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 서울을 지키는 4대 요새 중 동쪽의 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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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서울을 지키는 4대 요새 중 동쪽의 남한산성
  • 오경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18.11.06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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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매거진247호=오경근 칼럼니스트) 조선시대 새로 건립된, 신 수도 서울을 구획하는 4개의 큰 성문이 있다. 바로 속칭 동대문이라 불리던 정동의 흥인문과 서대문이라 불린 정서의 돈의문, 그리고 남대문이라 불린 정남의 숭례문과 정북의 숙정문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이들을 지키는 외곽의 4대 요새가 있으니 바로 동쪽의 광주, 서쪽의 강화, 남쪽의 수원과 북쪽의 개성이다. 이들 요새는 각각 산새와 지형 혹은 물길과 지리, 지세에 따라 축성된 것으로 나름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시대적 소명을 안고 있다. 그중 동쪽의 광주는 오늘날 ‘남한산성’이라 불리며 1963년 사적 제57호 지정되었으며 지난 2014년 6월에는 카타르 도하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신규 등재돼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특히 저 먼 옛날 삼국시대, 백제의 흔적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통일신라와 고려 그리고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나이테처럼 두르고 있어 특별히 기억될 만한 곳이다.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약 24㎞ 떨어진 남한산성(南漢山城, 현 남한산성 도립공원)은 해발 523.9m의 검단산과 522.1m의 남한산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 497m의 청량산을 주봉으로 하여 수도 서울을 방비하기 위한 산성 중 하나다. 성벽 바깥은 경사가 급하여 적의 접근이 어려운데 비해, 성벽 안쪽은 경사가 완만하여 방어와 수호가 용이하다.

백제 온조왕의 성도, 남한산성

이러한 남한산성의 역사는 조선시대를 거슬러 올라 고려와 통일신라 그리고 삼국시대 백제로 귀결된다. 본래 고구려의 태조인 고주몽(동명성 왕)이 첫째부인 예씨의 아들 유리를 후계자로 삼자, 둘째부인 여대왕 소서노는 전 남편에게서 낳은 아들 비류와 온조 외에 10명의 신하를 데리고 남하해 ‘십제(열명 신하의 도움으로 건국했다는 뜻)’를 세운다. 이때 큰아들 비류는 바닷가로 가서 미추홀(인천)을 도읍으로 정하고, 작은 아들 온조는 한강이 있는 하남위례성(남한산성)을 도읍으로 정한다. 얼마 후 염도가 많은 미추홀에서 곡식 농사에 실패한 비류는 근심으로 앓다가 세상을 떠나고, 그를 따라갔던 신하와 백성들이 온조왕에게 합류해 ‘백제’를 이룬다. 이후 온조왕은 죽어서 이곳 남한산성에 묻힌다.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토대로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 편에는 ‘온조왕 13년에 산성을 쌓고 남한산성이라 부른 것이 처음’이라는 기록을 적는다.

이후 조선시대인 1626년(인조 4)에는 남한산성을 축성한 백제 온조왕의 넋을 기리기 위해 초혼각으로 ‘숭렬전’을 세우고, 이어 1638 년(인조 16)에는 온조왕묘를 건립해 배양했으며, 1795년(정조 19)에는 왕명에 의해 ‘숭렬전’ 편액(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호)을 내린다. 특히 이 곳 숭렬전에는 남한산성 축성에 힘썼을 뿐만 아니라 병자호란 때 적과 싸우다가 병사한 ‘수어사 이서’의 위패를 함께 두고 있다. 현대에 와서는, 1985년 첫 지표조사를 실시하고 1998년부터 8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백제 주거지 2곳과 저장 구덩이 8곳을 확인했다. 이는 132년 백제 개루왕 5년에 세운 북한산성과 더불어 중요한 삼국시대 사료가 되고 있다. 하남 위례성을 지키는 북방의 성으로 처음 축성된 북한산성은 당시 고구려·백제·신라가 서로 차지하기 위해 다투던 전략적 요충지며, 핵심 군사력을 배치해 고구려의 남진을 막았던 성으로 4세기 근초고왕이 북진정책을 펼칠 때 북벌군의 중심 요새였다. 그러한 북한산성과 더불어 천혜의 요새로 자리한 남한산성은 아직도 풀어야 할, 백제의 많은 숙제를 안고 있다. 

