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와 눈물로 지켜낸 조국, 다시 한번 되새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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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눈물로 지켜낸 조국, 다시 한번 되새겨야
  • 이준호 기자
  • 승인 2008.06.11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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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영령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이들의 정신을 본받아 애국심 함양하는 달

   
▲ 어느덧 6·25가 발발한 지 반세기가 훨씬 지나 전쟁의 아픔과 교훈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상이군경과 그 유가족들이 전사한 옛 전우와 가족들의 품으로 하나둘씩 우리들 곁에서 떠나고 있다.

어느덧 6·25가 발발한 지 반세기가 훨씬 지나 전쟁의 아픔과 교훈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상이군경과 그 유가족들이 전사한 옛 전우와 가족들의 품으로 하나둘씩 우리들 곁에서 떠나고 있다. 자라나는 세대들은 일제강점기, 6·25 등 지나간 조국의 위기들에 대해 단순히 역사적 사실로만 인식하여 나라사랑정신이 날로 희박해져 가고, 국권회복과 국토수호를 위해 흘린 피와 눈물의 가치들이 옛이야기로 잊혀 가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일신의 안위는 뒤로한 채 오직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번영만을 갈망하면서 먼 이국땅에서 모진 고난과 고통을 이겨내신 순국선열들, 이름 모를 고지에서 조국수호를 위해 장렬히 산화하신 호국영령들 바로 그분들이 계셨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오늘의 우리가 있는 것이다.
보훈이란 국가 위기시에는 나라를 지키고, 평상시에는 공동체의 존속과 발전을 보장하는 데 필요한 단합된 국민정신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소중한 정신적 가치이며 또한 지난날 공동체를 위해 희생한 분들에 대한 정당한 보상과 예우를 통해 나라를 위한 위국헌신이 국가발전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도록 하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보훈의 의미를 알고 나라사랑하는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갈 때 국가발전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

호국보훈의 6월, 민족항쟁의 역사
해마다 찾아오는 호국보훈의 달이지만, 조국을 위해 희생한 전몰장병과 순국선열에 대한 추모와 감사의 정신은 날로 희박해져 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인한 생활수준향상, 그에 따른 물질만능주의와 개인주의 경향, 전후세대의 부상, 남·북간의 화해분위기 등으로 인해 우리는 점점 호국용사들의 희생과 헌신을 망각하고 있다. 마치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평화와 번영이 아무 대가없이 쉽게 얻어진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일제시대에 일본에 맞서 독립운동을 하신 순국선열과 6.25, 월남전 등의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신 호국용사들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평화와 번영이 과연 가능한 것이었을까? 이에 대해 두말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한 지금 호국영령들에 대한 추모와 존경의 정신을 되살리기 위해 과연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6월의 대표적인 민족항쟁의 역사를 살펴보면 먼저 현충일이 가장 대표적인 기념일일 것이다. 현충일은 망종일(芒種日)로서 6·25 중 호국의 수호신으로 산화한 40만 명 이상의 국군장병들의 명복을 빌고 순국선열 및 전몰장병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위훈을 추모하는 날로서 1956년부터 정부주관의 현충일 추념식을 전국에서 동시에 거행해 오고 있는 국가의 주요 기념일로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 숨진 장병과 순국선열들의 충성을 기리기 위하여 정한 날이기도 하다.

   
▲ 6월 민주항쟁의 발달은 5공화국의 중앙정보부가 국가의 통치기관으로 판을 치고,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서 만신창이가 되도록 고문을 당하던 시기였던 1987년 1월 14일에 물고문으로 서울대생 박종철 군이 죽은 사건이 일어났다.

