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아름다움은, 시의 진실은 꾸미지 않는 데 있다”

[시사매거진251호=차홍규 화백] 우리나라 최초로 김삿갓 연구(연구고증자료:정선 김삿갓박물관에 기증)를 한 문학박사 정대구. 그는 평생을 교직에 몸담으며 경남 영산대학교를 끝으로 은퇴를 한 뒤에도 서울시립대 사회교육원과 고향의 송산도서관에서 현대시를 강의하고 있다. 여의도복지관에서 한시감상 강의 등으로 문학에 목마른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일을 낙으로 삼으면서도 해마다 계속해서 시집 발간을 멈추지 않을 정도로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고 있다.
 

정대구 시인은 “시인은 뜨거운 가슴을 가져야 한다. 아무리 기계화되고 황금에 눈이 멀고 권력화, 조직화된다 하더라도. 혹은 체계화, 이론화된다 하더라도 원초적인 인간정신은 뜨거운 가슴이다. 시인의 뜨거운 가슴만이 이론화, 체계화에서 인간을 해방시키고 차디찬 황금과 기계로부터 인간을 회복하고 증언하고 부활시킬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라고 말한다.

시인의 길로 들어선 계기가 있었을 텐데

중‧고등학교 근무 16년간 거르지 않고 배달되는 <현대문학>에서 시보다 소설을 먼저 읽을 정도로 소설을 좋아했으나 소설을 쓸 만한 용기와 시간과 끈기가 없었는데 어느 때부턴가 집필 시간이 소설보다 비교적 짧을 것 같은 시를 습작하기 시작했고 소설보다 짧지만 한권의 소설을 읽은 것 같은 감동을, 아니 그보다 더한 효과, 더 큰 울림을 내는 시를 써보자는 욕망이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같은 나의 염원이 쌓여서, 시를 넓고 깊게 보시는 안목을 지니신 박목월 선생님께 낙점되어 1972년 신춘문예를 통해 ‘나의 친구 우철동씨’로 뒤늦게 문단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시라면 보통 서정적인 시를 생각하게 되는데 신춘문예 등단 시 ‘나의 친구 우철동씨’라는 시는 제목부터 특이 하다. 어떤 특별한 사연이 있나

대학생활 하는 동안 만리동 마루터기에 사는 누님 댁의 단칸셋방에 얹혀 지냈는데 생질이 칠남매이다 보니 나까지 열 식구가 포개 자야 할 형편이었다. 먹고 잘 곳이 마땅치 않은 나는 이곳저곳 친구네 자취방을 전전하다가 삼랑진에서 올라온 우철동 씨 형제의 자취방에 얹혀 지냈는데, 입주가정교사 자리를 얻어 나가기 전 수개월간 내가 말 한마디를 하지 않아 벙어린 줄 알았다고 훗날 그 집 동생들이 술회했다. 경남중학교, 체신고등학교를 나와 우체국에 근무하며 나처럼(당시 나도 남대문시장에서 잠깐 과일노점상을 했음) 주경야독하는 우철동씨는 나와 평생지기가 되어 내가 송산 중, 고등학교 교사가 되었을 때 그도 송산의 사강우체국장이 되어 나를 따라 내려왔고 나는 그의 실명을 딴 ‘나의 친구 우철동 씨’로 대한일보 신춘문예 시부에 당선되는 아름다운 인연을 엮어냈다. 강원도 원주에 살던 우철동 씨와는 저 세상으로 먼저 떠나기 전인 작년까지도 서로 오가며 우정을 이어왔다.

소설처럼 이야기가 있는 시를 쓰고 싶던 때에 쓴 시가 ‘나의 친구 우철동씨’인데 그 시가 신춘문예에 당선까지 되어 의미가 깊다. 그 시절엔 너무나 새로운 시도이다 보니 찬사도 많이 받았으나 한편으로는 ‘그게 무슨 시냐’ 하는 거센 비판도 함께 감수해야 했던 작품이다.

먹고 잘 곳이 마땅치 않았던 정대구 시인은 이곳저곳 친구네 자취방을 전전하다가 삼랑진에서 올라온 우철동씨 형제의 자취방에 얹혀 지냈고, 당시 경남중학교, 체신고등학교를 나와 우체국에 근무하며 주경야독하는 우철동 씨를 모델로 쓴 시가 ‘나의 친구 우철동씨’다.

시인의 삶은 어떨지 궁금하다

나는 시를 쓰면서 항상 부끄러움을 느낀다. 내 주변에서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모든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나는 항상 존경하며 몸 둘 바를 몰라 한다. 어떻게 하면 내가 하는 일이 이들이 하는 일에서 크게 동떨어지지 않게 할 수 있을까 하고 노력하는 삶이랄까. 그런 마음이고 삶이다.
 

