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아이콘 ‘손진기의 꿈을 만드는 토크쇼’. 이번 만남은 맨손으로 이룬 아메리칸 드림의 2조원 성공신화의 주인공 스티브 김(김윤종)이다. 그와 함께 꿈과 희망,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손 : 대표님, 오늘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미국은 언제 건너가신 거예요?
김 : 대학을 졸업하고 갔는데 사실 대학 진학할 때까지 너무나 어려운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120명밖에 안 되는 초등학교에서 당시 명문인 경복중학교와 경복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지요. 너무나 찢어지는 가난에 매일 물지게를 지어 날라야 했고, 등록금을 못 내서 늘 선생님께 독촉을 받아야 했고, 교복 살 돈이 없어서 누나의 교복을 고쳐 입고 학교에 다녀야 했습니다.
군 복무시절에는 PX에서 근무했는데 나름대로 아이디어를 만들어 판매를 해서 매출이 크게 올랐지요. 전 군대에서 사업가 적인 기질이 내게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대학에 갔으나 공부보다는 연애를 더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바로 갔어요. 대학생활에서 못한 공부를 한껏 해 본거 같아요.

손 : 군 생활을 어디서 하셨어요?
김 : 저는 테니스를 좋아하고 잘 치기도 했어요. 그래서 논산 훈련소에서 테니스병을 지원했는데 뜻밖에 공수 특전단으로 배치를 받았지요. 물론 공수 특전단에서도 테니스병을 하긴 했습니다만 여단장이 그리 테니스를 즐기는 편이 아니라서 테니스 칠 기회가 많이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 후 본부대장이 저를 취사반으로 보냈고 한 2개월 취사반에서 고생을 좀 하다가 군장점 근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군장점은 민간인이 운영하고 있었는데 말하자면 군대에서 군복을 치장하는 액세서리 등을 취급하는 곳이라고 하면 맞을 것 같네요. 전 거기서 예전처럼 일하지 않고 신규 사업을 벌이게 되었지요. 공수 특전단이었으니 낙하훈련이 많았는데 그 모습을 앨범에 담아 팔기 시작했고, 인기가 꽤 좋았어요. 휴가 나갈 때 자랑삼아 하나씩들 사가지고 갔으니까요. 그 뿐만 아니라 공수 훈련 도복에 ‘공수 특전단’이라고 새겨 붙여서 팔았지요. 내의뿐만이 아니라 훈련복 트레이닝 복도 팔았고요. 심지어는 호빵과 우유도 팔았는데 없어서 못 팔정도로 인기가 많았어요. 매출은 그 전보다 10배가 오르는 성과를 얻었습니다.
전 군 생활에서 얻은 것이 많습니다. ‘복이란 것은 현실에 수동적으로 매몰되는 사람보다 늘 현실을 능동적으로 주도하는 사람에게 신이 내리는 선물이다’라고 생각했고 그 기회도 결국 잡는 자에게만 결실이 주어지는 법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 소중한 시간들이였습니다.

손 : 역시 기회를 잡는 사람은 현실에 안주하는 사람이 아니라 현실에서 뭔가를 늘 실행하는 사람에게 기회라는 말이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그럼 미국에서는 처음에 어떤 생활을 하셨나요? 미국 생활도 만만하지는 않았을텐데요.
김 : 처음엔 영어가 잘 안 되니까 정말 어려웠지요. 처음으로 풀타임 직장에서 받은 돈이 2달러 75센트에 불과 했지요. 저녁에 야간 대학원에 다니고 낮에 일을 한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생사가 달린 문제이니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열심히 한 결과 별 어려운 없이 대기업에 취직할 수 있었습니다. 리튼 데이터 시스템(Litton data system)이란 회사였는데 초임은 시간당 12불, 그러니까 3년 만에 큰 진전을 이룬 셈이지요.