6.25전쟁은 광복이후 과도기를 거쳐 강대국의 이해에 따라 남북이 각기 정부를 수립한 상황에서 북한공산정권의 김일성이 1950년 6월25일 기습적으로 38도선을 돌파 남침한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었으나 아직도 분단 상태로 남아있다. 6·25은 전국토를 폐허로 만들었고, 막대한 인명피해가 있었다. 엄청난 전쟁사상자 외에도 한국군과 경찰에 의한 보도연맹학살사건·거창양민학살사건 같은 집단적 민간인 학살이 저질러졌다. 남한의 인적 손실은 모두 230만여 명에 달하였고, 북한의 인적 손실은 292만여 명인 것으로 추정된다. 남한은 휴전 직후 집을 잃고 거리에서 방황하던 전재민(戰災民)의 수가 약 200만 명에 이르렀고, 약 900개의 공장이 파괴되었으며, 약 60만 채의 가옥이 파손되었다. 이러한 인적 및 물적 손해뿐 아니라, 더욱 심각한 손해는 민족 내부의 불신과 적대감으로 인해 상대방을 증오하고 복수심을 갖게 된 점이다. 한국전쟁 이래 정치·사회·문화 등 모든 면에 걸쳐 남북한의 이질화가 점점 심화되면서 분단이 고착화되었다. 남북한의 이러한 적대감정과 이질화현상은 평화 통일의 분위기를 가로막는 장애가 되었다. 6.10만세운동은 병인(丙寅)만세운동이라고도 한다. 주동자는 연희전문의 이병립, 박하균, 경성대학의 이천진, 천도교의 박내원, 권동진, 양재식, 손재기, 박내홍, 백명천, YMCA의 박두종, 중앙고보의 이선호, 이광호, 이황희, 사회주의 측의 권오설, 김단야, 이지탁, 박민영, 인쇄직공으로 민창식, 이용재, 김항준 등이 주축이 되어 3·1운동과 같은 독립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시민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 순종 황제의 국장일을 거사일로 택하였다.
6월 민주항쟁의 발달은 5공화국의 중앙정보부가 국가의 통치기관으로 판을 치고,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서 만신창이가 되도록 고문을 당하던 시기였던 1987년 1월 14일에 물고문으로 서울대생 박종철 군이 죽은 사건이 일어났다. 마침 그때는 대통령을 직접선거로 뽑을 것이냐, 간접선거로 뽑을 것이냐 하는 논의가 뜨겁던 때였기 때문에 이 사건은 큰 파문을 몰고 왔다. 그 파장은 추모대회와 평화대행진으로 이어지면서 결국 ‘민주헌법쟁취를 위한 국민운동본부’라는 범국민적 기구를 탄생시켰다. 순결한 한 대학생을 고문으로 살해한 후에 발뺌을 하는 그 부도덕성이 국민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던 것이다. 이런 흐름에 위기를 느낀 당시 정권은 4월 13일, 대통령 직선을 위해 법을 고치는 문제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말라는 이른바 ‘호헌조치’를 발표하였다. 이에 국민들은 더욱 큰 분노를 느끼면서 불같이 일어났다. 호헌반대 여론이 각계각층으로 번지면서 교수, 교사, 시민단체, 예술인, 연예인 등이 잇따라 성명을 발표하고 나섰다. 그러던 중에 6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군이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자 그 동안 마음으로만 지지를 보내던 시민들도 거리로 나섰다. 6월 10일, 민정당이 노태우 대표위원을 대통령후보로 추대하던 그날, 전국에서는 ‘독재타도’ ‘직선제 쟁취’의 함성이 온종일 메아리쳤다. 6월 26일에 있었던 평화대행진의 날에는 전국에서 1백 80여 만명의 국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도록 하였으며, 항의의 표시로 자동차는 경적을 울리고, 전국의 교회와 사찰에서는 일제히 종을 쳐댔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게 되자 마침내 6월 29일 노태우 대통령후보는 국민들의 대통령 직선제 뜻을 받아들이겠다는 내용의‘시국수습을 위한 8개항’을 선언하였다.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이 빛나는 승리를 거두는 순간이었다. 이러한 6월 민주항쟁은 진정한 민주화 시대의 발판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호국역사탐방  호국보훈 기념관을 찾아서(1)

