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연평해전>은 월드컵의 열기로 뜨거웠던 2002년 6월에 발생했다. 북한이 제1차 연평해전의 패배에 대하여 도발을 해올 것이라는 우려가 현실화한 것이다. 당시 2002년 월드컵 열기에도 해군 장병은 흔들림 없이 임무에 충실하며, 북한의 도발에 대비하고 있었다. 한국과 터키의 3, 4위전 경기가 열리던 6월 29일 10시 25분, 서해 연평도 근해 NNL에서 북괴해군의 기습사격도발로 전쟁의 총성이 울렸다. 이에 대항하여 투혼으로 맞서 싸운 해군장병의 전투를 영화화한 것이 영화 <연평해전>이다. 제작과정에서 제작비 지원을 받지 못하는 중단사태가 발생하여 해군당국의 지원과 일반국민의 모금참여로 제작비를 충당하는 어려움 가운데 완성된 작품이었기에 더 의미가 있다.

통상 한국 영화계에는 북한을 적(敵)과 악(惡)으로 다룬 ‘반북(反北)영화’가 흥행의 성공을 거둔다는 것이 생각보다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영화감독들이 나서기를 꺼려하는 금기가 있다. 영화배우 차인표가 출연한 북한의 불법무도함과 탈북민의 처참함을 고발하는 <알바트로스(1996)> , <한반도(2006)>, <크로싱(2008)> 등이 모두 흥행에 실패하였다. 반면에 ‘친북성향의 영화’들은 줄줄이 흥행몰이를 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거 <쉬리(1999)>는 북한 특수부대의 강인함을 부각시켜서 상대적으로 남한군을 무기력하게 인식시킨 대북공포영화로, 대박을 쳤다. 그리고 이병헌이 출연하여 북한군을 인간적으로 미화하며 반공정신을 무장해제시킨 <공동경비구역 JSA(2000)>과 장동건이 주연한 6·25전쟁에 참전한 형제의 비극을 주제로 무모한 전쟁의 참상을 알린 반전주의 <태극기 휘날리며(2004)>는 영화사를 다시 쓸 만큼의 흥행을 기록했다. 그리고 <웰컴 투 동막골(2005)>은 남북한 병사 간 화해를 주제로 북한군도 동족이라는 연민을 자극하고, 미공군 조종사의 무자비한 폭격장면을 통하여 반미선동성을 부각하면서 흥행에 성공하였다.

이처럼 영화는 작품으로 역사에 기록되고 남겨져서 그 영향력을 발휘하는 문화의 힘이다. 이 힘은 비록 픽션(fiction)이지만 영상화되면서 사실(fact)로 둔갑되어 그 어떤 증언보다도 강력한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평해전>의 영화적 흥행으로 가려져서는 안 될 진실이 있다. 영화에서도 나오지만 이 전투가 북한해군의 ‘계획적 도발’이라는 것을 군 수뇌부가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투현장의 해군장병들에게 당연히 대비강화 지시가 있어야 했던 것이다.

당시 군의 대북감청부대(5679부대)는 사건발생 2주일여 전인 6월 13일과, 교전 2일전인 27일 “발포명령만 내리면 발포하겠다”는 북 경비정과 해군부대 간 교신을 감청분석해 군 상부에 보고했다. 정치권의 눈치를 보던 군 수뇌부가 북경비정이 노골적으로 남하하는데도 “월드컵 기간 중이니 남북 간 긴장관리를 잘하라”는 식의 애매모호하고 안일한 대응을 지시했으며, 도발징후정보를 묵살한 행위가 결과적으로 고귀한 장병 6명의 희생을 자초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런 내막에 대해 과거지사(過去之事)로 치부하며 구렁이 담 넘어 가듯이 넘어갈 것만은 아니라는 시각이 있다. 당시 지휘책임자였던 이상희 합참의장은 이후 국방장관으로 영전하였고, 현재 합참의장은 당시 해군작전사령부 작전처장(2000.1~2003.1)이었다. 그런데 이들에게 책임이 없을까?

군사정보는 전장의 승패를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써, 때로는 국가의 흥망도 좌우하는 것이다. 13년 전 제2연평해전 직전의 정보 묵살행위의 재발이 다시는 안보현장에서 발생하지 않기를 기대한다. 더불어 군은 ‘제2연평해전이 자초한 전화(戰禍)는 아니었을까’ 하는 진실의 성찰을 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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