손 : 역시 궁핍이 복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대기업을 포기하고 중소기업으로 옮기셨다면서요? 남들하고 반대의 길을 가셨어요. 특별한 이유라도?
김 : 원했던 대기업의 엔지니어가 되고 보니 내가 커다란 기계에 하찮은 부속품 같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 나날들이 계속 되면서 점점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졌어요. 꿈과 희망과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나 힘들게 했습니다. 이직할 것을 결심하고 페일로 옵티컬 시스템(Phalo optical system Inc.)이라는 작은 기업에 취직을 했습니다. 그 회사는 영업직 사원부터 괸리직 기술직 사원까지 모두 한곳에 모여 일을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많을 것을 보고 배울 수 있었지요. 큰 회사에서 작은 일을 하던 내가 작은 회사에서 큰일을 하게 된 셈이지요. 중소기업에서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배울 수 있었습니다.

손 : 어찌 보면 훗날 큰일을 이루는데 연습을 하신 셈이군요. 그럼 2조 원이란 돈은 언제 어떻게 버신 건가요.
김 : 두 번의 창업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저 혼자 한 것이 아니고 함께한 투자자 주주들에게 감사드려요 저를 믿고 투자해주었다는 것이 기적 같은 일이지요. 가무잡잡한 동양인인데 말이죠. 1980년대 초 그렇게 IT산업에 활성화 되지 않을 때 IT 회사 파이버먹스라는 회사를 차려 상상도 못할 성과를 걷었고요. 두 번째 회사 자일랜도 괄목할만한 성장을 올렸지요. 그간에 있었던 일을 더 이야기하려면 2박 3일 걸려야 하지요. 낙스닥에도 상장시켰고 어려운 고비도 많았지만 날 믿고 따라준 직원도 많았지요. 한 때 전 세계 직원이 1,500명에 이르고 본사직원만도 900명 정도였으니까요. 암튼 이 회사를 2조 원에 프랑스 회사에 팔았지요.

손 : 이런 성장을 이루는데 비결이나 원칙 같은 것이 있을까요?
김 : 있지요. 분명한 저의 원칙이 있습니다. 성공 7원칙이라고 저 나름대로 이름 붙였는데요.
제1원칙 호기심은 배움의 열정을 낳는다. 제2원칙 가슴 뛰는 절실한 목표를 찾아라. 제3원칙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되라. 제4원칙 필이 꽂히면 저질러라. 제5원칙 웃기만 해도 성공한다. 제6원칙 Do Do Do Action! 실행하라. 제7원칙 소통능력이 차별화다.

손 : 제목만으로도 성공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그 후에 돌연 한국으로 영구 귀국을 하셨단 말예요. 한국에서는 어떤 일들을 하셨나요?
김 : 교육사업을 했고 지금도 하고 있고 앞으로도 교육사업을 할 것입니다. 제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니까요.

손 : 네, 구체적으로 어떤 사업인지 흥미롭습니다.
김 : 우선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청소년에게 비전을 심어주고 있는 건데요. 우리 청소년들이 꿈이 없어요. 꿈을 심주고 싶어 비전을 열고 있고요. 비전을 심어주기 위한 강사 양성을 하고 있습니다. 북한에 통학버스를 제공했고, 평양 과기대와 주민들에게 먹을 것이 충분하지 못하니까 빵공장을 설립했고요. 연변에는 장학금 지급사업을 하고 있고요. 네팔에 도서관을 몇 개 지었습니다. 방글라데시에 미션 스쿨을 설립해주고 있습니다. 교복도 제공해주고 학용품과 급식까지 섬기고 있습니다. 끝까지 책임지는 교육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진행할 생각입니다.

손 :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러면 어떤 재단이 있으신가요?
김 : ‘꿈희망미래재단’을 만들어 미국에서 번 돈을 조국 대한민국을 위해서 쓸 생각을 하고 영구 귀국한 거니까요.

손 : 훌륭하십니다. 정말 존경이라는 단어를 이때 써야하는 거구나를 느끼게 됩니다. 대표님 하시는 일에 저도 동참하고 싶은 생각을 가져 봅니다.
오늘 바쁘신 중에 귀하고 소중한 말씀 나눠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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