■ 우리나라 유일의 전쟁사 박물관 ‘전쟁기념관’
서울 용산동에 위치한 전쟁기념관은 호국 자료의 수집·보존·전시, 전쟁의 교훈과 호국정신 배양, 선열들의 호국 위훈 추모를 목적으로 1994년 6월 개관하여 총 6개의 전시실로 구분되어 있다. 호국추모실은 역대 수많은 전쟁에서 국가를 지킨 선열들의 호국정신과 위업을 기리는 공간으로 16만여 명에 달하는 전사자 명부가 봉안되어 있고, 귀면무늬의 수호상, 호국 인물들의 흉상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전쟁역사실에는 선사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각종 대외항쟁 군사자료, 무기와 장비, 호국선열들의 위업 등에 관한 자료들이 시대별로 구분·전시되어 있으며 한국전쟁실에는 북한의 남침 배경, 전쟁의 경과, 휴전협정 조인까지의 과정과 전시 국민 생활 등 총체적인 전쟁의 실상이 전시되어 있다. 해외파병실에는 통일신라 때부터 베트남전쟁, 국제연합평화유지군 파병에 이르기까지 총 12회의 해외 파병 관련 의의, 한국군의 활약상과 성과 등이 기록·전시되어 있고, 국군발전실에는 한국군의 창군에서부터 오늘날의 국군으로 발전하기까지 군사제도, 무기 및 장비, 복식과 교육훈련 모습 등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대형장비실에는 한국전쟁에 사용되었던 아군과 적군의 항공기·전차·화포 등 대형 전투장비는 물론, 한국전쟁 이후의 각종 장비와 국내 방위산업체에서 생산한 전차·유도탄·대공포·소총·탄약 등 무기와 장비가 전시되어 있다. 

 

 시대에 맞는 보훈정책의 필요
국가유공자는 조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헌신·희생하신 분들로서 오늘의 대한민국은 이분들의 거룩한 희생 위에 이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국가보훈복지제도는 국가유공자의 영예로운 생활이 보장되도록 보상을 행함으로써 생활안정과 복지향상을 도모함은 물론 국민이 그들의 숭고한 애국·애족정신을 계승 발전시킴으로써 국가사회 발전에 이바지 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목적의 원대함에 비해 국가유공자와 그 유족에 대한 정신적·물질적 예우시책은 꾸준히 변화·발전되어 왔다고는 하나 아직도 보상과 복지제도의 안정성은 여전히 불안정한 실정이다. 얼마 전 있었던 국가유공자 사태는 소란이 있다. 구조조정에서 국가유공자와 그들의 자녀는 제외된다고 하였고, 법률상에서도 보호해주는 것으로 되는데 실제 현실적으론 ‘강제조항이 아니다’라는 이유 때문이다. 이 외에도 현 시대의 국가유공자들을 위한 생활여건과 생활상에 적용되는 사회변화에 따른 방책 마련이 필요한 것이 현실이다. 60년대 이후 우리 경제의 지속적인 고도성장과 더불어 보훈제도는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와 보훈대상자의 생활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다. 그러므로 이미 한계점에 처한 보상금의 인상보다는 국민의 생활수준 향상, 가족구조의 핵가족화 추세 등 사회적 변화와 국민경제의 발전에 발맞춰 보훈대상자를 위한 적절한 복지대책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호국보훈의 달 6월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에 대한 추모 그리고 그분들의 공훈을 기리고 유족을 위로하는 한편, 모든 국민이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다지는 뜻 깊은 달이다. 나날이 호국보훈정신이 희미해져가는 지금, 잊혀진 보훈정신을 되살리고, 이를 바탕으로 국가통합과 발전의 새로운 계기를 만들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선조들의 호국정신 되새겨야