수어장대는 지휘와 관측을 위해 만들어진 5대 장대 중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축물로 남한산성 내의 건축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다.

‘단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 

남한산성은 흔히 조선시대 병자호란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1636년( 인조 14) 청나라가 침략해 오자 인조 임금은 이곳으로 피신하여 항전했다. 그러나 왕자들이 피해 있던 강화도가 함락되고 패색이 짙어지자 결국 인조 임금은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송파 삼전도로 나가 치욕적인 항복을 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남한산성을 비극의 장소로 잘못 알고 있지만, 정작 남한산성은 패배를 알지 못하는 난공불락의 요새다. 산성의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어 적의 침입이 어려운 형국이고, 성안 내부는 흙으로 다져져 경사가 완만하다. 넓은 경작지와 더불어 여러 개의 우물을 갖춘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기 때문에 병자호란 당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청나라 군대에 함락당하지 않고 45일이나 항전할 수 있었던 곳이다.

이처럼 오랜 남한산성의 역사처럼, 성곽의 형태 또한 단순하지 않다. 하나의 폐곡선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본성, 봉암성, 한봉성, 신남성 등과 더불어 5개의 옹성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다. 이를 인조 때 재정비해 중앙부에 가장 큰 본성을 완성했고, 숙종 때에는 각종 시설물을 세웠으며, 병자호란 이후에는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동쪽의 봉암성, 한봉성 등을 비롯해 여러 차례 증개축을 실시한 결과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07년경에는 일본군에 의해 다수의 건축물이 훼손되고 유실되기도 하였으나 1963년 1월 21일 경기도에서 남한산성을 사적 제57호로 지정하면서 복원 계획이 수립되었다. 이후 1971년 3월 17일 경기도립공원 제158호로 지정되고 이어 5년 후인 1976년 7월 1일에는 산성을 시찰하는 관리사무소가 개소되었다. 또한 1999 년에는 남한산성 역사관이 개장했고, 2007년 6월 8일에는 대한민국의 사적 제80호로 지정되었으며, 2014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남한산성의 성곽은 백제 온조왕 당시 축성을 시작하여 조선 인조에 완성에 됐다.

남한산성 행궁, 조선시대 제도 살피는 학술가치 최고

1999년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남한산성 행궁’은 역사적,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점유한다. 경기도 기념물 제164호로 지정되었다가 2007년 6월 8일부터는 사적 제 480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이곳은 광주행궁 또는 남한행궁으로 불리며 1624년(인조 2) 9월 서장대 아래쪽에 건립되었다. 기본 정무 시설은 물론 다른 행궁에 없는 종묘와 사직에 해당하는 좌전과 우실을 갖추었고, 위패를 봉안하는 건물이 갖춰져 있다.

행궁의 규모는 상궐 73칸, 하궐 154칸으로 모두 227칸의 규모다. 상궐은 행궁의 내행전으로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평면적이다. 그중 왕의 침전인 상방이 좌우 각각 2칸씩이고, 중앙의 대청이 6칸, 4면의 퇴칸이 18칸으로 모두 28칸이다. 이러한 남한산성 행궁은 조선시대 행궁제도를 살필 수 있어 특기할 만하다. 또한 단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는, 대외 항전의 전적지로 성곽 축조기술의 최고 수준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1626년 6월 총융사 이서의 계책에 따라 유사시 임금이 피난할 수 있도록 준비된 예비 궁궐로써 종묘와 사직단을 갖춘 유일한 곳이다. 행궁 뒤 언덕에는 숙종 때 재덕당이 세워졌고, 하궐 앞에는 정조 때 한남루라는 외삼문의 누문이 세워졌다. 남한산성 행궁 안에는 광주 유수의 집무처가 마련되어 있다. 따라서 남한산성 행궁은 국왕의 임시 거처이기도 하면서 광주부의 행정이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다. 현재는 광주시의 행정업무가 이관돼 있으며, 몇 차례 변화를 통해 군사 업무 또한 겸하여 관장하고 있다. 행궁의 위치가 산성 도시 안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고지대에 자리하고 있으며 동쪽과 서쪽을 직접 바라볼 수 없도록 낮은 언덕에 가려진 탓에 방어하기 유리하다는 전략적 특성도 가지고 있다.

