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비정신을 실천하고 우리 사회의 도덕적 집단이 되도록 힘쓸 터

(시사매거진249호=차홍규 화백) 최영갑 성균관유교문화활성화 사업단장은 가까운 지인으로부터 좋으신 분이라는 소개를 받아 인터뷰를 진행하게 되었다. 역시 대화를 나누다보니 최 단장의 단아한 인품에 필자도 모르게 그와의 대화에 깊게 빠져 들어가게 됨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성균관하면 이야기는 많이 들어보았지만 실제 자세한 내용을 아는 분은 그리 많지는 않으리라 생각하여 우선 성균관에 대하여 질문을 했다.

▲ 최영갑 성균관유교문화활성화 사업단장

성균관은 조선시대의 국립교육기관인데 오늘날은 어떤 활동을 하는지 

고려 말기까지 개성에 있던 성균관이 현재의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明 倫洞)(옛 이름은 숭교방(崇敎坊))에 자리 잡게 된 것은 조선왕조가 건국되고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한 이후 태조 7년(1398)이었으며, 성균관 설립과 동시에 전국에는 360개 향교가 설치되었다. 이로부터 중앙과 지방의 교육체계가 확립되었으며, 조선왕조 전 시대를 거쳐 유교교육의 구심점으로서 그 역할을 담당하였다.

1910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국립대학과 민족교육의 맥이 끊어졌으며, 1911년 조선총독부에서 경학원 규정을 제 정하여 성균관을 경학원으로 개편했다. 경학원이 성균관을 승계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대제학, 부제학, 좨주(祭酒) 따위의 조선시대 관직명을 사용했을 뿐 일개의 교화기관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경학원은 교육 기능이 크게 약화되고 선전 기능이 강화된 기관이었으므로, 유교 지식인 양성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했다.

이에 총독부는 1930년에 경학원 부설로 명륜학원을 설치하여 부분적으로 교육 기능을 되살렸다. 명륜학원은 수업료를 받지 않았으며 교과 과정은 유학, 유학사, 일본어, 동양철 학, 한문학, 공민과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직원은 조선총독이 임명하였다.

이후 1945년 광복과 더불어 성균관으로 환원되고, 1946년 9월 25일 유림의 성금으로 성균관대학교가 설립되어 민족교육의 맥을 계승하게 되었다. 오늘날 성균관은 우리나라 7대 종단의 하나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국 234개 향교가 성균관과 함께 전통 계승과 인성교육, 예절교육, 각종 교화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유교를 전공하고 현장에서 오랫동안 활동하셨는데 어려운 점은 

20대에 대학을 다니면서부터 성균관을 비롯한 유교단체에 출입하며 활동을 했다. 학자들은 이론가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유림은 현장에서 실천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양쪽 모두 단면만 보고 추진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는 이론을 공부하고 그것을 현장에서 실천하기 위해 성균관을 비롯한 유림 단체에 직접 참여하고 실무도 경험하고 교육도 담당하며 많은 노력을 해왔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어려운 점은 나이를 극복하는 길이다. 유림과 함께 생활한 시간이 길어서 많은 유림들은 내 나이가 좀 들었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지만 실제 나이를 알고 나면 모두 깜짝 놀라기도 한다. 전국 유림의 평균 연령이 70세가 넘는다. 그렇기 때문에 큰일을 하기 위해서는 나이를 극복해야 한다. 이 점이 가장 어려운 점이다. 이러한 이유로 염색도 안하고 어른들과 어울리려고 많은 노력을 펼치고 있다.

40대 초반에 성균관 총무처장이라는 직책을 수행했다. 당시로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보통 60대 후반 또는 70대 초반의 유림이 맡던 자리였는데 40대 초반의 젊은 사람이 그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임무를 잘 수행하였고 지금도 부족한 데도 배려에 의하여 실무자로는 중책에 있는 상황이다.