   
▲ 6.25전쟁은 광복이후 과도기를 거쳐 강대국의 이해에 따라 남북이 각기 정부를 수립한 상황에서 북한공산정권의 김일성이 1950년 6월25일 기습적으로 38도선을 돌파 남침한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 초개와 같이 자신의 육체를 희생한 순국선열·호국영령들에 대하여 아직까지 그들을 대하는 우리의 시선은 아직 낯설기만 하다. 국경일인 현충일은 언제부턴가 가족나들이 날이 되어버렸고, 6월 민주항쟁, 6.25전쟁 기념일, 6.10 만세운동과 같은 조국를 지키기 위한 정신은 도태되어 버렸다. 지금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주변국들의 간섭을 받으며 경제적, 정치적 외압 속에서 여전히 조국의 위기는 진행형 이다. 또 개인주의가 팽배해지고 민족의식이 희석되어가고 있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우선 필요한 것은 사회전반에 걸쳐 유공자들에 대한 예우와 존경의 정신이 정착, 확산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 유럽 등 선진국의 경우, 길거리나 공원의 명칭에 국가유공자의 이름을 붙이고, 또 학교나 공공시설에 호국보훈상징물을 조성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국민들은 생활 속에서 유공자들의 희생정신을 쉽게 느낄 수 있고,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우리도 이와 같이 곳곳에 유공자들을 기리는 상징물을 조성한다면, 국민들의 희박해진 호국보훈정신을 일깨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아울러 자라나는 다음세대의 투철한 보훈정신확립을 위해 호국보훈교육을 강화해 나갈 필요가 있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은 보훈관련교육을 학교 정규과목으로 가르쳐 어릴 때부터 보훈정신이 생활 속에 깃들게 하고 있다. 이러한 철저한 교육 속에 자란 아이들은 자신의 민족과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거침없이 애국심을 발휘하였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6.25전쟁, 월남전 등에서 전사한 수많은 미국의 젊은이들을 통해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청소년들은 지나친 입시위주의 교육으로 국가와 사회보다는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와 개인주의에만 익숙해져 있다. 만약 이러한 환경 속에서 우리의 아이들이 계속 성장한다면,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아무도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바치려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변화하는 시대에 발맞추어 보훈관련 주무부서인 국가보훈처의 위상이 강화되어야 함은 물론 다양하고 내실있는 보훈정책이 수립되고 실행되어야 할 것이다. 과거와 비교해 볼 때 현재 국가보훈처의 대내외적 위상이 많이 높아진 것이 사실이나, 여전히 다른 부처와 비교해 볼 때 재정적, 행정적, 법제적인 면에서 부족함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또한 국민들 상당수가 국가보훈처의 존재와 정책을 잘 알지 못하고 있으며, 유공자들 또한 보훈수혜정책에 대해 만족보다는 불만이 많은 편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선 국가보훈처를 부의 단위로 한 단계 격상시키는 한편, 보훈처에 강력한 행정적, 법적 권한을 부여하여 실효성 있는 정책을 추진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보훈처는 보훈대상계층의 다변화에 대응하여 여러 가지 맞춤형 수혜정책을 강구해서 국가유공자의 실질적인 예우증진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며, 원활한 보훈서비스를 위해 관계기관과도 긴밀히 협조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개선책이 적절하게 시행된다면, 국가유공자들의 물적, 질적 생활수준 향상에 기여함은 물론 국민전체의 통합과 단결을 통한 우리나라의 발전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호국역사탐방  호국보훈 기념관을 찾아서
■ 군사 연구의 표본 ‘육군박물관’
1956년 육군장교단의 성금으로 육군사관학교 내에 기념관으로 건립되었으며, 1966년 군사박물관으로, 1983년 육군박물관으로 개칭되었다. 고대전시관과 현대전시관으로 구분하여, 고대 화포류(火砲類)·창검류 등 고대 군사재(軍史財) 300여 점과 현대 총포류·장비류 등 현대 군사재 2,000여 점을 전시하여 왔다.
한편, 1980년 초부터 새로 착공된 박물관은 종래보다 약 6배가 넘는 건평 6,000㎡ 규모로 새로운 면모와 체계를 갖추고 1985년 5월에 개관되었으며, 한국의 군사발달체계를 시대별로 전시하여 선열들의 호국정신·멸공정신과 남북통일의 의지를 고취시킬 수 있는 범국민적인 산 정신교육장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주요 소장품으로는 대완구, 대장군포, 만력십사년명금고, 불랑기자포 등이 있다.
박물관은 군사상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조명하고 유비무환의 대응책을 강구하는 교훈의 산실(産室)이며, 한 나라의 군사(軍史) 연구의 표본이 되는 곳이다. 
 
■ 임진왜란 박물관 ‘국립진주박물관’
1998년 1월 임진왜란전문역사박물관으로 재개관한 국립진주박물관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시간의 흐름을 위주로 임진왜란이 일어난 원인과 과정, 결과 및 후대평가에 이르기까지 다각적인 방향에서 관련 유물 200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만화로 보는 임진왜란’, ‘사료로 보는 임진왜란’, ‘역사특집 임진왜란’을 비롯하여 임진왜란과 관련된 사료를 종합적으로 정리한 ‘사료총서(문학, 역사, 대명외교편)’ 등을 발간해 임진왜란에 관한 좀 더 깊고 폭넓은 역사적 이해를 꾀하고 또 알리는 데 노력하고 있다.
한편, 2001년 개관한 두암관은 재일교포 두암 김용두 선생이 일본에서 수집한 우리나라 유물을 기증. 백자철화죽문죽절형병을 비롯한 청자, 분청사기, 백자, 목제생활품, 금속공예품, 서예작품 등 100여점을 전시하고 있어 더욱 다양하고 품격 높은 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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