이로 인해 남한산성은 삼국시대 백제의 시조성이라는 사실 외에 유사 이래 군사 방어체계에서 항상 주요한 거점으로 인지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호국불교 의지가 높은 이곳은, 산성 내 축성과 관리에 동원된 승려들을 위해 7개의 사찰이 창건돼 있으며, 조선 말기 박해를 받았던 천주교 신자들의 위령물과 기념탑이 존재한다. 따라서 이곳은 기도나 굿발, 신심이 강하다는 민간신앙에 의해 도당굿과 숭렬전 제례, 현절사 제향 등이 성대히 치러지는 곳이다. 

남한산성 내에 있는 행궁은 유사시 왕이 피난할 수 있도록 준비된 예비 궁궐이었고, 일제 강점기에 소실되어 최근에 복원됐다.

자연과 예술·문학 속에 재조명 되는, 남한산성

자연과 문화를 느끼며 걷는 남한산성 성곽의 둘레길은 이미 오래 전부터 등산객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다. 해발 497m의 청량산 능선을 따라 완만하게 이어지는 성남시, 광주시, 하남시 주변 산야가 부담없이 걸을 수 있는 재미를 선사한다. 보통 성곽 한 바퀴를 모두 도는 데는 약 8km 남짓, 5시간 정도 소요된다. 산성 내·외곽으로 적당한 넓이의 산길이 나 있어 취향에 맞는 길을 골라 걸을 수 있고, 가끔 급경사를 이루기도 하지만 그다지 길지 않아 처음 등산하는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완주할 수 있다. 걷는 코스는 크게 다섯 가지로 나뉘지만 구간구간 샛길이 많아서 각자의 능력에 따라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고, 특히 남문에서 수어장대를 거쳐 북문에 이르는 2.8km 구간은 남한산성을 대표하는 걷기 코스다.

이러한 자연의 혜택 외에 남한산성은 현재 예술과 문학속에 다양한 이야깃거리로 재조명 되고 있다. 남한산성이 축성된 이후 많은 예술 작품 의 공간적 배경이나 역사적 무대로 쓰이고 있어 흥미를 자아낸다. 특히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 많아 그 의의와 가치를 다시 한 번 깨달아볼 수 있다. <고대소설 박씨전>, <산성일기> 외에도 각종 일기체 수필 등에서 남한산성이 자주 등장한다. 그 중 <산성일기>는 병자호란을 중심으로 남한산성에 피신한 조선 정부의 항쟁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어 가치가 매우 높다. 또한 현대에는 병자호란을 다룬 소설가 김훈의 <남한산성>이 출간되어 큰 호응을 얻고 있 다. 이어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각색한 <남한산성> 뮤지컬과 영화가 제작돼 큰 관심을 끌고 있다. 이렇게 남한산성은 현대인의 생활 속에 가까이 즐기는 자연 테마 관광지로 혹은 예술과 문화가 살아 있는 <남한산성> 역사의 장으로 거듭나고 있다. 또한 늘 새롭게 느낄 수 있는, 무궁무진 환상의 장으로 혹은 창작과 스토리텔링의 한 페이지로 각자의 가슴속에 되살아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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