 및 종교 간의 화합, 그리고 인간관계를 통한 대우주의 하모니를 추구하는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최근 10여 년간 보여 온 장갑과 페인팅의 믹스한 작업과 새로운 혼합기법으로 시도되어진 판화 작업들은 관람자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이처럼 작가 정경연은 아직도 자신의 새로운 시도에 대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으며, 그 안에 내재된 감수성들은 장갑이란 소재와 함께 표현되어지고 있다. 정경연 작가는 오랫동안 그런 고민을 해온 섬유·설치작가다. 30여 년째 면장갑으로 작품을 꾸미고 있는데, 사람 손은 어찌해 볼 수 없으니, 대신 면장갑을 손 대신 빌리는 것이다. 단순한 면장갑이 그의 손을 거치면 설치작품이 되거나 그림이 되고, 때로는 조각, 혹은 판화나 영상미술이 돼 촉각적, 시각적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80년대 초반 미국에서 귀국한 정경연 작가는 노끈과 밧줄, 장갑 등을 활용한 설치미술을 선보임으로서 섬유미술의 한계성을 극복하여 미술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80년대 이후 예술의 자율성과 미술재료의 다양성 등으로 섬유공예에서 섬유예술 혹은 섬유미술이라는 용어로 그 영역이 더욱 확장되어 가는 시점이다. 미술이 가진 재료의 자율성과 표현기법의 확장에 따라 미술시장에 유입되는 다양한 소재들 중에서 섬유의 역할이 중요한 부분으로 이해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 장갑작가’ 정경연(鄭璟娟)
섬유미술은 실로 그림을 짜는 ‘타피스트리’를 비롯하여 염료를 천에 착색시키는 ‘염색’, 섬유를 부분적으로 착색하여 원하는 무늬를 만드는 ‘날염’, ‘텍스타일 디자인’, 다른 질감의 재료를 혼합하여 제작하는 ‘믹시드 미디어’ 기법, ‘실크스크린’ 등 다양한 기법과 재료를 통한 자유로운 표현 영역이다. 이제 섬유미술은 작품을 위한 하나의 표현방법이다. 섬유공예나 섬유디자인에서 더욱 확장된 개념으로서 섬유예술이라 이해하여야 한다. 최근까지 공예라고 하는 실용적 부분에 의해 순수회화에서 등한시되어 섬유공예 혹은 섬유디자인으로 불리어 왔다. 섬유미술은 근대화가 시작되는 1960년대를 중심으로 실용적이며 간편한 염색 공예와 만나 자수와 염색공예가 발달하기 시작한다. 근대화라는 사회적 욕구에 맞춰져 자수보다는 염색섬유를 선호하면서 순수예술의 것과 실용적 공예라는 부분이 혼재하여 왔다. 80년 대 이후 현대미술의 영향으로 섬유 조형작품을 제작하는 작가들이 생겨나면서 공예적 입장보다는 순수예술을 지향하는 것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온다.
현재의 미술시장은 표현양식에 대해 상당히 자유롭다. 미술투자의 관점에서 역시 어떠한 재료를 활용하였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회화나 조각에 비해 섬유공예가 경시되는 시기를 가지기도 하였지만 실험과 도전정신을 활용하면서 예술성과 조형성이 가미된 많은 작품들이 선보이고 있다. 공예라고 하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번 전시는 정경연 작가의 ‘작가 활동의 30년’, 그리고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재직의 30주년’으로서, 그에게 남다른 감회로 다가 왔을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이룩된 것이 아니라 이미 그가 최근 몇 년 동안 발표해 온 작품들 속에 서서히 발효되고 있었다는 데서, 시도를 위한 시도라는 단순한 실험적 차원에서 벗어 난 것이라 할 수 있는 여러 작품들을 종합적으로 볼 수 있는 전시였다.

정 경 연 / 鄭 璟 娟 / CHUNG, KYOUNG-YEON (1955~  )

■ 이력
1996 모스크바 국립산업 미술대학 (명예박사,러시아)
1982 인스티튜트 크스니안 쟈카르타 대학 연수 (쟈카르타,인도네시아)
1979 로드아일랜드 스쿨 오브 디자인 졸업 (석사,미국)
1978 메사츄세츠 컬리지 오브 아트 (학사,미국)
1974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2년 수료 (서울,한국)
現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섬유미술. 패션디자인과 교수
現 국립현대미술관 작품수집 심사위원
現 서울시립미술관 운영, 자문위원
現 서울특별시 미술장식심의위원회 위원
現 (사)한국텍스타일디자인협회 명예회장
現 (사)한국니트산?학협회 명예회장
現 한국디자인진흥원 사외이사
現 석주문화재단 상임이사
現 한국공예문화진흥원 이사
現 유암문화재단 이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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