그럼 정 시인에게 시란 무엇인가

나의 시는 생활이요, 체험이요, 나의 상상력이다. 그 이외는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내 경험의 폭은 별로 넓지 못하다. 가족과 지내는 집에서의 생활, 학생과 함께하는 직장생활, 그리고 아주 제한된 만남과 헤어짐. 이것이 시적 대상의 대부분이다. 좀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 집이 백련산 기슭에 있음으로 해서 자연을 내다 볼 수 있는 조그마한 창문이 열려있다는 점이라고나 할까. 나의 시는 무슨 거창한 사상이라든지 정치 슬로건 또는 어떤 명백한 논리 체계를 갖춘 주제 의식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어떤 통일되고 무장된 주제의식만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우리네 보통사람들의 삶-잡다한 삶이 아니겠는가? 시인 역시 보통 사람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농부가 한 알의 낟알을 거두듯, 시인은 한 낱의 낱말을 거두어 수렴하는 사람일 뿐이다. 기계공들의 멍키와 스패너 대신 시인은 펜과 원고지를 사용할 뿐이다. 우리네가 하는 일은 모두 같다. 궁극적으로 따지고 보면 삶의 허무와 회의를 메꾸고 달래기 위해서 끝없이 되풀이 되는 제 몫의 일을 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떤 시를 쓰고 싶은지

시는 기술이 아니다. 연륜이 붙은 시인이 곧 시의 숙련공은 아니다. 단지, 먼저 내 생활이 배어 있는 시를 쓰고 싶다. 인생 항로에서 부딪치는 내 나름대로의 아픔과 환희 혹은 삶의 아름다운과 추함, 그리고 ‘나’라고 하는 한 개체로서 파악되는 사회감각과 역사 감각을 이해하고 그 현장에 뛰어들어 방향감각을 제시해 주는 그런 시를 쓰고 싶다.

정 시인의 시세계에 대해 더 말씀해 주신다면

평생을 노력해도 표도 안 나는 일, 하품과 같이 지루한 일상 속에 생활리듬을 부여하는 일.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라 하더라도 나는 상식인의 우민의식을 붙잡고 늘어져야 할 나의 명제를 포기하지 않겠다. 그것은 시에 있어서 극단의 논리를 배척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나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서도 그렇다. 이러한 고집이 내가 싫어하는 특수 인으로 나를 몰고 가는 결과를 낳지나 않을지 두려워하면서도 시실 우민근성은 지칠 줄 모르는 끈기가 있다. 일상의 권태로운 삶, 하루하루의 자잘한 규범과 인습. 이러한 맥나가는 일들을 헤쳐 나가는 끈기가 그들에겐 있다. 우둔하리만큼 오늘의 일상보다 나은 내일의 일상을 꿈꾸는 건강한 비전과 그 비전을 성취 시키려는 그들의 꾸준한 자기 개혁을 나는 믿는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이들 상식인의 의식변화를 놓치지 않고 들여다볼 명제를 나는 갖는다. 끝없이 나를 혁신시키지 않고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시적 새로움을 발견하는 안목은 획득될 수 없음을 진리로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후 읽어보면 거의 대부분의 시가 내 맘에 들지 않는다. 명료하지 못한 관념과 언어의 유희, 독자에게 미안하고 부끄럽기 그지없다. 하지만 내가 나의 삶을 포기 하지 않는 한 이 부끄러운 작업은 계속 될 것이고 그때마다 나는 나의 불만을 채우려는 간절한 소망을 버리지 못할 것이다. 소망을 버린다는 것은 곧 죽음이기 때문이다. 완전하게 완성된 시집은 다음다음 아니 나의 사후에나 기대하기 바란다. 삶은 언제나 진행형이고 진행형은 미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정대구 시인.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의 열정을 마주하며 새삼 예술가를 자처하며 살고 있는 필자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된다. 한편 부끄럽고, 반성하는 시간도 되었다. 이 복잡한 시대에 흔치 않게 혼탁한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본인의 깊은 심지를 굳건히 지키면서도 겸손을 잃지 않고 창작열을 불태우고 있는 정대구 시인과 대화를 나누면서, 예술인은 화려함을 쫒아서도 안 되고, 시대의 흐름에 휩쓸려서도 안 된다는 가르침을 몸으로 느꼈다. 같은 예술인이지만 아름다운 시인 ‘정대구’에게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가득 담고 헤어지는 가슴 뿌듯한 인터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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