▲ 최영갑 성균관유교문화활성화 사업단장

유림은 주로 어떤 일을 하는지 

유림은 향교를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향교는 예전의 교육 기관이다. 따라서 지금도 교육에 대한 끈은 놓지 않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인성교육이나 예절교육에 많은 힘을 쏟고 있다. 성균관은 이미 1985년부터 전국 향교와 더불어 청소년 인성교육에 힘을 써 왔다. 벌써 30년이 넘었는데, 요즘에는 교육시킬 학생이 부족한 실정이다. 학생 수가 줄어들면서 교육을 시킬 대상이 사라지고 있다는 뜻이다. 청소년은 미래의 기둥이다. 그들이 올바른 심성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아름다운 문화를 계승할 것이고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국가청렴도가 매우 낮은 나라에 속한다. 이것은 우리나라가 그만큼 청렴하지 못하다는 말인데, 어려서부터 인성교육을 잘 받아서 훌륭한 인간으로 성장한다면 이러한 문제도 극복될 것이다. 그래서 유림들은 이러한 인성교육의 선봉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 밖에도 유림은 전통을 보존하고 계승하는 사업도 함께 한다. 향교에서 전통혼례를 무료로 해준다거나 노인들을 위한 무료급식을 하는 향교도 있다. 또한 전통예절을 보급하여 올바른 우리의 전통문화를 계승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아울러 전국적으로 도덕성 회복 운동을 많이 실시하고 있다. 

 

유교도 이제는 현대화가 필요하지 않은지 

지금은 21세기다. 16세기 퇴계나 율곡 선생이 살았던 시절과는 분명히 다르다. 매일 한복을 입고 다니는 유림도 없고, 3년 상을 치르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 여전히 16세기의 삶을 고집한다면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박물관에나 남고 말 것이다. 그래서 현대사회에 알맞은 유교를 만들어야 한다.

공자는 시중지도(時中之道)를 중요하게 말한다. 때에 알맞은 도리라는 뜻이다. 21세기에 사는 유림은 21세기에 알맞은 도리를 만들고 실천해야 한다. 국민들이 편안하게 여기고 행복할 수 있는 유교를 만드는 일이 바로 유교의 현대화이다. 요즘 중국은 공자를 자국의 상징으로 내세우는 일을 하고 있다. 공자만큼 중국을 알릴 수 있는 인물은 없기 때문이다. 공자는 4대 성인이고 동아시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중국은 우리나라의 유교를 부러워하고 배우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는 대중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도 이러한 중국의 빠른 움직임에 대처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최영갑 성균관유교문화활성화 사업단장

예술의 대중화에 대하여도 한 말씀

유교가 선비들의 학문과 철학이기 때문에 딱딱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공자께서는 음악을 배우면서 3개월 동안 고기 맛을 잊어버렸다는 기록도 있다. 유교가 지금은 음악이 없지만 예전에는 악기도 다루고 시도 짓고 심미적 측면에도 많은 공부를 했다. 따라서 오늘날 예술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유교에서는 예의와 음악이 충만한 사회를 가장 이상적인 사회로 생각하고 있다. 예의와 음악은 조화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말이다. 따라서 예술이 아름답고 정의로운 사회 건설을 위해서는 반드시 대중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술의 대중화는 학교 교육에서부터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국영수를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노래도 부르고 악기도 연주하고 시도 지을 수 있는 수업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균형 잡힌 인간을 만드는 길이 아니겠는가?

나는 지금도 연로한 유림들에게 악기 하나 배우라고 말하고 다닌다. 그것이 마음을 순화시키는 방법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예술을 사랑하고 삶이 곧 예술이 될 수 있도록 한다면 도덕사회 건설도 분명히 가까워질 것이다.

 

# 600년 된 은행나무 잎이 모두 지고 스산한 겨울 날씨에도 여전히 햇살이 그립지 않았던 것은 선비의 꼿꼿한 의지와 국민들을 편안하게 하고자 하는 생각을 읽어서일까. 인터뷰 내내 활짝 웃는 그의 모습에서 온화  선비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고, 위정자를 향한 단호한 일성에서는 깐깐한 선비의 기개도 보았다.

햇살은 비록 구름에 감춰져 있다고 해도 그 따스함은 인간이 사는 세상에 언제나 내리듯 유교적 전통이 비록 국민들의 생활에서 조금 멀어졌다고 해도 그 온기는 여전히 이곳 성균관에 머물고 있었다. 성숙하고 생각이 깊은 그에게서 우리 유교의 미래 희망을 보았다 하면 너무 앞서 나가는 것일까? 깊은 산 속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심호흡을 한 듯 마음이 신선하고 따뜻한 인터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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